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 Red Velvet - Ice Cream Cake
아직 제대로 된 여름에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따갑게 내리쬐는 햇살이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집에 가고 싶다.. 김태형은 손으로 애써 햇빛을 가리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얘들아 안녕..
원래라면 피시방에 가거나 여자 친구랑 시간을 보내고 있었어야 했는데. 김태형은 속으로 우는 표정을 지으며 몇 번이고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왜 내가 황금 같은 공휴일에 애들을 놀아주고 있어야 하는데..
김태형은 흔한 대한민국의 중2였다. 다만 김태형에게 다른 점이 있다면 봉사시간을 이미 모두 채웠음에도 불구하고 봉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자의는 아니었다. 중2가 자의로 애들이랑 놀아주려고 봉사를 한다니. 그건 뭐가 좀 이상한 애고.
그러나 김태형의 부모님은 봉사 정신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한 달에 두 번은 근처 고아원이나 양로원으로 봉사를 가셨고, 덕분에 김태형과 김태은은 어렸을 적부터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봉사를 가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봉사? 물론 좋지. 그런데 황금 같은 공휴일까지 가야하냐고,.
김태형은 5월임에도 뜨겁다 못해 따가운 햇빛에 금방이라도 죽고 싶은 기분이 됐다. 그러니까 오늘이 무슨 날이냐면.. 5월 5일. 아이들이 뛰어놀고 학생들은 피시방에 가고, 어른들은 아이들 덕에 하루의 휴식을 취하는 고된 일상 속 하루의 황금 같은 공휴일. 한마디로 어린이 날이었다.
사실 김태형도 친구들이랑 피시방에 갈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는데, 어린이 날이면 당연히 봉사를 해야지! 하는 부모님의 원대한 포부로 인해 김태형은 눈물을 머금고 박지민에게 카톡을 했다.
[빡짐... 나 오늘 봉사간다.... 오늘 디바는 없다....]
나의 슬픔에 충분한 공감과 너의 디바가 없으니 우리 팀이 제대로 돌아갈리 없다 라는 형식적인 인사말을 원한 카톡이었으나 돌아온 것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더 타겠네ㅅㄱ]
조롱뿐이었다...
친구가 땡볕에서 하루 종일 아이들과 놀아줘야 한다는데 돌아온 답변이 키읔이라니. 김태형은 배신감에 치를 떨었으나 박지민이 같은 상황이었으면 자신은 전화를 해 놀려줬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래.. 그러니까 네가 내 진짜 친구지...
오늘의 봉사는 간단했다. 봉사자를 상징하는 노란색 조끼를 입고, 어린이 날을 맞이하여 커다랗게 펼쳐진 간이 놀이동산에서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줄을 세우고, 다치지 않게 안전지도를 하고.. 그러니까 한 마디로 애들 안 다치게 놀아주라는 소리. 김태형은 한숨을 내쉬며 구석에 돌아다니던 하얀색 캡 모자를 눌러쓴 후 커다란 미끄럼틀 옆에 가만 서 있었다. 가만두면 정말 정수리가 타들어갈 것 같아서 그랬다.
“형아는 머하는 사람이에여?”
기왕이면 아무도 나를 찾지 않고 오늘 하루가 지나가길 바랐는데.. 김태형은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봤다. 토끼모양 헬륨풍선을 손에 쥔 꼬마가 동그란 눈으로 김태형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은 너희들 미끄럼틀 타는 거 도와주는 사람이야.”
기계적으로 다정한 음성이 흘러나온다. 김태형은 숙련된 봉사자였다. 싫다고 싫다고 하긴 했지만 아이들을 좋아하는 편이기도 했고.
“그럼 나랑 미끄럼틀 같이 탈래여?”
제 옷 소매를 잡아 당기는 꼬마에 김태형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 근데 애기 이름이 뭐야?
“정정구기여.”
“정정구?”
“정! 정! 꾸!”
전정구..? 정정꾸..? 김태형은 혼란스러운 낯을 최대한 숨기며 웃었다. 아 그렇구나~ 정구기구나~ 김태형은 전정국을 따라 최대한 발음을 흘리며 전정국의 손을 꼭 붙잡고 미끄럼틀 위로 올라갔다. 다음부터는 아이들의 가슴팍에 이름표를 달아두자고 건의 할 생각도 했다.
다행히 정국이의 가방에 전정국이라는 누가봐도 어머니가 써주신 것 같은 정갈한 글씨가 있었기에 김태형은 전정국의 이름을 제대로 부를 수 있었다. 정꾸 정구 아니고 정국이구나. 김태형이 전정국의 이름을 외우며 미끄럼틀 위에 다 올라와 정국이를 입구에 앉혀주자 전정국은 똘망똘망한 눈으로 김태형을 올려다봤다.
“형아두 나랑 가치 타!”
김태형은 눈을 껌뻑인다. 엉..?
“얼르은.”
전정국이 김태형의 옷깃을 확 잡아당기자 김태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전정국을 끌어 안고 미끄럼틀 위에 앉았다. 아니 얘는 무슨 힘이... 근데 나도 이거 타도 되나? 김태형이 혼란으로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자 전정국은 김태형의 팔을 끌어당겨 자신의 배에 감싸고 잔뜩 흥이 오른 낯으로 소리를 질렀다.
“출발!”
얼떨결에 전정국을 끌어 안은 채로 미끄럼틀 속을 통과하게 된 김태형은 소리 없는 아우성을 지르는 중이었다. 아니, 아니 이거 애들 타는 거 아니야? 왜 이렇게 높고 길고 무서워어어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미끄럼틀 하나 타자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야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김태형은 아래에 도착하고 나서도 창백한 낯으로 전정국을 꽉 끌어 안았다. 씨발.. 애들 타는 걸 왜 이렇게 무섭게 만들어 놓은 거야... 김태형은 즐거웠는지 꺄륵거리며 웃고 있는 전정국이 동앗줄이라도 되는 것 마냥 꽉 끌어 안은 채 숨을 골랐다. 진정하자.. 진정..
“형아 괜찮아여?”
창백한 낯으로 꼭 방금 귀신의 집을 통과한 사람마냥 굳어 있는 게 전정국한테도 느껴졌나보다. 전정국은 어느덧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짝 고개를 들어 김태형을 살피고 있었다. 내가 꼬맹이한테 걱정을 받다니.. 얘도 타는 미끄럼틀을..
“으응.. 형은 괜찮아..”
금방이라도 구역질을 쏟아낼 거 같지만 괜찮아.. 형은 형이잖아.. 김태형은 미끄럼틀 입구에서 김태형과 전정국이 사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다른 어린이 친구를 위해 서둘러 전정국을 안아 들고 미끄럼틀 밖으로 나왔다.
