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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년을 살며 평범한 것부터 아주 이상한 것까지, 별꼴을 다 봐왔으나 좀처럼 적응되지 않는 광경이 있었다. 특히 이 즈음이 그랬다. 길 한 가운데를 차지한 커다란 트리를 지나는 태형의 어깨가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걸음의 속도를 높인다. 몇 발짝 만에 트리는 멀어졌다. 흘긋 뒤를 보자 트리 꼭대기에 매달린 십자가는 아득하게 작아져 있었다.

 

어디 소설이나 영화처럼 십자가를 본다고 해서 당장 죽을 것 같은 건 아니었다. 세상에는 뱀파이어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들이 너무 많았다. 몇 천 년 영생을 누리는 것도 아니었고, 무자비하게 인간을 살육하지도 않았다. 천 년 정도를 살면 오래 살았다고 볼 수 있었는데, 생체를 유지하기 위해 최적화된 영양을 공급받지 못해서 그랬다. 그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피였으므로. 뱀파이어들이 섭취하는 것은 대체로 '죽은' 피였다. 나름 인간세계에서 인간과 공생하기 위한 전략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태형은 지금 몹시 허기져 있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눈앞에서 붉은색이 어른거렸다. 꼭 태형을 유혹하는 것처럼. 얼른 집에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다. 태형은 다시 걸음의 속도를 높였다. 익숙한 맨션이 시야에 들어온다. 더이상 소리는 들리지 않았으나, 여전히 귓가를 맴도는 멜로디를 흥얼거렸다. 익숙하면서도 지겨운, 그럼에도 흥이 나는. 인간의 취향도 참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태형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집으로 들어오기가 무섭게 나른함이 닥쳤다. 허기와 피로 중에 태형은 후자를 택했다. 잠들었다 일어난 것은 자정이 넘어서였다. 눈을 비비며 일어나 냉장고를 열었다. 그러나 헛수고였다. 냉장고에는 딱히 쓸만한 게 없었다.

 

태형은 소파 위에 길게 널브러졌다. 경우의 수를 떠올린다. 석진의 집에 갈까? 그는 대식가 답게 냉장고에 어마어마한 양의 피를 저장해두는 편이었다. 아쉬울 때는 그의 집에 찾아가 애교를 부리곤 했다. 물론 그건 기력이 있을 때의 이야기다. 석진의 집은 여기서 꽤 거리가 있었고... 태형은 벌떡 일어났다. 머릿속에 번뜩이는 것이 있었다.

 

태형은 걸었다. 큰길을 따라 걷자 늦은 밤에도 불이 훤한 거대한 건물이 나타났다. 입구를 지나쳐 건물 뒤쪽으로 갔다. 통제구역이라는 팻말이 걸린 낡은 철문이 태형을 반겼다. 문고리를 몇 번 돌리자 기이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새까만 복도 끝에서 어슴푸레하게 빛나는 불빛을 봤다. 태형은 천천히 나아갔다. 모퉁이를 돌자 찬란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완전 대박! 한쪽 벽을 가득 채운 선반에는 붉은빛이 가득했다. 누가 갖다 놓았는지 모를 혈액팩들이 층층이 쌓여 있었다. 마치 태형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태형은 한참 서서 그 광경을 만끽했을 것이다.

 

"저기요."

 

태형이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았다. 혼자인 줄 알았던 공간에는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태형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같은 것을 노리는 아군인가? 태형은 찬찬히 남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런 것 같지는 않아보였고.. 태형은 서서히 경계태세를 풀었다.

 

"의사 선생님이에요?"

"네? 아..."

 

전정국. 태형은 흰 가운 위에 쓰인 글자를 빠르게 눈으로 읽었다. 정국이 고개를 끄덕인다. 태형은 정국과 가운이 퍽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흰 피부에 단정한 이목구비. 동그랗고 얇은 테의 안경은 화룡점정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수없이 보아온 인간들 중 정국은 손꼽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니, 제일 잘생겼나?

