
BGM : 김성재 - 말하자면
당신은 크리스마스에 누군가와 헤어진 경험이 있는가?
그런 기념일에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게 되면 굉장히 거슬릴 수밖에 없다. 우선 헤어진 당일에 술 처마시다가 눈뜨고 술 한 번 더 마시면 벌써 새해를 맞이해야 한다. 새해 소원으로 ‘형이랑 다시 사귀게 해주세요!’ 같은 같잖은 소원을 빌고 나면 그 후로 끝없는 겨울이 기다린다. 눈은 온 도시를 하얗게 탈바꿈한다. 나는 그저 그 위에서 뚝뚝 눈물을 흘리며 청승을 떨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잊겠노라 다짐하면서 새로운 사람 만나려고 애쓰다 보면 봄이 오고, 여름에는 헤어지고, 가을은 빠르게 지나가게 된다. 그러면 다시 겨울이 온다. 형이 없는 겨울에는 그와 함께 들었던 캐럴만 남을 뿐이다. 12월 25일을 기념하는 캐럴이 거리마다 울리면 헤어지는 장면에 짓눌리기 일쑤이다. 그날 입었던 옷(버렸다), 뿌렸던 향수(형 줬다), 도시의 색깔, 그날의 소리, 그의 얼굴과 목소리. 하다못해 그날 형이랑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까지 빼곡히 기억난다. 그래서 다시 돌아온 크리스마스 하루를 통째로 추억하며 후회하고 울고 나면, 다시. 또. 새해가 된다. 나는 김태형 없는 삼 년을 그렇게 지냈다.
산타 헤이터
국뷔
w. X
김태형 그는 누구인가. 우선 그는 나의 대학 선배이자 동시에 애인이었다. 나와 형은 3년 전까지 비밀 연애를 하며 캠퍼스 커플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저질렀다. 과방 사물함 뒤에서 몰래 키스하기, 수업 듣다가 은근슬쩍 손 잡기, 수업 안 듣고 옆자리에서 쪽지로 장난치기, 같은 교양 듣다가 나란히 학점 C 받기, 학교 앞 주점에서 맨날 술 마시다가 자취방 가기, 차 끊긴 척 모텔 가기 등등… 남들에게 게이라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 자신 있었고 들킨다고 해서 별 타격은 없었다. 나는 김태형을 그만큼 사랑했고 걔도 날 좋아했다. 정말로 확신할 수 있다. 그때 그 눈빛은 사랑이 아닐 리 없었다. 하지만 모두 김태형이 나랑 함께 있을 때 이야기였다.
“전정국 오늘도 집 가?”
“네.”
김태형과는 삼 년 전 겨울에 헤어졌다. 정확히는 크리스마스를 막 맞이한 밤에 헤어졌다.
그날 나는 집 앞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형의 말에 너무 좋아서 찔끔 눈물을 흘렸다. 그래서 그날 따라 너무 멋있는 형에게 뽀뽀를 해주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형의 얼굴을 마주하기도 전에 형의 헤어지자는 말이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뜬금없는 맥락에 놀란 내가 그를 다급하게 막았다. 네? 거짓말하지 마세요. (진짠뎅.) 제가 뭐 잘못한 거 있어요? 형 제가 다 고칠게요. 그러니까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세요. (왜? 고쳐서 다른 놈이랑 만나게?) 아닙니다. 저는 형밖에 모릅니다. 우리가 헤어져야만 하는 이유를 알려주세요. new 정국으로 태어나서 형에게 다시 고백하게 해주세요.
그러나 내가 거리감을 느끼기도 전에 형은 훌쩍 떠났고 그대로 사라졌다. 홀연히 사라진 김태형의 흔적을 찾으며 나는 무력감을 느꼈다. 개강하고 보니 김태형은 군대 복무하러 갔고, 탈력감에 빠진 나는 학교를 휴학했다. 그리고 내가 복학했을 때는 김태형은 이미 졸업한 후였다.