미끄럼틀 한 번 탔다고 이렇게 힘들 줄이야. 김태형은 헬쓱한 얼굴로 전정국의 손을 꼭 붙잡았다. 전정국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얼굴로 김태형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형아 잠깐만 앉아봐여.”
으응? 김태형은 전정국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손길에 순순히 바닥에 주저 앉았다. 절대 다리에 힘이 풀렸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애가 앉으라니까 앉은거다. 진짜로.
“이거.”
김태형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전정국은 김태형의 옆에 주저 앉아 저 닮아 귀여운 가방을 주섬주섬 뒤지더니 이내 파워레인저가 그려져 있는 밴드를 하나 꺼내 조심스럽게 김태형의 이마 한 가운데 붙여주었다. 김태형이 얼굴에 물음표를 가득 띄우고 있으니 전정국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밴드 끝 부분을 꾹꾹 누르며 말갛게 웃었다.
“이제 안 아플거야!”
전정국 뒤로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그 덕에 전정국의 웃는 얼굴이 꼭 천사의 웃음 같아 보였다. 김태형은 당시 중2였다. 감수성이 풍부하다 못해 넘쳐 흐르는 시기. 김태형은 귀엽고 사랑스러운 전정국을 바라보며 당장 꼭 끌어안고 무한정으로 뽀뽀를 들이 붓고 싶은 감정을 전정국의 동그란 머리통을 두어번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대신했다. 전정국은 김태형의 손길이 좋은지 꼭 미끄럼틀을 탔을 때와 같이 꺄르륵 거리며 말갛게 웃었다. 김태형은 속으로 이래서 봉사를 다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원래 봉사자로서 이러면 안 되는 거긴 한데. 김태형은 이미 편애의 늪에 빠져버렸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 전정국의 입에 하나, 제 입에 하나를 물고 행사장을 돌아다녔다. 손은 꼭 맞잡은 채였다.
“정국이 몇 살이야?”
“열 셋!”
김태형은 고개를 끄덕인다. 열 살쯤 되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저와 얼마 차이가 나지 않음에 놀랐다. 전정국은 그 나잇대 애들에 비해 체구가 작았고, 말갛게 순한 웃음을 가지고 있었다. 또 눈동자는 어찌나 맑은지. 김태형은 정신만 차리면 자신의 손이 전정국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였다.
“형아는 몇 학년이야?”
전정국은 입가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잔뜩 묻힌 채 김태형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유해하다. 유해한 전정국.. 김태형은 전정국을 깨물어주고 싶은 충동을 죽이며 휴지를 꺼내 전정국의 입술에 묻은 아이스크림을 닦아냈다.
“형은 중학교 이학년.”
그리고 이름은 김태형. 하며 제 조끼에 달려있는 이름표를 보여줬더니 전정국의 동그란 눈이 커졌다. 히야! 하고 놀라는 표정이 보여서 자꾸 웃음이 나왔다. 아 진짜 이렇게 귀여운 애도 있구나.
“그럼 태형이 형이라구 부르면 돼여?”
전정국은 맑은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며 김태형을 바라본다. 김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전정국은 태형이 형. 하고 다시 이름을 부르며 눈꼬리가 휘어져라 말갛게 웃고 있었다. 와 진짜 얘웃음은 국보다. 김태형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느덧 전정국을 따라 웃고 있었다.
*
한참을 정신없이 놀다보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부모님들이 아이를 데리고 하나 둘 귀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황금 같은 공휴일도 벌써 끝이구나. 김태형은 여전히 손을 맞잡고 있는 전정국을 내려다본다. 정국아. 너 집에 안가도 돼? 전정국의 볼에는 전정국을 꼭 빼닮은 토끼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나 태형이 형아랑 놀래.”
집에 안 가. 제법 단호하게 말을 뱉으며 김태형의 허리에 팔을 감아 폭, 안기는 전정국의 동그란 뒤통수를 두어번 쓰다듬었다. 그래도 집은 가야 할텐데.. 만지는데 중독성이 뛰어난 전정국의 뒤통수를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자 저 멀리서 정국아~ 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머닌가? 김태형은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전정국을 들어 뒤뚱뒤뚱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정국이 어머님?”
“네?”
“여기 정국이...”
뒤돌아 계신 어머니의 어깨를 톡톡 치자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지으시더니 이내 김태형에게 코알라처럼 붙어있는 전정국을 보며 크게 웃으셨다. 정국아 뭐해? 나 집에 앙갈거야. 정국이 버리고 엄마아빠 집에 갈까? 그 말에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어린 애는 어린 애구나. 김태형은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겨우 참으며 전정국의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정국아 집에 가자.”
“시러어..”
“형이랑은 다음에 또 놀면 되잖아.”
“다음에 언제?”
글쎄... 또 다시 초롱초롱한 낯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전정국에 김태형은 난처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언제 놀면 좋을까.
“다음 어린이 날에?”
“진짜로?”
“응, 다음 어린이 날에도 정국이가 여기 오면 형이 놀아줄게.”
약속. 김태형은 전정국의 앞에 쪼그려 앉아 시선을 맞춘 후 새끼 손가락을 내밀었다. 전정국은 김태형의 손가락과 김태형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크게 주억거리며 김태형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얽었다. 약속 한거야! 김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로 약속.
약속을 하고도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리는 전정국에 고개를 갸웃이니 전정국은 결심했다는 듯 눈을 질끈 감고는 김태형을 꼭 닮은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김태형의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
“옴마?”
김태형이 놀라 큰 눈을 동그랗게 뜨니 전정국은 새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저 멀리로 오도도 뛰어갔다. 형 다음에 봐여! 하고 붕붕 크게 손을 흔들며 말갛게 웃는 얼굴이 보이자 김태형은 제 뺨을 쥔 채로 헛웃음을 지었다. 도둑뽀뽀 당했네. 김태형은 잔디밭에 쪼그려 앉은 채로 느리게 손을 흔들었다. 내년에 보자 정국아.
*
“일 년에 한 번은 너무 심하다.”
“너도 약속 한 거거든.”
“그럼 번호라도 주던가요.”
“친구야 안녕~ 오빠랑 미끄럼틀 타러 갈까~?”
의도적으로 전정국의 말을 무시하는 김태형에 전정국은 그늘에 앉아 입술만 비죽 내밀었다. 김태형 진짜 너무하네. 어느덧 전정국은 김태형을 따라 노란 봉사자용 조끼를 입고 있었다.
사실 전정국이 정말 김태형을 기억하고 매년 어린이 날마다 김태형을 만나러 올지는 몰랐다. 처음 만났던 열 셋의 전정국은 열 넷의 중학생이 되고서도 김태형을 만나러 왔다. 그땐 교복 입은 걸 자랑하겠다며 교복을 입고 왔다 땀을 뻘뻘 흘리며 셔츠를 벗어 던지곤 했었지. 그리고 올해. 전정국은 올해로 삼 년째, 횟수로 따지면 세 번째 김태형과의 만남을 가지고 있는 중이었다.