 

시선이 부담스러웠는지 정국이 큼큼 헛기침을 했다. 태형은 잠시 생각에 빠진다. 선택은 두 가지였다. 정국을 공격해 재빠르게 피를 훔쳐 달아나거나 정국을 적당히 회유하는 일. 물론 가져가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없다. 지금 태형은 몹시 허기져 있었으므로. 눈앞에 두고 먹지 못하고 있으니 더 그랬다. 입안이 바싹 마른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네?"

"엄마가 위독해요. 피가 없으면 곧 죽을 지도 몰라요."

 

태형이 울상을 지어 보였다. 약 백년 전 즈음 태형은 배우였다. 그때는 색이 없던 흑백의 화면들뿐이라 태형의 아름다움을 다 담지 못해 안타까웠다. 태형은 그때의 기억을 되짚는다. 그때 태형은 멋진 옷도 입어 봤고 우스꽝스러운 표정도 지어봤고 엉엉 울어도 봤다.

 

태형은 흔들리는 정국의 눈동자를 놓치지 않았다. 이때다 싶어 태형은 덥석 정국의 손을 잡았다. 정국은 손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렇게 장난을 치는 게 미안할 만큼.

 

정국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냈다. 찬장을 열자 달큰한 향이 태형의 코끝을 찔렀다. 태형은 혼미해질 것 같은 정신을 붙잡고 닥치는대로 팩을 꺼내 주머니에 담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큰 가방을 가져올 걸 그랬다. 더 담아갈 만한 게 없나 주변을 살피고 있을 때였다.

 

쿵쿵 소리가 들렸다. 멀리서 들려오는가 싶던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 왔다. 정국이 다급하게 태형을 불렀다. 야무지게 주머니를 채운 태형이 일어났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돌아섰다.

 

"전정국 선생님!"

"네?"

"나는 김태형! 알았죠?"

 

정국이 웃었다.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태형은 재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고양이가 생선 가게 앞을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고 했다. 태형은 다음 날에도 자정 즈음 집을 나섰다. 태형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병원이었다. 같은 철문 앞에 섰다. 그러나 쉽게 들어가지는 못했다. 어제의 일로 정국이 난처해졌던 것은 아닐까?

 

태형은 그 근처를 빙빙 돌았다. 뒤쪽으로 더 가자 쇠창살로 막힌 창문이 나왔다. 유심히 살펴보다 어제의 그 방으로 이어진 창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태형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기다렸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우스워질 즈음이었다.

 

불이 켜졌다. 자그마한 창문 너머로 움직이는 동그란 정수리를 봤다. 태형은 반가워서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러나 다행히 꾹 참았다. 태형은 흡 숨을 들이킨다. 눈앞이 잠시 뿌옇게 흐려졌다 밝아졌다.

 

"으악!"

 

하필이면 나타난 지점이 정국의 코앞이었다. 놀란 정국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 바람에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 한 걸 태형이 붙잡았다. 정국은 금세 균형을 되찾았다.

 

"방금 벽에서 튀어나온 거 맞죠?"

"내가? 아닌데?"

 

되려 태형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나 방금까지 정국씨 뒤에 있었어요."

 

태형이 어깨를 으쓱했다. 정국은 석연치 않은 표정이었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태형은 두꺼운 책이 펼쳐져 있던 테이블로 갔다. 책은 깨끗했다. 귀퉁이를 채운 그림만 새까맸다. 어지러운 연필선 사이로 사람의 형상이 눈에 띄었다. 사람이 맞나? 자세히 보니 자신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확인하기 위해 더 가까이 들여다보려는 찰나, 정국이 다가왔다. 얼른 책장을 덮어버렸다.

 

"보여줘요."

 

태형이 빙글 웃었다. 정국이 도리질을 했다. 게다가 힘도 만만치 않아서, 태형은 결국 포기해야만 했다. 단단히 책을 붙잡은 정국에게선 어떤 결연함마저 느껴졌다.두 사람은 그대로 대치했다. 빤히 정국만 보다 태형은 불현듯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먼저 시선을 피했다. 왜 그랬지? 태형은 당황스러웠다. 꼭 부끄러워하는 것 같잖아.