대학생의 방학은 지루하다. 돈 번답시고 아르바이트 하고 친구랑 술 몇 번 마시면 한 달이 훌쩍 지나간다. 나는 눈 뜨면 열 두시고 일어나면 한 시고 밥 먹으면 세 시인 하루하루를 까먹으며 지냈다. 김태형이랑 사귈 때는 학교 가는 게 즐거웠는데 지금은 전혀 아니다. 개강해봤자 정작 보고 싶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방학이라서 못 본다고 가정하는 편이 좋았다. 개강할 때마다 김태형 있나 없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것도 벌써 삼 년 째다.
땀에 젖은 손이 어느새 바짝 말라있었다. 시간이 흐르는 것은 무섭다. 여름이 멀어지면 어떡하지? 겨울이 다시 오면 어떡하냐고. 내 겨울은 여전히 김태형밖에 없다. 불쑥불쑥 떠오르는 김태형의 잔상에 대가리 박고 후회하던 것도 처음에야 그랬지, 지금은 김태형의 잔상을 보더라도 초연하게 마주할 수 있다. 아니, 사실 구라다. 나는 김태형을 초연히 마주할 생각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매일 밤 그를 잊기 싫어서 그에게 텔레파시를 보낸다. 형 보고 싶어요. 형이 다시 돌아오면 전에 입어달라고 했던 레이스 치마도 입을게요. 티팬티도 입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제발 돌아와 주세요. 오늘의 텔레파시 끝. 벌써 912번째 텔레파시를 보냈다.
“전정국 진짜 같이 안 가?”
“네. 진짜 안 가요. 저 애 보러 가야해요.”
“미친놈. 애아빠였냐?”
구라는 아니었다. 정말로 친형 대신 그의 아이를 돌봐 주기로 약속했다. 맞벌이로 바쁜 부부의 아이를 방학 동안 대신 돌보기로 한 것이다. 어차피 저녁이면 퇴근했기 때문에 그닥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다. 그리고...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고. 머쓱한 기분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낄낄거리는 동기들과 정반대의 도로를 따라서 한참 걸었다. 멀리 어린이집이 보였고, 한 때 김태형이 입었을 앞치마를 입은 선생님께서 모여 계셨다. 분홍색, 연두색, 노란색. 알록달록한 앞치마 중에서 김태형은 무슨 색을 좋아했을까? 형은 잘생겨서 뭐든 다 잘 어울렸을 것이다. 별안간 새빨간 반짝이 산타 복장을 한 그가 기억났다. 나는 울음을 겨우 참고 조카의 엉덩이를 잡아 그대로 어깨에 둘러맸다. 아부부. 다리를 바동거리는 솜뭉치를 껴안고 어린이집을 벗어났다. 저 안에 김태형이 있을까? 하다못해 그 흔한 빨간색을 보면서도 나는 김태형 생각을 했다
헤어진 후로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겼던 김태형은 어린이 집 선생님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사실을 나는 작년 겨울, 아주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되었다.
나는 그날도 형 대신 조카를 돌보고 있었다. 그날 역시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있었기에 진득한 김태형 생각에 짓눌려 낮에는 울다가 저녁에 겨우 일어났다. 형은 뒤늦게 케이크라도 사러 가겠다며 집으로 돌아가려는 나를 붙잡아 두었다. 돌아올 때까지 태극이랑 놀아줘. 넴… 불가피한 명령에 옷까지 다 챙겨 입은 채로 바닥에 엎드리자 조카도 바닥을 기어 다녔다. 삼촌은 집에 안 가? 갈 거야. 너희 아빠 오면 갈 거야. 삼촌 내일이 크리스마스래. 그렇구나. 나는 조카의 볼에 손가락을 찔러 넣어 의미 없는 손장난을 하고 있었다. 우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물리는 조카의 성난 얼굴이 귀여워서 물었다.
“삼촌한테 받고 싶은 선물 없어?”
“나는 어른이라서 선물 필요 없어.”
아이구. 우리 조카님 어른이구나~ 나는 방긋 솟은 광대를 숨기지 않고 웃었다. 그때였다. 산타가 우리 집에 방문한 것은.
“산타입니당. 문 좀 열어주세용.”