사실 두 번째 만남까지는 어린이와 봉사자의 관계였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형이 나랑만 놀아줄 수는 없는거고. 그래서 전정국은 방법을 바꿨다. 형이 나랑만 놀 수 없다면, 내가 형 옆에서 놀면 되는 거 아닌가?
어차피 봉사도 해야 했으니까.. 전정국은 스스로의 변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어린이날 봉사자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사전 교육차 모인 장소에서 김태형을 발견하자 휴일이고 뭐고 김태형에게 다 헌납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전정국은 아무렇지 않게 김태형의 옆에 서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오늘도 엄청 덥네요. 작년에도 그러더니.”
“그러게요...”
김태형은 시작도 전에 지친 낯이었다. 나를 만나기 전엔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니. 전정국은 김태형의 놀라운 서비스 정신을 칭찬하며 저 또한 김태형 못지않은 서비스 맨이 되리라 결심하고 빙긋 미소를 지었다. 물론 김태형 앞에서 나오는 웃음은 가식이 아니었지만.
“어?”
“안녕?”
고개를 돌려 전정국을 바라본 김태형의 눈이 끝을 모르고 커진다. 안 그래도 큰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처럼 커진 걸 보자 버릇처럼 흘러나오는 웃음을 전정국은 겨우 참았다. 아 김태형 표정 완전 웃겨. 전정국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손을 흔든다.
“야 네가 왜 여기서 나와?!?”
그러나 김태형은 태연하지 못했다. 한 톤 높아진 목소리가 울컥 튀어나오자 노란 조끼를 입고 있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김태형과 전정국에게 와 꽂힌다. 김태형은 당황한 얼굴로 제 입을 틀어 막았다. 전정국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형 반가워요.
“너 존나 웃기네...”
고등학생이 된 김태형은 작년보다 조금 더.. 영혼이 빠진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래도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매사에 반항적이고 거친 느낌이 있었는데. 행동도 말투도 죄다 기운이 빠져 있었다. 고등학생은 다 저런건가? 의문이 들었지만 굳이 뱉어내진 않았다. 김태형 3년이면 맞을 짓 안 맞을 짓 구분은 할 수 있었다.
“신기하죠. 나 이제 형이랑 동갑인데.”
형 처음 만났을 때랑. 굳이 부연 설명을 덧붙였더니 김태형은 피식 웃었다. 그러네. 김태형은 해가 가면 갈수록 좀 더 전문화 된 봉사자가 되어 있었다. 그래도 간지라고 작년에는 딱 붙는 스키니진에 셔츠를 입고 왔던 거 같은데.. 올해에는 아예 커다란 벙거지와 다시마 두 장을 붙여놓은 것 같은 통 넓은 바지, 그리고 목이 늘어난 티..를 입고 있었다. 전정국은 김태형에게 잘 보일 생각을 하며 이 날씨에 딴딴한 가죽바지와 셔츠를 챙겨 입은 불과 몇 시간 전의 자신을 떠올리고 약한 상대적 박탈감에 사로잡혔다. 너무하네.. 형은 나한테 잘 보일 생각도 안했나봐... 그러나 아무리 옷을 편하게 입어도 김태형은 김태형이었기 때문에 전정국은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말 해봤자 형은 오늘도 잘생겼네요. 하는 게 다였다.
김태형은 정말 뛰어난 능력의 서비스 맨이었다. 작년 봉사의 대상자였던 전정국을 대할 때와 같은 봉사자가 된 전정국을 대할 때 달라진 김태형의 태도를 생각하며 전정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혹시 내가 지금까지 만난 김태형은 다른 김태형이 아니었을까? 태형이 형이 쌍둥이라던가... 뻘 생각을 하고 있으니 김태형이 전정국의 어깨를 툭 쳤다. 뭐해. 가자.
김태형은 같은 봉사자가 된 전정국을 굳이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았다. 김태형은 그 날의 목표를 정확히 인지하는 편이었으니까. 오늘의 목적은 노란 조끼를 입고 있는 전정국을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맑고 순수한 어린 아이들을 안내하고 놀아주는 것이었다. 김태형은 행사가 시작된 후 전정국 쪽은 바라보지도 않고 봉사에 집중했다. 덕분에 전정국 입술만 대빨 튀어나왔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일년 만에 만나는 건데...
“형, 혀엉.”
몇 번을 부르고 옆구리를 찌르며 관심을 끌어보고자 했더니 김태형은 아예 전정국을 못 본 척, 못 들은 척 하고 있었다. 덕분에 전정국은 관심종자가 된 기분을 잔뜩 맛 봤다.
“김태형!”
“야.”
뒤진다 진짜. 김태형이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라리며 전정국을 노려보는 것에 전정국은 합, 입을 다물었다. 김태형은 유독 반말에 예민했다. 근데 반말을 해야 반응을 해주잖아. 전정국은 울고 싶은 기분이 됐다. 오늘 아니면 일 년 뒤에나 만나 줄 거면서. 김태형은 전정국에게 너무 무심한 경향이 있다.
“형이 나도 좀 소중하게 다뤄줬으면 좋겠다..”
전정국은 우울해졌다. 나 개인적으로 만나 줄 것도 아니면서.. 김태형이 정말 전정국을 봉사할 때 오는 친한 애기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우울해졌다. 다정하게 웃는 낯으로 아이들을 줄 세우는 김태형 옆에서 한참을 칭얼거리고 있으니 김태형은 지친다는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며 어디서 비비빅 하나를 사 와 전정국의 입에 물렸다.
“그거 물고 입 다물고 있어라.”
헐 심쿵.. 전정국은 입에 비비빅을 문 채 얼이 빠진 표정으로 김태형을 바라본다. 형이 지금 나 챙겨준 거 맞지. 아이스크림에 전정국은 자신의 분홍빛 입술에 아이스크림이 달라붙어 다소 멍청해보이는 인상을 한 채로 서둘러 김태형의 뒤를 따랐다. 김태형은 정작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혀엉 같이 가요!”
전정국은 그 흔한 아이스크림 하나에도 몇 번이고 반할 수 밖에 없었다. 어쩌겠어. 상대가 김태형인데.
“형 근데 형은 진짜 나 안 보고 싶었어요?”
전정국은 끈덕지게도 김태형의 옆에 달라붙어 하루종일 징징거리고 있었다. 야 너 진짜 끈질기다. 하는 김태형의 말에도 맞아요 제가 좀 끈기가 있죠. 하고 대꾸한 전정국은 밥버거를 죽일 듯 쑤시고 있는 김태형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덥다..”