 

"진짜 항복!"

 

태형은 결국 두 손을 들었다. 그제서야 정국도 힘을 풀었다. 최대한 시선을 마주치지 않으며 태형은 찬장 앞으로 갔다.

 

"오늘도 피 필요해요?"

 

정국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주면 좋고."

 

저도 모르게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서운했다. 고작 피 때문일까봐?

 

다행히 정국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모를 작은 가방에 혈액팩을 차곡차곡 담았다. 태형은 그 우직한 뒷모습을 지켜봤다. 물론 피가 필요한 건 맞았다. 그러나 이미 모습을 들킨 인간 앞에 다시 나타나는 건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거기다 오늘은 겁도 없이 정국의 앞에서 ‘능력’을 썼다. 물론 태형이 가진 수 가지의 능력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

 

"필요하면 또 와요."

"진짜?"

"네."

 

정국이 태형의 앞에 가득 찬 주머니를 내려놓았다.

 

"얼마든지 줄 수 있어요."

 

정국의 미소에 태형의 마음은 사르르 녹아버리고 만다. 동시에 복잡해졌다. 언젠가 그런 날은 오고 말 것이다. 정국이 태형의 정체에 대해 알아버리고 마는. 태형은 그 날을 기대하면서도 오지 않기를 바랐다. 이미 멈춘 지 오래인 심장이 꼭 사람을 놀리는 것처럼 두근거리는 기분이었다.

 

 

 

 

 

 

 

 

 

 

"인간을 사랑해본 적 있어?"

"무슨 뱀파이어 풀 뜯어먹는 소리야."

 

석진에게서 한껏 귀찮음이 묻어나는 대답이 돌아왔다. 태형은 별말 없이 파우치의 입구만 쭉 빨아들였다. 달큰한 피맛이 입 안에서 퍼졌다.

 

"인간은 믿을 게 못 되는 거 알잖아."

"..."

"또 당해봐야 정신 차릴래?"

 

태형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 것도 남지 않은 파우치만 쪽쪽 빨았다. 사실 할 말이 없었다. 석진이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언제였더라? 이제는 기억도 옅어진 아주 오래 전이다.

 

태형은 한 인간을 만났다. 사랑. 사랑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느낌도, 지금 생각해봐도 그랬다. 태형은 그에게 뱀파이어라는 것을 밝혔다. 그 라면 온전히 태형 그 자체로도 사랑해줄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러나 그는 태형을 두꺼운 유리 벽장에 가뒀다. 많은 사람들이 박제된 뱀파이어를 구경하기 위해 찾아왔다. 얼마든지 깨부수고 나갈 수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그는 매일 태형을 지켜보러 왔다. 때때로 아주 슬픈 얼굴로.

 

그 유리벽을 부수고 태형을 구해준 것은 석진이었다. 먼 발치에서 교수형이 집행되는 모습을 바라보다 그 도시를 떠났다. 그렇게 돌고 돌아 이 작은 땅으로 왔다.

 

"또 믿고 싶어지면 어떡해?"

"그것도 병이다."

"..."

"어쩔 수 없지."

"..."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또 구하러 가줄 테니까."

 

석진이 거만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태형은 보란 듯이 얼굴을 구겼다. 석진은 쏘아보면서도 냉장고에서 혈액팩 하나를 꺼내 태형의 앞으로 던졌다. 태형은 미동도 없었다. 대신 멀리 창밖을 보며 넋을 놓았다. 뉘엿뉘엿 넘어가던 해는 어느새 저편으로 사라졌다. 사방에 새까맣게 어둠이 깔렸다. 태형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정국이 보고 싶었다. 그 생각 하나만으로 왔는데 정작 태형은 병원에 와서 길을 잃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작은 창문 너머로 불은 켜지지 않았다.

 

태형은 창문이 가장 잘 보이는 화단에 웅크리고 앉았다. 가지런히 모은 두 무릎 위로 얼굴을 묻었다.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꼭 울음이 날 것만 같았다.