산타가 집에 찾아와? 이때까지만 해도 친형이 아기 동심을 위해서 분장한 줄 알았다. 그래서 일단 맞춰주려고 산타님 오셨어요?! 조카를 번쩍 들고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열자 빨갛고 거대한 사람이 포장된 예쁜 선물을 들고 서 있었다. 하얀 솜뭉치가 달린 모자부터 검은 벨트, 품 넓은 빨간 옷과 멋진 구두까지. 너무나도 완벽한 산타의 복장이었다. 아니 언제 이렇게 야심 찬 복장을 준비했지? 형의 준비에 놀란 나머지 사, 산타님 오늘 힘 좀 주고 오셨나 봐요? 생각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이 있었다. 내 친형이라기엔 산타의 체구가 너무 크고 그의 목소리가 너무 낮았다. 피부는 까맣고 눈이 큰 걸 보아하니…음…유치원 선생님께서 대신 산타로 분장하고 아이들 집으로 찾아가는 시스템이구나! 나는 대충 짐작하고 산타로 분장한 선생님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러자 산타님은 손을 떨며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는 갑자기 목소리를 변조해서 일부러 높은 톤을 연기했다. 어딘가 꺼림칙한 목소리였다. 엥. 예전에 들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이거는 우리 태극이가 일년동안 착한 어린이로 살아서 주는 선물이니까 소중히 다루세용!”
손 안에서 꼬물거리던 조카가 산타가 주는 선물을 받아들더니 활짝 웃었다. 산타클로스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목소리가 명랑해서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그러다가 별안간 굳었다. 기시감을 되짚을 새도 없었다. 이 사람… 김태형이다. 김태형! 산타가 아니라 김태형이잖아! 그러자 머리통 속 가장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미니 김태형이 말했다. 멍청아. 이제서야 알아본 거야? 김태형은 별로 놀랍지도 않은 얼굴로 나를 봤다.
“…….”
“형….”
“오랜만이다. 정국아. 음…. 그 사이에 애가 생긴 거야? 어쩐지 태극이가 토끼같이 귀엽더라.”
“형 우리 이 년 전에 헤어졌잖아요….”
“그러게. 그럼 너 나랑 사귈 때 이미 다른 사람이랑 살림 차린 거였어?”
죽어! 산타가 문을 쾅 닫았다. 놀란 마음에 울먹거릴 틈도 없었다. 산타님 화났냐고 물어보는 태극이를 냅다 들어서 침대에 넣어준 후 현관으로 달려갔다. 무려 2년 만에 만난 김태형이었다. 잡아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리통을 가득 채웠다. 너무 보고 싶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의 나는 총알보다 더 빠르게 달렸다고 자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엘리베이터 숫자는 이미 1층을 가리켰고, 나는 대신 계단을 두세 칸씩 밟아 내려가면서 울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몇 번이나 앞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눈앞이 흐렸지만 온 힘을 다해서 달려갔다. 일층에 형이 있다. 그곳에 내 크리스마스가 있다.
1층에 도착하자 멀리서 빨간 모자를 쓴 태형이 총총 걸어가고 있었다. 모자 끝에 달린 하얀 솜뭉치가 위아래로 흔들리는 걸 보던 나는 소리쳤다. 형! 그동안 형 생각만 하고 살았어요! 형이랑 헤어진 후로 앞뒤로 아무도 받지 않은 순결한 몸이라고요! 그 말을 들은 태형은 잠깐 머뭇거렸지만 이내 다시 빠른 걸음으로 아파트 단지를 벗어났다. 강경한 태도에 놀라 붙잡을 새도 없이 완전히 사라졌다. 입안에서 맴돌던 가지 말라는 말은 발밑으로 떨어졌다.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다. 갑작스러운 만남과 또 한 번의 이별이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다.
김태형 없이 맞은 두 번째 크리스마스에는 김태형의 발자국만 남았다. 퐁퐁 내리는 눈은 심지어 그의 흔적마저 지우고 있었다. 마치 따라오지 말라는 듯이. 김태형이 따라오지 말라고 했기에 나는 그 자리에 박힌 듯 바닥을 보며 울었다. 나는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옷 소매로 닦았다. 김태형 생각만 하면 눈물이 나는 걸 보아하니 역시 태형은 나쁜 사람이 맞았다. 산타는 울면 안 된다고 노래도 만들어줬는데 김태형은 사사건건 내 눈물샘을 괴롭힌다. 과연 산타가 태어난 날에 헤어지자고 말한 김태형다웠다.