밥은 좀 편하게 먹자 정국아. 김태형이 한숨을 푹 내쉬며 쥔 수저로 밥버거를 푹푹 찌른다. 그러나 전정국은 김태형에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이게 얼마 만에 보는건데. 또 일 년 뒤에나 볼 건데. 전정국이 대답 대신 김태형의 팔에 팔짱을 끼자 김태형은 못 참겠다 싶었는지 위협적으로 수저를 들어 전정국도 찌를 것처럼 살벌하게 눈을 굴렸다.
“헉 형 지금 너무 섹시해요.“
그러나 상대는 전정국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에 김태형은 헛웃음을 터트리며 수저를 내렸다. 이 새끼 진짜 골 때리네..
”정구가. 너는 내가 뭐가 그렇게 좋냐?“
이쯤되면 김태형도 궁금해지는거다. 어릴 때 하루 놀아준 게 뭐라고 전정국은 나를 이렇게까지 따라다닐까. 나는 전정국 나이 때 봉사 오기 싫어서 엄청 징징거렸던 거 같은데.
”저는 그냥 형이 좋아요.“
형이 웃는 것도 좋고, 형 이름이 김태형인 것도 좋아요. 당당하게 말하면서도 뭐가 그렇게 부끄러운건지 배시시 얼굴을 붉히며 대답하는 전정국에 김태형은 입을 다물었다. 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전정국 진짜 미쳤나봐.. 김태형의 귀가 새빨갛게 물든다. 김태형은 전정국의 무조건적 애정에 면역이 없는 편이었다.
식사를 마무리 한 둘은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시에 일어섰으나 향하는 방향은 달랐다. 전정국이 힘이 좋아보인다는 이유로 저 멀리 트럭에서 음료수를 꺼내 옮기는 작업을 맡았기 때문이다. 김태형은 그늘 속에 앉아 콜라를 마시며 멍하니 전정국을 응시한다. 저 멀리 보이는 전정국은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워 보이는 상자를 나르고 있었다.
그 꼴을 보고 있자니 참.. 안쓰러운 기분이 들었다. 너는 내가 뭐라고 여기까지 따라와서 놀아도 아까울 시간을 버리고 있는건지. 김태형은 머리를 긁적이며 전정국을 바라본다. 전정국은 그 와중에도 김태형을 알아본건지 저 멀리서 벙긋벙긋 웃으며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야 정구가.“
”네?“
”너 생일이 언제야?“
전정국은 눈을 껌뻑인다. 김태형을 짝사랑한지 3년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정국은 김태형은 몰랐다. 3년이라 해 봤자 3일 밖에 보지 못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3일간의 김태형을 관찰하여 나온 결과, 김태형은 진짜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게 좋은가 싶으면 또 금방 싫어하고, 이게 싫은가? 하면 또 금방 좋다고 달려드는. 그 탓에 전정국은 김태형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를 조각조각 뜯어내어 해석해야만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김태형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김태형의 말 한마디에 전정국 머리가 데굴데굴 굴러가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무 의미 없을지도 모르는 가벼운 말 한 마디일지라도, 김태형이 던지는 것은 전정국에게 그 배가 되어 영향을 끼쳤으니까. 김태형이 대답을 보채듯 고개를 갸웃이자 전정국의 동그란 눈동자가 흔들렸다. 갑자기 생일을 왜 물어보지?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적절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전정국이 동그란 눈을 꿈뻑거리고만 있으니 김태형의 미간이 슬 찌푸려졌다.
”야 너 왜 대답을..“
”저 오늘이요!“
그러니까 무턱대고 튀어 나온 말은 결코 전정국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소리다. 김태형이 대답을 보채며 미간을 찌푸리는데 그 앞에서 어떤 사람이 침착하게 머리를 굴려 답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전정국은 무작정 답을 뱉어놓고 김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김태형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전정국은 최대한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오늘이 내 생일이라고 했으니 형이 오늘 나한테 더 집중해주지 않을까? 형은 심성이 착한 사람이니까. 어쩌면 앞으로 매번 만날 어린이 날마다 전정국에게 집중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 생각을 하니 저절로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전정국이 변태 같이 엷은 웃음을 지으며 김태형을 바라보고 있으니 김태형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왜인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전정국은 어설프게 입꼬리를 끌어 올린다. 형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너는 지짜 운도 없다.“
네?
”네 생일 때 한 번 더 만나주려고 했더니...“
뭐라고요...?
김태형은 정말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전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너는 하필이면 생일도 어린이 날이냐? 퉁명스럽게 뱉어낸 김태형의 말 한마디에도 전정국은 대답 할 힘을 잃은 채 세상 잃은 얼굴을 하고 김태형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랑 한 번 더 만나주려고 했다고? 그러니까 이거 방금 태형이 형이 나한테 데이트 신청 했던거지. 근데 이걸.. 이 기회를 내가 내 손으로...
”형 저 생일 오늘 아니에요!!!!!“
”늦었어 새끼야.“
전정국이 다급하게 손을 휘젓자 김태형은 미간을 찌푸리며 전정국의 손을 잡아 내렸다. 어디서 구라를 치려고. 꼭 중고나라에서 사기꾼을 잡은 것 같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태형의 앞에서 전정국은 더 이상 자신의 생일이 5월 5일이 아니라 9월 1일이라고 주장하기 어려웠다. 저런 귀여운 표정을 어떻게 망가트려! 전정국은 마음 속으로 어머니에게 짧은 사과를 남기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사실 제가 5월 5일 생, 전정국입니다.
불쌍한 새끼. 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김태형은 전정국이 정말 안쓰럽긴 했는지 전보다 부드러운 태도로 전정국을 대하고 있었다. 그 증거로 평소 같으면 뺨싸다구를 맞았을 일을 너그럽게 넘어가주었으니까.
”형 저 있잖아요..“
”뭐가 있어. 없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전정국은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인다. 형은 나 생일로 알고 있으니까 이 정도는 용서해주지 않을까? 아니 그래도 형이 나 싫다고 다신 안 만나주면 어떡해. 두 개의 자아가 전정국의 안에서 격렬한 싸움을 일으키는 중이었다. 김태형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인다. 전정국은 입술을 꾹꾹 몇 번이고 깨물다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 저지르고 말자는 심정이었다.
쪽.
전정국의 입술이 김태형의 볼에 짧게 닿았다 떨어진다. 헉, 했다. 진짜 했다. 전정국은 자기가 먼저 입술 박치기를 해 놓고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느리게 고개를 들어 김태형의 얼굴을 본다. 김태형은 한쪽 입꼬리만 들어 헛웃음을 짓고 있었다. 형은 화낼 때 저렇게 비웃는 웃음을 짓는구나.. 아 나 진짜 좆된건가.. 전정국은 김태형의 얼굴을 보며 금방이라도 바닥에 머리를 박고 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싶은 충동을 느꼈는데, 그 이후 이어진 김태형의 행동은 예상과는 매우 다른 것이었다.