 

언제부턴가 태형은 우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울어야 할 이유를 몰랐기 때문이다. 울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며칠을 울어도, 태형이 그토록 사랑했던 인간들은 살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이 했던 것처럼 태형은 물에도 뛰어들어 보고 독약도 먹어 봤으나, 삶은 계속됐다. 멈추지 않는 챗바퀴처럼 끊임없이 흘러갔다. 쉼 없이 바퀴를 굴리며 태형은 모든 것에 무뎌져갔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해요?"

 

머리 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형이 벌떡 일어났다. 눈앞에는 정국이 있었다. 정국은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하얀 가운 대신 사복을 입었다. 어쨌든 태형은 와락 정국을 안았다. 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오래 기다렸어요?"

 

태형은 대답 대신 정국을 더 끌어당겨 안았다. 정국도 말없이 태형의 등을 토닥였다. 그렇게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태형은 정국을 놓아주었다. 정국은 걷기 시작했다. 태형이 그 뒤를 따랐다.

 

정국은 병원에서부터 조금 떨어진, 낡은 아파트로 걸어 들어갔다. 문이 열리고, 태형은 온 몸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정국의 우주. 그 안으로 태형은 성큼 뛰어 들어갔다. 정국이 씻는 동안 정국의 옷을 입고 정국의 침대에 걸터앉아 우두커니 정국의 방 안을 살폈다. 방에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사진을 좋아하는 지 꽤 값이 나가 보이는 카메라 하나와 커다란 모니터 두 대. 태형의 시선은 책상 한 켠에 놓인 선인장 화분에 머물렀다.

 

"선인장 좋아해요?"

 

막 씻고 나온 정국에게서 화한 열기가 퍼졌다. 태형은 고개를 끄덕였다.

 

"늘 같은 모습이잖아. 오늘 보고, 내일 보고, 다음 주에 또 봐도. 어쩌면 몇 년 후에도."

"형이랑 닮았어요."

 

선인장만 바라보던 태형의 시선이 물끄러미 정국을 봤다.

 

"늘 그 자리에서 기다려줄 것 같은 사람."

 

우주 속에서 부유하던 태형은 비행을 멈춘다. 붙박이별을 찾았다. 그것은 어느 곳에서 어떻게 봐도 반짝거렸다. 왜 이제야 알았을까. 태형은 생각한다. 진작 찾았을지도 모르는데. 정국을 처음 만났던 그 때.

 

"어떻게 알아? 우리가 얼마나 봤다고."

 

태형은 괜히 쑥스러워져 퉁명스런 체를 한다.

 

"그냥. 다 알아요."

 

정국이 웃었다. 태형은 한껏 벅차오른 기분으로 벌렁 침대 위로 누웠다. 포근한 이불과 함께 정국의 향기 속에 파묻혔다. 온 몸이 나른하게 녹는다. 태형은 눈을 감았다. 오랜만에 길고 깊은 잠에 빠져들 수 있을 것 같았다.

 

 

 

 

 

 

 

 

 

 

태형은 더 이상 병원에 가지 않았다. 정국이 매일 일정량의 혈액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에 굳이갈 이유가 없었다. 위험하다며 정국이 가는 것을 만류하기도 했다. 태형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매일 같이 혈액을 훔치러 가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으므로 태형도 동의했다.

 

두 사람은 거의 시간을 함께 보냈다. 태형이 주로 정국의 집에 머물렀다. 원래 태형은 일이 없었고-정국에게는 프리랜서라고 이야기해놨다- 정국은 잠시 병원을 쉬게 되었다고 했다.

 

정국은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태형은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불안해지곤 했다. 두 사람은 백사장 위에 서 있었다. 얼기설기 모래로 지어진 성 위에 발을 디뎠다. 멀리 내려다보이는 수면은 잔잔했다. 그러나 커다란 파도가 밀려오면 성은 떠내려가고 말 것이다. 흔적도 없이. 태형이 뱀파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정국은 떠나가게 될까?

