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버킷리스트

 

단편인 만큼 빠른 전개가 있습니다. 이 부분 양해 바라며…

W. 런볼 (@_B_X_V)

 

 

 

#201x년 8월의 초

 

 

술렁이는 공간이 답답했다. 관중이 멋대로 만든 물결에 강제로 휩쓸려 손 쓸 수도 없이 이리저리 떠밀려지는 감각을 그대로 느낄 당사자는 오죽할까 싶었지만 슬쩍 본 그 당사자의 안색은 평소와 별 다를 게 없었다. 그리고 다 나아가나 싶던 얼굴의 상처가 또다시 더욱 찢어지고 뜯겨져 밴드와 연고로 엉성하게 치료된 상태였다. 여느 때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태연하게 자리에 앉는 당사자를 향해 여러 시선이 동시다발적으로 꽂혔다. 그중엔 정국의 몫도 있었다. 하지만 다른 시선들과는 달리 관심이 덜 담겼고 건조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수근거림. ‘쟤 얼굴 좀 봐, 또 엉망이네.’ ‘싸움하고 다닌다더니 사실인가봐.’ 저들 딴에서는 들리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뱉는 귓속말이었겠지만 글쎄, 별 소용없었다. 최소한 정국은 그렇게 생각했다. 당사자보다 그들과 더 먼 거리에 있는 자신에게도 똑똑히 들렸으니 당사자가 못 들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스운 정의감과 연민에 그들에게 쓴소리할 생각은 없었다. 그저 그들의 당사자를 향한 예상이 틀렸다는 걸 확신할 뿐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전반적으로 날카로운 이목구비가 단순한 ‘싸움꾼’으로 보이는 듯 했지만 엉망인 얼굴과는 달리 책상 위에 올려진 그의 손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정말로 얼굴이 그 지경으로 됐을 정도의 싸움이 있었다면 폭력을 휘두른 이의 손에 역시 그 흔적이 있어야 할 텐데 그의 손은 깨끗했다, 이 말이다. 관중의 추리는 틀렸다. 그는 싸움이 아닌 ‘일방적인 폭행’을 당했던 걸 것이다. 본인을 따라다니는 소문은 스스로가 가장 잘 알 것이다. 본인이 굳이 해명하고 다니지도 않는 걸 자신이 오지랖 부릴 이유가 없다고 정국은 결론을 내렸다. 애초에 그가 부탁했어도 들어줬을 지 의문인 게 사실이었다. 같은 학교 같은 반. 이 이상의 접점 따위 그와 정국의 사이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팔자가 병신인데 남 신경 써 줄 여유 같은 게 있을 리가. 이게 정국의 상황이었다. 고아새끼가 양아치 감싸 도는 꼴 보이는 것 만한 볼거리가 없을 거라고 정국은 확신했다. 자존심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신과 같은 모자란 형태의 인생에서 가장 쓸모없는 그것은 버린 지 오래였다. 그렇다고 해서 타인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일을 자처하고 싶지 않다는 게 정국의 생각이었다. 그렇게 관심과 무심의 경계에서 정국은 그를 바라봤다.

 

 

 

어느 날은 칠판만을 응시하던 그가 고개를 틀어 정국과 눈을 마주했다. 무의식적으로 샤프를 농락하던 정국의 손가락이 멈췄다. 대신 그의 동공이 잘게 떨며 그 움직임을 대신 했는데 이는 자신과 맞춰오는 그의 눈이 생각했던 것보다 맑아 저도 모르게 놀란 탓이 컸다. 내가 너무 빤히 쳐다보고 있었나. 한쪽의 일방적인 시선이었다면 서로의 눈이 마주치진 않았을 터였다. 언제부턴가 정국은 수업시간마다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무료한 수업도 수업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양아치로 오인되어 따가운 시선을 받는 그가 사실은 일방적인 피해자일 거란 걸 눈치 챈 순간부터 생겨난 취미라고 하기엔 무의식적인 버릇 정도였다. 정국의 실감과는 상관없이 현실은 터무니없이 짧은 찰나였다. 이내 그가 다시 고개를 원상태로 돌리고 나서야 정국은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실상을 눈치 채버렸기 때문일까 여전히 상처가 가득한 그 얼굴이 불행한 사고를 당한 가여운 새 마냥 보이게 된 건 무(無) 그 자체였던 정국의 세계의 작은 변화였다. 아직도 놀라 잘게 뛰는 고동을 애써 다듬은 정국도 칠판을 바라봤다.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억누르고자 하는 의도 반 그리고 그가 바라보는 대상을 저 역시 눈에 담고 싶은 의도 반이었다. 정국은 이런 자신의 변화를 굳이 인정하려들지 않았다. 알아채려는 정성조차 들이지 않았다. 그 정체가 무엇이든 어떤 형태든 정국에겐 독, 그 이상도 이하도 되지 못할 게 뻔했다. 그러니 그를 보지 않고 그가 보는 것을 보려는 걸지도 모른다. 피사체만큼 주체를 나타내는 건 없다. 그리고 머지않아 정국은 알게 되었다.