”넌 생일이라 봐준다.“
그리고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김태형의 커다란 손에 전정국의 턱이 잡혔다. 전정국이 놀란 눈을 껌뻑이자 김태형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이 밀었다. 헉. 헉 가까이서 보는 형 진짜 너무 예쁘...
쪽.
전정국은 눈을 깜빡인다. 방금 뭐가 지나갔지?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눈만 껌뻑이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김태형이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니까 방금.. 방금 내 입술에 닿았던 게 형의.. 입, 입, 입술....?
전정국은 한 삼초 정도가 지나서야 개구리 마냥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리곤 멍청이마냥 말을 더듬어가며 김태형의 팔을 꼬옥 붙잡는 것이다.
”혀형 나 나 한 번만 더“
”싫어.“
그러나 김태형은 새침했다. 전정국은 형이 뽀뽀를 해줬다는 기쁨과 그 감각을 너무 순식간에 놓쳐버렸다는 슬픔이 섞인 표정으로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했으면 좋겠는데 김태형은 단호하니까. 그근데 형이 생일이라 봐준다고 했잖아. 그럼 한 번만 더 해도.. 전정국이 어딘가 홀린 표정으로 김태형에게 몸을 기울이자 김태형은 자신에게로 드리워지는 새까만 그림자를 눈치 챈 건지 커다란 눈을 도륵도륵 굴리기 시작했다. 야, 야 너 뭐..
쪽.
”야 전정..“
쪽쪽.
한 구석으로 몰린 김태형이 잔뜩 당황한 낯으로 전정국을 올려다본다. 전정국은 지금.. 그러니까, 한마디로 눈에 뵈는 게 없는 상태였다. 마음 같아서는 형 입술을 물고 빨고 그 안에 혀도 넣어보고 싶고 형의 분홍색 혀도 빨아 보고 싶은데 그러면 형이 진짜 나 다신 안 만나줄 거 같으니까. 전정국은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해 김태형의 입술에 몇 번이고 입술을 부딫히고 있었다. 한번 입술이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이성이 휘발되는 기분이었다. 형 입술은 너무 말랑하고, 또 폭신하고.. 전정국은 본능처럼 김태형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몇 번이고 입을 맞췄다. 쪽쪽거리는 소리가 날 때마다 김태형의 귀가 새빨갛게 붉어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이, 인제 그만..“
귀가 붉어지다 못해 얼굴까지 새빨개진 김태형이 전정국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꾹꾹 밀어댄다. 전정국은 그제서야 이성이 돌아 온 건지 눈을 껌뻑이며 김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태형의 큰 눈동자가 도륵도륵 구르다, 전정국에게 안착한다. 전정국은 자신의 가슴팍에 놓인 김태형의 손을 잡아끌어 서로의 틈을 줄였다. 김태형은 금방이라도 딸꾹질을 할 것 같았다. 전정국이 보기 드물게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형.“
김태형은 침을 꼴깍 삼켰다. 옴마야 얘 언제부터 이렇게...
”진짜 좋아해요.“
섹시해졌대.....
얼마 지나지 않아 전정국에게 입술이 먹혔다. 김태형은 모른 척 눈을 감았다. 어설프게 밀려드는 전정국의 혀가 웃겼지만 웃지는 않았다. 그 대신 저 또한 서투르게 전정국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일 뿐이었다.
”형 오늘 너무 좋았어요..“
”너 맨날 그 소리 하잖아.“
전정국은 입술을 비죽인다. 평소랑 오늘은 쫌 다른 의미예요.. 하며 애기마냥 칭얼거리는 꼴에 김태형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알았어 알았어. 하며 전정국의 동그란 머리를 헝클이듯 쓰다듬자 전정국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배시시 웃었다.
”잘 가요. 내년에 봐요 형.“
”... 어.“
형이랑 헤어지기 싫다고 엉겨 붙어 엉엉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전정국은 먼저 김태형에게 손을 흔들고 헤어짐을 종용하고 있었다. 김태형은 괜히 배알이 꼴렸다. 이젠 나랑 헤어져도 별로 안 슬픈가보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한쪽 입술을 씹고 있으니 전정국이 의아한 표정으로 김태형을 바라본다. 뭐. 왜. 눈깔을 사납게 치켜뜨고 잔뜩 무서운 척을 했더니 전정국이 알아서 눈을 깔았다. 김태형은 괘씸한 전정국 탓에 잠시 고민했으나, 그래도 생일이니 봐준다는 관대한 마음으로 전정국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전정국은 김태형 한정으로 눈치며 수치가 증발한 인간이었다. 손을 내밀었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 그 위로 조심스럽게 손을 올리는 것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손 말고 폰 달라고. 폰.“
네가 개새끼야? 했더니 전정국은 그제서야 아.. 하고 멍청한 소리를 내더니 멋쩍게 웃으며 휴대폰을 김태형의 손 위에 올렸다. 김태형은 새침한 표정으로 전정국의 휴대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그대로 자신에게 통화를 걸어 자신의 휴대폰에 전정국의 번호가 찍히는 것까지 확인한 김태형은 그제야 전정국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정 보고 싶으면 연락해.“
전정국은 얼빠진 표정으로 김태형을 멍하니 바라보더니 대답 안하냐는 김태형의 질타를 듣고 나서야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맨날 할게요. 아니 맨날은 하지 말고. 그럼 자주 할게요. 그래라 그럼.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하자 김태형은 한숨을 푹 내쉬며 버스 창가에 머리를 기댔다. 오늘 하루 너무 길다. 문득 손을 올려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아직도 뜨거운 전정국의 숨결이 입 안에 남아있는 것만 같아 얼굴로 열이 몰렸다. 제 입안을 파고들던 전정국의 감촉이나 표정 같은 게 자꾸 떠올랐다. 마지막으로 떠오른 것은 제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좋아한다 말했던 전정국이었다. 미쳤나봐 정말.. 김태형은 화끈거리는 자신의 볼을 유리창에 붙였다. 그럼에도 발갛게 달아오른 볼이나 귀는 식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형 조심해서 들어가요.]
[오늘 진짜 고마워요 제 생애 최고의 생일이에요.]
김태형은 액정을 환하게 밝히는 전정국의 문자에 픽 웃음을 흘리곤 괜히 혼자 제 양 볼을 쥔 채로 고개를 숙였다. 전정국 때문에 진짜 미치겠네..
*
그 이후로도 전정국은 매일 같이 김태형에게 카톡을 남겼다. 김태형에게 귀엽게 보일 거라며 여러 가지 이모티콘을 사 모으기도 했다. 물론 돌아오는 것은 김태형의 칼 같은 단답이었지만..