사실 나는 김태형을 잊으려고 아주 많은 취미를 만들었다. 사진 찍기, 운동하기, 노래하기, 영어 공부하기, 꽃꽂이 학원 다니기, 요리 배우기, 소개팅 나가기 등 이하 생략. 주목적은 포기. 김태형을 포기하고 뭐라도 다른 흥미 거리를 찾자였지만 부목적은 정말로 외로워서 못 견디겠어서… 소개팅 당시, 순한 눈매에 사랑스러운 블라우스를 입은 여성을 카페에서 처음 만났다. 솔직히… 정말로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야 그분도 잘해보고 싶을 테고 나도 그러니까. 하지만 대화가 이어질수록 가능성이 50부터ㅡ처음에도 100은 아니었다ㅡ1까지 훅훅 줄어들었다. 흔한 날씨 얘기를 해도 그랬다.
?: 오늘 날씨 좋지 않나요?
정국: 옙. 요즘 내내 더웠는데 바람도 불고 선선한 게 걷기 좋은 날씨 같아요.
?: 그러게요. 하하. 저는 처음에 가을이 온 줄 알았는데 다음 주부터 다시 덥다고 하더라고요. 정국 씨는 어떤 계절을 가장 좋아해요?
정국: 저, 저는 몸에 열이 많아서 겨울을 좋아해요.
아. 겨울? 내가 겨울을 좋아했던 적이 있었나? 무슨 생각으로 대화를 마쳤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난데없이 머리통에 살던 미니 김태형이 정국의 머리털을 잡아 뜯기 시작했다. 개미만한 손이 머리통을 들쑤실 때마다 대가리가 아주 깨져버릴 것 같았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면서 남 상처 준다고 벌 받는 걸까?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며 미니 김태형의 초미니 손가락을 쳐내자 갑자기 울적해졌다. 나는 마음에도 없는 사람 만나려고 노력하면서 형 잊어보겠다는데 형은… 사람 존나 만나고 다니는 거 아니야?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정국아 정신차리자. 김태형은 나랑 헤어졌다. 헤어졌다. 한참 전에 헤어졌다. 형이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내가 잘못한 걸 고치지 않아서 형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잊어야 한다. 잊으려고 오늘의 새로운 만남을 시도한 것이다. 정국아 정신 차리자.
김태형을 떠올리니 눈두덩이가 또 발갛게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생글생글 웃으면서 대답했다. 근데 그쪽이랑 같이 걸으니까 여름도 좋네요. 여자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하하. 입에 발린 소리였다. 어떻게든 1퍼센트의 가능성은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예측 가능할 수 있게도 소개팅은 망했다. 오늘 어땠냐는 질문에 ‘하하. 날씨 좋네요.’ 대답했기 때문이다. 황당하다는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분명 잘해보고 싶어서 나간 건데 다 말아먹었다.
침대에 엎드려 베개에 얼굴을 묻자 머리통이 울렸다. 김태형… 진짜 왜 그러냐 나한테… 미니미니김태형을 달랑달랑 들어서 바이킹이라도 태우고 싶은 기분이었다. 섬유유연제를 왕창 넣어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으며 안정을 취하려고 했으나 눈물이 흘렀다. 베개에 눈물 자국이 동그랗게 남자 흑흑 우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자이로드롭에 갇힌 미니태형을 상상하며 나는 그날 소개팅 주선자에게 미안하다는 장문의 문자를 남겼다.
산타 분장 한 채로 만난 두 번째 크리스마스 이후로 김태형의 행방을 찾기는 정말로 어려웠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태형이 일하는 어린이집에는 방문하지 않았다. 갈 수는 있었다. 댈 핑계도 많았다. 태극이 핑계를 댄다면 언제라도 문을 넘나들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는 그냥 김태형이 싫어할 것 같아서…
“삼촌 왜 울어?”
“울긴 누가 울어. 어른은 이런 일에 울지 않습니다.”