 

그 피사체가 정국, 자신이었다는 것을.

 

 

 

버킷리스트

 

 

#201x년 8월의 말

 

 

정국은 평소보다 멀리 떨어져 있는 편의점으로 향했다. 어렵지 않게 담배를 살 수 있었던 집 바로 옆의 편의점에서 구매를 거절당한 게 그 이유였다. 집이라고 해봤자 흔히들 청소년 쉼터 정도로 불리는 기관이었지만 어쨌든 보금자리인 셈이다. 더 이상 멀리까지 향하고 싶지 않았던 정국이 귀찮은 일 없이 손쉽게 뚫리길 바라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하던 대로 태연하게 즐겨 피는 담배이름을 말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열리려던 정국의 입이 다시 꾹 닫혔다. 편의점 알바생의 얼굴이 낯이 익다 못해 마주치는 것이 어쩐지 곤란한 인물이었다. 그 장본인은 정국과는 달리 퍽 건조한 기색이었다. 유니폼 가슴팍에 달린 이름표에 정갈하게 ‘김태형’ 석자로 파여 존재를 드러냈다. 같은 반 익숙한 놈을 만나 반가워하는 것도, 각자의 볼일을 보는 것도 하지 않은 채 멀뚱히 있던 둘 사이에서 먼저 입을 연 건 태형 쪽이었다.

 

“뭐 피는데?”

“마쎄 스카이블루.”

 

덤덤히 묻는 태형에 얼떨결에 대답한 정국이 상황에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바코드 찍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재촉이라도 하는 것만 같아 꼬깃한 지폐 몇 장을 건넸다. 거스름과 함께 담뱃갑이 정국의 손에 쥐어지기까지 오랜 시간 걸리지 않았다. 영문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쁠 건 없으니 됐다 생각한 정국이 나가려 할 때 다시 한번 태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잠깐 기다려. 곧 끝나니까.”

“왜?”

“담배 팔아줬잖아.”

 

그제야 정국은 의문이 풀렸는지 묘하게 흔들렸던 표정을 고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기다리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담배를 순순히 살 수 있도록 해준 이유는 알게 됐으니 보다 홀가분해진 듯 했다. 가시지 않은 더위를 태운 습한 바람이 방해되어 라이터를 손으로 감싸 담배에 불을 붙인 정국이 세 개비를 다 태워갈 때쯤 유니폼 대신 사복차림의 태형이 검은 비닐을 들고 나왔다.

 

“먹을래? 폐기 직전이긴 하지만.”

“별로.”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음에도 둘은 자연스럽게 편의점에 딸린 테이블에 앉았다. 태형은 삼각김밥을, 정국은 네번째 개비를 꺼내 입에 물었다. 아마 참기름인 듯한 고소한 냄새와 지독한 담배냄새가 조화를 이뤄 묘한 향이 만들어졌다. 부탁이 있어. 태형의 목소리까지 가미되어 정국을 자극했다. 예고도 하지 않은 뜬금없는 내용이었기에 더욱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버킷리스트 이루는 걸 도와줬으면 해.”

“무슨?”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걸 생각해봤거든.”

“죽기라도 하게?”

 

응. 한음절의 대답을 끝으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말한 태형도 들은 정국도 큰 감정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정국은 스스로도 놀랐다. 놀랍다 못해 충격적이라 할 수 있는 걸 들었음에도 의문이라든가 부가적인 설명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국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자신이 태형의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단순한 추측이지만 태형에겐 남일이 아닌 사실일 추측. 상처가 끊이질 않는 얼굴에 비해 싸움의 흔적이 없는 손. 그다지 빈약한 체형이 아님에도 그가 일방적으로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건 한가지 가설에 이르게끔 방향을 보여준다.