단답이었지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김태형은 퉁명스럽지만 다정하게 대화를 이어주었고, 그 덕에 전정국은 매일 밤마다 해벌쭉 웃는 낯으로 학원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전정국은 절대로 김태형에게 전화를 걸지 않았다. 물론 형 목소리가 듣고 싶었고 말로서 대화를 주고받고 싶었지만. 왜인지 전화는 함부로 걸 수 없었다. 사실 전화를 걸었다 김태형 주변 사람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 같아서 그랬다. 전정국은 한낱 열여덟의 고삐리일 뿐인데 김태형은 명문대에 진학한 신입생이었으니까. 김태형에게 자신은 정말 애기로만 보일 것 같아 그것이 서러웠다. 근데 만약 통화를 걸었다가 태형이 누구랑 통화 해? 아는 동생이요. 하는 소리나, 김태형이 다른 사람들이랑 꺄르륵거리며 웃는 소리를 들으면 자괴감이 땅 깊은 줄 모르고 파고들 것 같아서. 전정국은 자신의 자존감을 위해 전화는 잠시 참기로 했다. 어차피 연락은 카톡으로도 할 수 있으니까...
애초에 김태형은 전정국에게 문자며 카톡 무엇도 먼저 보내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전화도 먼저 걸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무려 사개월동안 단 한 번의 통화 없이 카톡으로만 대화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갑자기 김태형에게서 전화가 온 것은 전정국이 매우 당황할 만한 일이었다는 소리다.
헉 태형이 형 전화. 전정국은 그 자리에 쩡하고 굳어 못볼 것을 본 사람마냥 멍하니 자신의 휴대폰을 바라보았다. 분명 저 액정에 떠 있는 이름은 태형이 형이 맞는데 형이 나한테 전화 올 일이 뭐가 있지? 전정국은 방금 씻고 나온 뽀송뽀송한 몸에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불안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못 본척 할까? 순간 나쁜 생각이 머리를 스쳤으나 차마 김태형의 전화를 받지 않을 수는 없었다. 술에 취했으니 데리러 오라고 전화 한 걸 수도 있고, 진짜 중요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까... 전정국은 손에 절로 차오르는 식은땀을 허벅지에 슥슥 닦아내고 경건한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네 태형이 형 무슨 일..”
“야 뒤질래?”
전정국은 이젠 손이 아니라 이마에서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내야했다. 네 달 만에 처음 듣는 형의 말이 욕이라니..... 존나 섹시하다. 전정국이 얼빠진 표정으로 전화를 귀에만 대고 있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김태형의 열 받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 생일 어린이 날이라며.”
전정국은 눈을 껌뻑이다 아, 아.. 하는 멍청한 소리만 웅얼이듯 뱉어냈다. 제가 그랬던가요? 어벙하게 이어지는 답변에 김태형의 쌍욕이 날아와 고막에 때려박혔다. 너 생일 오늘이잖아. 9월 1일. 카카오톡 친구 목록에 오늘 생일이라고 뜨거든? 씨발 뒤질래? 전정국은 김태형의 목소리를 들으며 침을 꿀꺽 삼켰다. 우리 형은 딕션도 좋네..
“이 맹랑한 새끼가 진짜.”
너 키스 하려고 일부러 구라친 거지. 대답해 이 새끼야. 전정국은 놀란 얼굴로 아뇨아뇨아뇨만을 반복하며 손을 허공에 휘저어댔다. 정작 김태형은 수화기 너머에 있었음에도 손이며 고개를 저어대던 전정국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형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요..”
형이 너무 급하게 물어봐서.. 그래서 내 탓이라고? 아뇨 그건 더더욱 아니에요. 그럼 네 잘못이네. 네.. 맞아요. 잘못했어요.. 순순히 전정국의 사과를 받아내고서야 분이 좀 풀렸는지 김태형의 목소리가 처음 전화를 걸었을 때보다 훨씬 침착해졌다. 전정국은 눈을 깜빡인다. 형 진정했나..?
“제가 그럼 형 찾아가서 사과해도 돼요..?”
속이 뻔히 보이는 말에 수화기 너머로 김태형의 헛웃음이 이어졌다. 헛소리 하지마라 이 핏덩어리야. 단호하게 뱉어낸 김태형의 말에 힝. 하는 전정국의 우는 소리가 뒤따라왔다. 김태형은 문득 거울을 보다 변태마냥 실실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라 통화를 끊었다. 미친. 나 왜 저렇게 웃고 있어?
전화가 끊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전정국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김태형은 양 손으로 제 뺨을 감싼다. 뺨이며 뺨에 닿았던 손이며 죄다 뜨거워 녹아내릴 것 같았다. 설마, 설마.. 전정국 석 자가 떠 있는 휴대폰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본다. 김태형의 귀가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설마 나 전정국 좋아하나? 김태형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입술을 꾹 물었다 놓는다. 미쳤나보다. 나 진짜 미쳤나봐. 어떻게 핏덩어리일 때부터 봤던 전정국을... 한참을 걸려오던 전화가 끊어졌다, 다시 울리기 시작한다. 김태형은 제 심장을 몇 번이고 쓸어내리고 나서야 다시 전화를 받았다. 놔뒀다간 하루 종일 전화하고 있을 것 같길래.
“형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하며 이어지는 말에 김태형은 앞에 전정국이 있는 것마냥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김태형은 전정국의 목소리를 듣자 발개지는 볼이나 과도하게 쿵쿵거리는 심장에 어쩌면 전정국을 좋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다.
“그럼 오던가..”
전정국은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떴다. 작고 소심하지만 분명 김태형의 입에서 뱉어진 말은 허락의 말이었다. 전정국은 랩을 하는 것 마냥 갈래요갈래요갈래요를 반복하다 시끄럽다고 빼액 소리를 지르는 김태형에 그제서야 입을 다물었다. 대박. 나 태형이 형 집 간다.. 김태형은 부끄러운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 한 벌은 받을 각오하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전화를 뚝 끊어버렸다. 그러나 전정국은 끊어진 통화를 신주단지 모시듯 침대 위에 올려놓고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한참을 기도했다. 부처님 하느님 알라신님 그 외의 여러 신님들 모두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더 착하게 살게요.
부끄러움에 모른 척 하려는 김태형을 붙잡아 세부일정을 잡은 전정국은 경건하게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 번 더 절을 한 후 떨리는 심장을 겨우 붙잡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다 꿈이면 어떡하지. 그럼 진짜 죽어야지. 눈을 감았지만 잠은 오지 않는 밤이었다.
*
“형. 애들은 왜 이렇게 형을 좋아할까요?”
전정국은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고 웅얼거린다. 김태형은 무감한 낯으로 대꾸한다. 몰라.