 

"안 좋은 꿈 꿨어요?"

 

태형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암막 커튼 사이로 햇살이 비쳤다. 일어난 것은 한낮이었다. 어제만 해도 늦은 새벽까지 정국과 놀다 잠이 들었다.

 

"모르겠어. 기억이 안나."

 

태형은 대충 얼버무렸다. 잊어버리기로 한다. 꼬물꼬물 정국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정국이 팔을 뻗자 냉큼 그 팔을 베고 몸을 더 가까이 붙였다.

 

다시 눈을 뜬 것은 밤이 다 되어서였다. 언제 그랬는지는 몰라도, 정국이 다시 꽁꽁 닫아놓은 커튼 때문에 빛이 들지 않아 시간이 흐른 줄도 몰랐다. 일어나자마자 습관처럼 냉장고를 뒤적인다. 그러나 의미 없는 일이었다.

 

정국과 태형은 나갈 채비를 했다. 마트까지는 적당히 걸을만한 거리였다. 정국과 태형은 저녁 산책을 즐겼다. 때때로 자정에 가까운 늦은 밤일 때도 있었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거리는 밤이 되면 한산해졌다. 태형은 정국과 걷는 것이 좋았다. 함께 걸으면 정국과 나란히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같은 속도로. 정국은 길게 늘어진 정국의 그림자에 걸음을 맞춘다.

 

그때였다. 머리 위에서 번쩍 섬광이 터졌다. 두 사람은 멈추어 섰다. 위를 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다. 동그랗고 밝은 달과 머리 위로 드리운 거대한 가로수 뿐이다. 불어오는 밤바람이 사각사각 을씨년스런 소리를 내며 나뭇잎을 흔들었다. 태형의 온몸에 촉각이 곤두섰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꼈다.

 

"드디어 나타나셨네."

 

수풀 사이에서 남자가 풀쩍 아래로 뛰어내렸다. 꽤 높은 거리였지만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남자의 은회색 머리카락이 가볍게 흩날렸다 차분히 가라앉았다.

 

남자는 흥미롭다는 듯 정국과 태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보며 정국은 얼굴이 굳었다.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건 태형 뿐인 듯 했다.

 

"정국아."

 

남자는 태형을 잘 아는 것처럼 불렀다.

 

"어디 갔나 했더니, 여기 있었어?"

"..."

"갈 때 가더라도 할 일은 하고 가야지."

 

남자가 휘익 무언가를 던졌다. 태형이 재빨리 먼저 손을 뻗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것을 낚아챘다.

 

"아악!"

 

그러나 태형은 곧바로 손을 떼며 물러났다. 손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손가락 하나 만한 작은 유리병은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산산조각이 났다. 바닥에 흩어진 액체에선 역한 냄새가 났다. 태형은 속에서부터 울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성수聖水다.

 

"물러나!"

 

정국이 다급하게 외쳤다. 태형은 한 발짝 더 멀어졌다. 두 사람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서 있었으나, 누구도 먼저 다가가지는 않았다. 정국이 허리를 숙여 바닥에 떨어져있던 묵주를 주워 들었다. 묵주는 정국의 손목에 채워졌다. 태형은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정국의 시선이 다시 태형을 향했을 때까지. 태형은 달빛을 받고 선 정국의 얼굴이 조금 슬퍼보인다고 느꼈다.

 

"너, 헌터였어?"

"..."

"병원이랑 전부, 날 잡기 위한 덫이었어?"

"..."

"전정국, 빨리 말해!"

"...처음엔 그랬지만, 이제는 아니에요."

 

그러나 태형이 보고 있던 것은 자신이었다. 태형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정국이 멀어져간다. 정국은 태형을 잡지 않았다.

 

"기다릴게요."

 

태형이 풀쩍 하늘로 뛰어 올랐다. 빨간 지붕 위에 서자 정국이 점처럼 작아졌다. 그럼에도 정국의 시선을 느낀다. 정국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태형은 달빛을 등지고 가볍게 날았다. 그래도 알고 있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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