 

“가정이 개판인가봐?”

“아버지가 개새끼긴 하지.”

 

빨아들인 담배연기를 깊게 내뱉었다. 더럽게 엉킨 실타래 같은 연기가 공중에서 사라지기를 기다리듯 말을 아끼던 정국이 입을 열었다.

 

“왜 하필 난데?”

“궁금해?”

“고아새끼라 만만하기라도 했어?”

“내내 나 쳐다보길래. 나에게 꽤 호의적인 것 같아서.”

 

정국은 대답대신 담뱃불을 짓이겨 껐다. 그 모습을 보며 태형이 작게 웃었다. 부정은 안 하네. 정국이 어깨를 으쓱였다. 멋대로 생각하든가. 정국의 대답을 수락으로 받아들인 태형이 입안의 내용물을 삼키고는 말을 이었다.

 

“말만 거창하지 별 거 아니야. 개수도 몇 안 되고.”

“돈 드는 건 아니겠지? 하루하루 먹고 살기도 바쁜 몸이라.”

“죽을 작정인 놈이 알바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 용의주도함으로 살아가는 건 어때?”

“죽을 각오로 하라는 말이 왜 있겠어.”

 

그게 진짜 저 세상 가라는 말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정국은 말을 아꼈다. 말해봤자 소용없을 게 뻔했다. 솔직히 그 전에 굳이 말려야 할 명분과 의리 따위 자신과 태형 사이에 존재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게 가장 큰 이유였다. 최근 이유 모르게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쨌건 남은 남. 그런 태형이 정국에게 먼저 다가온 것도 자신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도 모자라 과정을 도와달라는 게 그 의도이니 말릴 이유는 최소한 지금의 정국에겐 존재하지 않았다.

 

“네 버킷리스트 라는 게 뭔데?”

“그건 내일 학교에서 알려줄게.”

“왜?”

“한번에 진도 너무 나가면 부끄러우니까?”

 

꽤 장난스러운 말에 정국이 악의 없는 조소를 지었다. 김태형이 이렇게 장난도 치는 위인일 줄은 몰랐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고아 새끼랑 양아치 새끼 둘이 같이 다니는 것만큼 남 보여줄 구경거리는 없을 것 같은데.”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눈도장 찍는 셈이라 치지 뭐.”

 

 

 

버킷리스트

 

 

#201x년 8월의 말의 다음날

 

 

“좋은 아침.”

 

언제나처럼 책상 위에 엎드려 있던 정국에게 말을 건네는 목소리는 ‘언제나’와는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그리고 예고된 것이기도 했다. 팔 틈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과 함께 책상의 인위적인 나무 무늬를 보던 정국이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어.”

 

적당히 응대하며 몸을 일으킨 정국이 주위를 힐끗 바라보니 예상한 대로였다. 정국과 태형의 관계에 흥미를 느낀 듯 교실의 시선 중 대부분이 둘에게로 향했다. 그것도 참 노골적이게. 바로 옆에 서있는 태형에게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로 정국이 중얼거렸다.

 

“완전히 원숭이 보듯 보고 있네.”

“글쎄, 굳이 따지면 넌 원숭이보단 토끼 쪽이라고 생각하는데.”

“뭐라는 거야.”

 

알 수 없는 말에 정국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든 것에 비해 태형은 제 입술을 네모지게 만들며 웃어보이고는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가방을 내려놓고는 의자에 앉는 것 대신 다시 정국에게로 돌아오고는 앞자리에 앉아 뒤돌아 정국을 바라봤다. 그 큰 눈이 저를 향하자 어쩐지 부담스레 느껴진 정국이었다.

 

“뭘 그렇게 봐.”

“그냥.”

“그보다 슬슬 네 버킷리스트라는 거 알려줄 때 됐지 않냐.”

 

정국의 재촉에 태형이 의자를 정국 쪽으로 당겨 더 가까이 하고는 바지주머니에서 두세 번 접힌 종이를 꺼내 건넸다. 정국이 종이를 펼치자 삐뚤삐뚤한 글씨가 다섯줄 정도 적혀있었다. 정국이 태형을 보자 태형이 턱을 살짝 까딱였다. 읽어달라는 의미였다.