태극이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코를 훌쩍였다. 그렇지만 조카 앞에서 첫사랑 못 잊어서 우는 모습 보여줄 수는 없었다. 나는 멋쟁이 삼촌이니까! 조카 얼굴 볼 때마다 김태형 생각난다고 어떻게 말하겠는가. 형한테 얻어맞기 싫어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김태형에게도 부끄러운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서 대가리 속에서마저 겨우겨우 밀어내는 중이다. 꼬물거리는 아기 손을 맞잡고 길을 걸었다. 여름의 더운 기운이 둘 위로 내리쬈다. 마음이 김태형 생각으로 들끓는 건 여름 때문이다. 가슴이 뜨거운 거는 여름 때문이고, 하루 온종일 누군가를 생각하면서 머리 아픈 것도 여름 때문이다. 그러니까, 곧 겨울이 될 여름 때문이다.
김태형이 크리스마스에 헤어지자고 고한 후로, 나의 봄은 겨울이었고 여름이 겨울이었다. 가을마저 겨울이 되면 내 사계절은 온전히 겨울만 남게 되는 것이다. 삼 년 전 겨울에 홀로 나뒹구는 순정을 누군가가 거둬갔을까? 아니면 아직도 그곳에 혼자 남겨져 있는가? 답을 찾은 것은 두 번째 크리스마스에 우연히 김태형을 마주쳤을 때였다. 나는 엉엉 울면서 김태형의 행방을 찾았다. 순정의 주인이 김태형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제 순정을 찾습니다. 나는 가로등마다 전단지라도 붙일 기세로 김태형을 비난했다. 형 같은 새끼가 무슨 연애를 해요. 그냥 평생 혼자 살아요. 형이 어딘가에서 살아 숨 쉬는 게 너무 싫어요. 대체 왜 제 눈에 안 보이는 곳에 있느냐고요. 보고 싶어요.
이제는 정말로 잊어야 한다며 자책하는 순간 마저도 나는 여전히 김태형이 너무 싫고 또 너무 좋았다. 그러니 아마 올해 겨울도 작년과 똑같을 예정이었다. 캐롤 들을 때 울었다고 했지만 실은 구라다. 나는 여름에도 김태형이 보고 싶어서 운다. 이렇게 더운 날 바다에 함께 가면 좋았을 텐데. 이 아이스크림을 같이 먹으면 좋았을 텐데. 좁은 내 자취방 선풍기 앞에서 손을 잡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순간 저 멀리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이 보였다.
길바닥에 민들레 홀씨를 불어주는 얼빠진 얼굴, 키가 크고 마른 덩치. 통 넓은 바지에 예쁜 분홍색으로 탈색한 머리카락. 손가락 하나까지 뜨겁고도 시린 사람. 입 밖으로 꺼내면 도망갈까 무서워 삼키고만 있던 이름. 형이 왜 저기에 있지? 벌써 반년만이다. 당신은 우연을 믿는가? 그의 머리 위에 빨간 산타 모자가 스쳤다. 길바닥에서 울면서 김태형을 부르던 시간이 스쳐 갔다.
우는 나를 보고 놀라서 케이크를 든 채로 달려오던 친형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나는 그날 얼굴도 못 들고 바닥만 내려다보며 김태형의 이름을 불렀다. 여름의 열기와 그날의 추위가 섞여 주변은 낯선 온도를 띠고 있었다. 태극이와 맞잡은 손이 간지러웠다. 분명 그전에는 김태형의 얼굴을 알아보고 놀란 순간이 있었고, 그와 헤어지던 순간도 있었다. 크리스마스에 잡지 못 한 자신을 후회하던 시간도, 그 전에 그와 사귈 때 했던 사랑도 있었다. 시간은 꾸준히 역행했다. 처음 만나던 순간이 생각났다. 그를 잡아야 하나? 아니면 이 상태로 그를 떠나보내야 할까? 음. 그러니까. 이번이 마지막이다. 분명히 이 순간이 마지막이다. 이번에도 그를 놓친다면 다음이 기다려줄까?
“…….”
그럴 리가 없다. 나는 그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고개를 들어줄까? 그랬으면 좋겠다. 인사를 받아줄까?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