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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해요.

사혹

 

 

 

 

 

 

  붉게 노을이 지더니 하늘에 곧 밤이 스몄다. 정국이 카페 창가 자리에 않아서는 뚫어져라 창 밖을 쳐다봤다. 가로등 반짝이는 고요한 거리에 한 송이, 한 송이 흰 눈꽃이 내리기 시작했다. 끝이 좋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정국아, 내일 뭐 할 거야."

 

  "내일요?"

 

 

  정국이 놀란 토끼 눈을 하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래, 내일. 태형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크리스마스잖아."

 

  "어…내일 다른 약속 있는데."

 

  "…그, 래?"

 

  "네…형, 미안해요."

 

 

  정국이 미간을 찌푸리곤 책상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대는 태형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아니, 괜찮아. 태형이 어색한 미소를 띠며 손을 빼냈다. 삐쳐도 단단히 삐친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게 이번 크리스마스는 둘이 일명 '애인 사이'가 되어 맞이하는 첫 번째 크리스마스니. 투투부터, 오십 일, 백일까지 기념일 챙기기 좋아하는 태형은 한참 전부터 설레 하고 나름의 계획도 세우며 들떠했을 게 뻔했다. 나 방금 완전 점수 깎였겠지? 정국이 머리를 긁적였다. 태형은 따듯한 카페라테를 찔끔찔끔 마시고 있었다. 눈 한 번 안 마주치고.

 

 

  "형."

 

  "…왜."

 

  "진짜 미안해요."

 

  "……."

 

  "근데 이거 너무 중요한 약속이고, 전부터 잡아놨던 거라."

 

 

  궁색한 핑계를 늘어놓고 보니 왜인지 태형 몰래 나쁜 짓이라도 꾸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정국은 눈을 도르르 한 바퀴 굴렸다. 대형은 여전히 꼼짝도 않고 커피만 홀짝거렸다. 창문에 비친 태형이 속상해 보였다. 이를 어쩐다. 태형을 위해 준비한 일이 되려 태형을 속상하게 해버렸으니. 정국이 핸드폰 케이스를 뺐다 끼웠다 했다. 생각이 복잡하면 종종 나오는 행동이었다.

 

 

  "됐어. 이제 슬슬 일어나자."

 

 

  태형이 손등으로 입 주변을 훑고는 일어났다. 끼익 하며 의자가 밀리는 소리가 거슬렸다. 태형이 두툼한 겉옷을 꼬물거리며 걸칠 동안 정국이 후다닥 빈 잔을 카운터에 가져다주고는 태형의 눈치는 살폈다.

 

 

  "왜 그렇게 눈치를 봐."

 

  "……."

 

  "진짜 괜찮다니까."

 

  "…형…."

 

  "피곤할 덴데, 들어가."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린 태형이 손짓했다. 어서 들어가, 자. 형…. 정국이 태형의 손을 잡고는 꼼지락거렸다. 길게 뻗은 손가락을 위아래로 천천히 쓸다가 한 번 꽈악 잡아보기도 하고. 태형이 손을 쓱 빼낼 때까지 꼬물거리던 정국이 그 후로도 한참을 옆에서 어깨를 움츠리고 있다가 짧게 발을 뗐다. 그마저도 계속 뒤를 돌아보며. 밤 어둠 속에 홀로 빛을 내는 가로등을 지나 정국의 모습이 밤에 스며들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서 있던 태형이 꽁꽁 언 손에 호오, 따듯한 입김 한 번 불어넣고는 그제야 저도 집으로 향했다.