김태형은 예전부터 유독 어린 아이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곤 했다. 그러니까 귀찮은 거 싫어하는 사람이 전정국한테도 이만큼이나 여지를 준 거겠지. 그러나 전정국이 김태형의 집에 놀러 왔는데도 아이들이 건 전화를 받아주는 건 너무한 거 아닌가. 전정국의 입술이 오리마냥 삐죽 튀어나왔다.
“질투나네.”
“뭐래.”
옛날에 전정국이랑 똑같구만. 아이들의 통화를 받아주는 다정한 김태형의 말투에 전정국은 칭얼거리는 소리를 내며 김태형의 허리춤을 끌어 안았다. 나한텐 그렇게 다정하게 말 안 해주면서...
“그래도 나처럼 귀여운 애는 없잖아요.”
“너는 징그러 임마.”
“나는 좋아한다고?”
나도 김태형 좋은데. 전정국은 능청스러운 얼굴로 김태형의 어깨에 턱을 올린 채 고개를 기울여 배시시 웃고 있었다. 뭐래. 얼굴 치워라. 애써 전정국의 얼굴을 밀어낸 김태형은 입술을 꾹 깨문다. 또 귀 빨개진 거 아니겠지? 자연스럽게 손을 올려 잔뜩 열이 오른 귀를 만져본 김태형은 한숨을 푹 내쉰다. 쟤는 왜 저렇게 잘생겨가지고...
전정국이 쉴 새 없이 징징거린 탓에 결국 휴대폰을 종료시킨 김태형은 한숨을 푹 내쉬며 전정국을 바라봤다. 너 나한테 벌 받으러 온 건 알고 있냐? 응 아는데요. 근데 왜 귀찮게 굴어. 에이 좋으면서. 나이가 먹으면서 는 게 능청밖에 없는건지 전정국은 뻔뻔히 대답하며 동그란 머리통을 김태형의 어깨에 부벼왔다. 김태형은 고개를 또 다시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진짜 귀찮은 놈이네..
“그래서 무슨 벌 주려고요?”
동그란 눈을 껌뻑이며 묻는 전정국에 김태형은 따라서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떤 벌이 제일 잔인하면서도 어린 전정국에게 주기 적절할까.를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한참동안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던 김태형이 겨우 찾아낸 답은 그거였다.
“너 내 베개가 되라!”
그래서 전정국은 순순히 김태형을 위해 자신의 단단한 허벅지를 내어주고 있었다. 그런 줄은 몰랐는데, 김태형은 생각보다 사람의 손길을 잘 타는 타입이었다. 그럼 다른 사람 손도 탔으려나. 엄한대로 튀어가는 질투심을 겨우 억누른 전정국은 자신의 허벅지 위에 놓인 김태형의 분홍색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형 근데 제가 궁금한 게 있는데요.”
전정국의 허벅지를 베고 눈을 꿈뻑거리며 영화를 보던 김태형이 응? 하고 고개를 비틀어 전정국을 올려다본다. 전정국은 그런 무방비한 김태형이 진짜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형은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어. 김태형의 부드러운 입술에 다시금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전정국은 욕망을 겨우 잠재운 채 말을 이었다.
“형은 나랑 대체 언제쯤 사귈 생각이에요?”
전정국은 뻔뻔한 애새끼에서 김태형을 좋아하는 고삐리 정도로 노선을 갈아타기로 했다. 김태형을 좋아한다고 그렇게 티를 내도 김태형이 알아먹지를 못하니까. 이렇게 대놓고 말로 표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거다.
사실 이 말을 꺼내고 전정국은 적어도 김태형한테 몇 대는 얻어 맞을 줄 알았다. 얼굴이 새빨개진 김태형이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며 등짝을 그 큰 손으로 내려칠 줄 알았는데..
“너 수능 잘 쳐서 나랑 같은 대학 오면.”
김태형은 생각보다 태연하게 실현 가능성이 있는 대답을 했다.
그 탓에 되려 얼이 빠진 사람은 전정국이었다. 네? 방금 뭐라고 했어요? 폭탄선언을 던져놓고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김태형에 전정국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전정국이 안 그래도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김태형을 바라보니 김태형은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전정국을 바라봤다. 싫으면 말던가. 전정국은 머리 위로 느낌표를 띄운 채로 고개를 몇 번이고 저었다. 아뇨! 아뇨아뇨 완전 좋아요 나 형이랑 같은 대학 갈래요.
전정국은 집에 와 김태형의 학교 수능 성적 커트라인을 보고 나서야 김태형의 대답이 완곡한 거절의 표현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아니.. 도대체 내 성적에 저 대학을 어떻게..? 심지어는 마음 속으로 김태형에 대한 존경심까지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이다. 태형이 형 공부 완전 잘하는 편이었구나.. 그와 동시에 우울함이 같이 퍼지기 시작했다. 나는 안될거야.. 나는..
안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전정국은 인터넷에 들어가 잘 가르친다는 강사의 인터넷 강의를 모두 구입하고 좋다는 문제집을 전부 장바구니에 담았다. 안되는 게 어딨어 나는 대학 가서 무조건 김태형이랑 사귈건데. 전정국의 눈동자를 가득 채웠던 우울함이 오기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
[형]
[김태형]
[반말하면 죽인다고 했다.]
[태형이 형]
[왜]
[형 이제 내 애인 해야겠네요.]
[(사진)]
김태형은 잠이 덜 깨 팅팅 부은 눈을 부빗거리며 전정국이 보낸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아니, 이게 무슨....
“전정국 이 미친놈...”
김태형은 양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으으윽...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전정국이 김태형이랑 같은 대학 오겠다고 밤낮으로 수능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건 알았다. 그건 알았는데... 아니 기껏해야 3,4등급 받던 애가 정시로 나랑 같은 학교를 올 줄은 진짜.. 진짜 몰랐지.. 김태형은 복잡한 마음으로 일단 전정국이 보낸 합격증 사진을 저장했다. 복잡한 건 복잡한 거고. 그래도 내 새끼가 좋은 대학 합격했다니 기쁜 건 기쁜거다.
[저 지금 형 집 앞인데.]
김태형은 머리를 베개에 콩콩 내려 박다 벌떡 일어났다. 집 앞이라고? 지금 시간에? 바닥에 널부러진 바지를 서둘러 챙겨 입은 김태형은 허겁지겁 걸어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 앞엔,
“태형이 형.”
바보처럼 웃고 있는 전정국이 있었다.
“너 진짜 바보지.”
내가 언제 일어날 줄 알고 그 날씨에 거기 서 있어. 응? 김태형은 전정국의 행동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전정국에게 핫팩이며 이불을 죄다 던졌다. 언제부터 서 있었던 거야.. 언뜻 닿았던 전정국의 손이 얼음장마냥 차가워 김태형은 착잡한 심정이 됐다. 전정국 때문에 진짜 미치겠네.
“애인 기다리는데 그 정도야.”
김태형은 머그컵에 우유를 따르다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이젠 뻔뻔하게 나오기로 한 거지. 전정국은 뭐가 문제냐는 듯 고개를 갸웃이더니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기가 막혀..
“나는 애기랑 안 사귀는데.”
“형, 저 올해 스무살입니다.”
“아 맞다, 너 스무살이었지.”
전정국의 옆에 앉아 따끈하게 데운 우유를 가져와 내밀며 얼빠진 표정을 하는 김태형에 전정국은 웃음을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아 귀여워. 형 원래 이렇게 귀여웠어요? 그 덕에 김태형의 귀만 남아나질 않는거다. 뭐래 진짜..
“저 이제 애기 아닌데.”
“나한테는 아직 애기...”
김태형의 말이 모두 이어지지 못한 채 끊긴다. 김태형의 커다란 눈이 몇 번 더 꿈뻑인다. 야, 전정국 너 뭐하냐. 김태형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은 없는건지, 전정국은 태연한 얼굴로 김태형의 손가락을 잡아 끌어 곳곳에 입을 맞췄다. 그 탓에 절로 얼굴로 열이 몰렸다. 아씨 지짜 전정국 미쳤나봐... 김태형이 화끈거리는 얼굴을 다른 손으로 가리자 전정국은 김태형의 손등에 입술을 지분거리며 말을 이었다.
“나랑 사귀어준다고 했잖아요.”
“아니... 인제 그게 농담이었지..”
나는 네가 진짜 우리 학교 들어올 줄 몰랐지.. 하는 김태형의 말에 전정국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였다.
“왜 자꾸 튕겨요. 형 나 좋아하면서.”
“내가? 내, 내가 언제?”
언제, 어디서. 내가. 왜, 너를. 어떻게? 열이 바짝 오른 얼굴로 김태형은 어린애마냥 빼액 말을 뱉어냈다. 그러면서도 전정국의 입술이나 진득한 시선을 피하지 못하는 자신이 모순적이라 생각했다. 근데 어떡해. 나 얘 못 밀어내겠는데..
“자꾸 그러면 나 진짜 상처 받아요.”
이렇게 잘생기고 공부 잘하고 한 명만 바라보는 연하가 어디 있다고. 입술을 비죽거리며 칭얼거리는 전정국의 모습엔 어렸을 적 태형이 형과 떨어지기 싫다며 징징거리던 어린 전정국의 모습이 남아 있었는데.. 또 금방이라도 김태형을 잡아먹을 것처럼 뜨거운 눈빛을 하고 있는 전정국을 보자니 꼭 그 아기천사 같던 전정국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덕에 김태형은 전정국의 입술이 살결에 스칠 때마다 본능적으로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그게 문제다. 전정국은 김태형의 행동은 죄다 긍정회로에 돌려버려서, 김태형의 반응이 전정국 때문에 좋아서 그러는 건 줄 안다는거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저는 좆도 잘생겼어요.”
김태형은 그 말에 결국 화들짝 놀라 몇 번이고 경박스러운 딸꾹질을 뱉어내야만 했다.
“너, 너 너너너 그런 말 어디서 배워왔어!”
얼굴이 자두색으로 물든 김태형이 전정국의 어깨를 제법 강하게 내리쳤다. 전정국은 아픈지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비죽이다가도 당황해 호들갑을 떠는 김태형의 팔뚝을 꼬옥 잡아냈다.
“그래서, 나랑 안 사귈거야?”
김태형은 눈을 깜빡인다. 저 눈은 반칙이지.. 전정국은 금방이라도 상처 받아 울 것 같은 맑은 어린아이의 눈망울을 하고 김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은 새끼. 분명 김태형이 어린 아이들에게 약하다는 걸 알고 저러는거다.
그러나 쉽게 대답을 뱉어내진 못했다. 물론 전정국이 싫다는 건 아니다. 김태형도 전정국을 좋아했다. 안 좋아했으면 여기까지 받아주지도 안핬을거다. 게다가 쟤 말마따라 잘생기고 공부도 잘 하고 몇 년 동안 나만 바라보는 전정국인데. 게다가 그, 그, 그것도 잘생겼다고 했으니까. 김태형이 거부할 이유가 없긴 했다. 그런데도 자꾸 망설여지는 이유가 있다면...
나는 쟤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봐 왔다는 거..
물론 지금은 성인이지만.. 이거 법적으로 문제가 되는 일 아닌가. 심각하게 머리를 굴리던 김태형은 전정국에게 턱이 잡히고 나서야 제 앞에서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전정국을 인지했다. 전정국은 낮게 가라앉은 새까만 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금방이라도 김태형을 잡아먹을 것 같은 눈.
“말을 해야 알지.”
대답해줘요. 형이 싫다고 하면 이제 더 안 할게요. 김태형은 침을 꼴깍 삼킨다. 전정국 얘 목소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낮았더라.. 잠시 과거를 회상하던 김태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정국도 은근히 멍청한 구석이 있다. 내가 전정국이 싫었으면 입술 가져다 붙일 때부터 죽여버렸겠지..
“사귀어..”
김태형은 눈을 질끈 감고 개미만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짜 부끄러워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랬다.
“네? 잘 안 들려요.”
근데 전정국은 진짜 못 알아 들은건지 못 알아 들은 척 해서 한 번 더 들으려고 하는건지 고개만 갸웃거리고 있는거다. 내가 진짜 전정국 너 가만 안 둘거야. 눈을 살벌하게 치켜 떠 전정국을 노려본 김태형은 전정국을 확 밀쳐 그 위로 올라탔다. 그 덕에 전정국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사귀자고 멍청아!”
빼액 소리를 지르자 전정국은 그제서야 동그란 눈을 껌뻑거리다, 꼭 예전처럼 눈꼬리를 접으며 배시시 웃었다. 제 허리춤을 파고드는 전정국의 손길에 김태형은 전정국의 멱살을 잡았다.
“너 딴 놈한테도 이러면 뒤져.”
무어라 대답하려 벌어졌던 전정국의 입술에선 대답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김태형이 쾅, 하고 입술을 들이 박은 탓이다. 형은 지금까지 키스도 안 해봤나봐. 전정국은 김태형의 이에 박아 입술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실실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비틀어 김태형의 입술을 삼켰다. 서투르면서도 익숙하게 얽히는 살덩이가 달콤하다 못해 녹아내릴 지경이었다. 김태형은 멱살을 잡았던 손을 슬그머니 놓고 전정국의 목덜미에 팔을 감았다. 애기 때부터 나만 좋다고 따라다니던 애가 키스는 어디서 배워 온 건지. 전정국의 제법 능숙한 움직임에 으응, 하고 앓는 소리를 흘리면서도 김태형은 키스가 끝난 후 전정국을 잡아 족치겠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따끈한 우유가 둘의 움직임을 따라 엎어져 이불을 축축히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