 

 

 

 

 

 

*

 

 

 

 

 

 

  파티션 너머의 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정국이 눈을 잔뜩 휘고 토끼 같은 이가 다 보이게 웃은, 태형이 제일 좋아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태형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니 정국은 한 발짝 물러났다. 곧 정국이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 말했다. '좋아해요, 형.' 태형도 말했다. '나도.' 그리고 눈을 감았다가 뜨니 정국도, 파티션도 온데간데없었다. 꿈이었다. 팔을 쭉 뻗어 휘저어 보고 나서야 침대 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단말마의 소리를 내고 침대 옆 선반 위의 디지털 시계를 보았다. 어둑어둑해 숫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오전 다섯 시, 십오 분? 이렇게 일찍…. 추워서 깼나 보다. 정국이 없는 크리스마스가 아직 한참 남았다. 태형이 폭신한 솜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몸을 둥글게 말았다. 이대로 푹 자서 저녁쯤에나 일어나면 좋을 텐데.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하더니 곧 졸음이 물밀 듯 밀려왔다.

 

 

  - 띵동, 띵동. 띵동, 띵동.

 

 

  태형이 다시 일어난 건 2시쯤이었다. 누군가 정신 사납게 초인종을 계속 누르는 탓에 꾸물거리며 이불 안에 있던 태형이 잔뜩 인상을 쓰고를 일어났다. 현관문 외시경으로 바깥을 보니, 박지민? 예상치 못한 이가 와있었다.

 

 

  "박지민!"

 

 

  문을 열며 반가움에 달려들자 지민이 기겁을 하며 한 발짝 물러났다.

 

 

  "어제 저녁에 올라왔어. 우리 집이 전정국 바로 옆 동이잖아. 전정국 만났는데 내일 자기 대신 너랑 놀아달라더라. 걘 왜 크리스마스에 거길 간다냐? 미리 해둘 것이지."

 

 

  투덜대면서도 양손 가득 케이크며 먹을거리를 잔뜩 가져온 지민이었다. 케이크는 나중에 전정국 오면 같이 먹고, 이건 지금 먹고. 직접 냉장고 안에 넣어주면서 지민이 중얼거렸다.

 

 

  "정국이가 어딜 갔는데?"

 

  "너한테 말 안 했어?"

 

  "어."

 

  "그럼 나도 안 말할래."

 

 

  쪼잔한 새끼. 태형이 지민을 팔꿈치로 쿡 찔렀다.

 

 

  "자, 빨리 날 전정국이라 생각하고 하고 싶은 거 말해봐."

 

  "넌 못생겨서 감정이 안 잡혀."

 

  "이게…넌 예쁜 줄 아냐?"

 

  "정국이가 예쁘댔거든."

 

 "아이고, 내가 무슨 부귀를 누리려고 여기까지 왔냐."

 

 

  지민이 곡소리를 내며 가슴께를 쳤다. 행동들이 과장된 게 이제 진짜 연극배우구나, 싶었다. 지민과는 몇 년 전 마지막으로 만나고 이번이 처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나면 정국이랑, 나랑, 너랑 셋이서 같이 살자! 같은 말도 많이 했는데 지민은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연극배우가 될 거라며 훌쩍 떠났다. 여러 군데 돌아다니다가 유명한 연극 배우가 되면 돌아오겠다는 쪽지 하나만 손에 쥐여주고 떠났다. 그런 지민이 돌아오다니. 그것도 크리스마스에. 돌아와서 기뻐, 라는 낯간지러운 말 대신 태형은 괜히 투덜거렸다. 이런 날에 정국이만 있으면 딱 좋을 텐데.

 

 

  "난 너 가수할 줄 알았는데. 갑자기 연극 배우 하겠다 할 줄은 몰랐지. 넌 노래하는 거 좋아했으니까."

 

  "가수 하려고 했었지. 근데 갑자기 연극이 하고 싶어서. 내가 또 하고 싶은 건 못 참잖냐."

 

  "그래서 정국이가 어딜 갔는데?"

 

  "안 알려줄 거라고, 문디 자슥아. 서프라이즈 선물이라도 준비하려나 보다, 해."

 

 

  지민이 의뭉스레 씩 웃었다. 뭔가 재미있는 일을 꾸밀 때면 나오는 장난스러운 웃음이었다. 태형이 아직 개지 않은 이불을 돌돌 말고 베란다에 나갔다. 곧 눈이 내릴 듯 하늘이 희끄무레했다. 몽실몽실한 구름이 바람에 실려 몽글몽글 움직였다. 정국이가 눈 올 때 오면 좋을 텐데.

 

 

  - ♬♪♩♪

 

 

  "김태형, 너 전화 온다."

 

 

  지민이 베란다에 있는 태형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으음, 받기 귀찮다는 듯 어깨를 힘없이 늘어트리고 고개를 갸웃하니 지민이 전정국 전환데, 했다. 태형이 눈을 크게 뜨고는 우당탕거리며 거실로 들어왔다. 이불은 이미 던진 지 오래고, 베란다 문은 이불에 걸려 덜 닫혔다. 전정국 전환데, 전정국 전환데…. 지민의 말이 메아리처럼 귓가에 맴돌았다. 핸드폰 화면을 보니 지민의 말마따나 '정국' 두 글자가 반짝였다.

 

 

  "정국아."

 

  - 아, 형. 저 일이 생각보다 빨리 끝나서요.

 

  "응."

 

  - 곧 도착할 거 같아요. …광장에서 볼래요? 광장 트리 밑에서.

 

 

  한참 전화를 받고 있을 때 지민이 입모양으로 '뭐래?'했다.

 

 

  "그래, 그때 봐."

 

 

  전화를 끊고 태형이 대답했다. 만나재. 지민이 다시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이제 김태형 좋아죽겠네."

 

 

  지민이 배꼽을 잡고 낄낄거렸다.

 

 

 

 

 

 

*

 

 

 

 

 

 

  저녁의 광장은 복잡했다. 캐럴 노래가 거리를 가득 채웠고, 크리스마스를 즐기려 나온 사람들이 시야를 가렸다. 태형이 인파에 밀려 크리스마스트리 바로 밑까지 도착했다. 영화에서 봤던 거대 로봇 정도 크기의 트리에 갖가지 장식품이 달려 반짝였다. 정국이는 어디있으려나. 태형이 두리번거렸다.

 

 

  "형!"

 

 

  뒤꿈치까지 들고 두리번거리는데 정국이 잔뜩 신이 나서는 태형을 불렀다. 정국의 목소리에 반가워 뒤를 돌아보니 정국이 헤실헤실 웃었다. 밖에 오랫동안 나와 있었는지 귀와 코가 빨갰다.

 

 

  "정국아."

 

  "오래 기다렸어요?"

 

  "방금 왔어."

 

  "혹시…지민이 형이 저 오늘 어디 갔는지 말했어요?"

 

  "아니."

 

  "아, 그래요? 사실 말해도 상관없기는 한데, 제가 형 놀라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정국이 말을 맺고는 겉옷 주머니를 뒤적였다. 곧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상자를 건넸다. 이게 뭔데? 물으니 정국이 빨개진 코를 목도리에 묻으며 머쓱하게 웃었다. 형이 열어봐요. 그 말에 태형이 끼고 있던 벙어리장갑을 벗고 상자를 열었다. 뻑뻑한지 잘 안 열리는 상자 뚜껑이 어느 순간 확 열려 떨어트릴 뻔한 걸 겨우 잡아내니 그 안에 있는 건 다름 아닌 반지였다. 새하얀, 은색 반지.

 

 

  "이게 뭐야."

 

  "그거 제가 만든 거에요. 원래 어제까지 다 만들었어야 했는데. 어제 다 못해서…."

 

  "그럼 오늘 이거 만들러 간 거야?"

 

  "네."

 

 

  코가 찡해졌다. 얇은 반지에 새겨진 문구가 예뻤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해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태형이 훌쩍이자 정국이 제 왼손을 태형에게 자랑스럽게 보였다. 저도 꼈어요. 이거 우리 커플 반지야. 예쁘죠.

 

 

  "응, 너무 예쁘다."

 

 

  어느새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평생 살며 보낸 크리스마스 다 잊힐 정도로 행복한 날이었다고, 태형은 그날 내내 길거리에서 소리를 질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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