 

「버킷리스트

   하나. 친구 사귀기

   두울. 불꽃놀이 하기

   세엣. 찜질방 가기

   네엣. 생일파티 하기

   다섯. 네개 다하고 죽기」

 

둘, 셋, 넷은 왜 늘려 쓴 거지. 하나랑 다섯과 맞춰 쓰고 싶었던 걸까. 사소한 게 궁금했지만 본 목적은 그게 아니니 묻는 건 생략하기로 한 정국의 시선이 다섯번째 항목에서 멈췄다. 죽기 전 하고 싶은 일을 적는 버킷리스트의 마지막이 죽는 일이라니. 어지간히 죽고 싶은 걸까. 덤덤히 생각하던 정국이 핸드폰을 꺼내 종이를 찍고는 종이와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종이도 가져갈 거면 사진은 왜 찍은 거야?”

“워낙 물건을 잘 흘리고 다녀서.”

 

사실 생각날 때마다 봐두려는 게 이유였지만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오지랖스러운 발상이 괜히 부끄러운 정국이었다. 태형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구나. 뭐, 대충 이런 의미였다.

 

“것보다 친구 사귀기는 못 도와줄 것 같은데. 보다시피 나도 사람들과는 연이 없어서.”

“그건 이미 이뤘는데? 너 있잖아.”

“나 하나?”

“인간관계라는 건 말이야, 넓이보단 깊이란다.”

“그 인간관계 부족해서 버킷리스트에 넣은 놈한테 듣고 싶지 않은데.”

“원래 실전이 약해도 이론 정도는 빠삭한 법이야.”

 

묘하게 설득력 있다는 생각도 잠시, 헛기침함으로써 그 생각을 환기시킨 정국이 태형에게 물었다.

 

“너 생일 언제냐?”

“12월 30일.”

“그럼 네 버킷리스트 천천히 이뤄도 되겠네.”

“상관은 없지만, 왜?”

“곧 시험이잖아. 이래배도 성적에 목숨 거는 편이라.”

 

정국의 말에 태형의 입술 틈으로 불만이 흘러나왔다. 뭐야, 그럼 나랑 못 놀아준다는 거잖아. 정국이 작게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유도 모르는 채 신경이 쓰여 훔쳐보듯 관찰만 하던 놈과 절대 평범치 못한 상황 속에서 평범히 대화를 할 줄은 생각치도 못했는데. 그 끝은 절대 평범하지 못하겠지만. 이까지 생각을 마친 정국이 태형을 바라봤다. 저를 보며 그 큰 눈을 빛내는 얼굴이 도무지 죽을 생각에 의욕이 가득한 사람으로 보기 힘들었다. 정국이 둥근 눈알을 굴려 주위를 살피고는 태형에게 바짝 다가가 낮게 속삭였다.

 

“그렇게 죽고 싶어?”

“뭐야, 갑자기.”

 

새삼스럽게 왜 그런 질문을 하냐는 듯 헛웃음을 뱉은 태형이 잠시 고민하는 듯 뜸을 들이다 이내 정국처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응, 죽고 싶어. 정국이 또 물었다. 왜? 왜 죽고 싶은데? 으음, 글쎄.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던 태형이 이내 정국과 가까이 했던 얼굴을 치우고는 멀어졌다. 그 덕분에 정국의 한 눈에 들어온 태형의 표정은 아까처럼 그 입술을 네모지게 하고는 큰 눈을 가늘게 접은, 활짝 핀 웃음이었다.

 

“잊어버렸어.”

“뭐?”

“그냥 어느 순간 깨닫고 보니 죽고 싶던데?”

“뭐야 그게.”

 

정국의 떨떠름한 대답에 태형은 다시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이번만큼은 태형을 따라 웃지 못한 정국이었다.

 

 

 

버킷리스트

 

 

#201x년 9월 5.PM

 

 

도서관에 마주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제 앞에 펼쳐진 교과서와 필기가 되어 있는 공책에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는 정국과 그의 필통을 괜히 뒤적거릴 뿐 꺼내지지도 않고 깨끗한 책상을 보여주는 태형이 그 둘이었다. 태형의 존재는 더 이상 새로운 것보단 익숙함에 가까웠다. 그리고 공부 대신 자신에게나 그 집중과 관심을 달라며 투정부리는 태형에게 익숙해지기도 했다는 소리다.

 

“이젠 한계야. 그 망할 책 좀 덮어줄래? 슬슬 나랑 놀아줄 때 됐잖아.”

“안 돼.”

“성실하게 살기는.”

“누구처럼 죽을 요령은 없어서 말이야.”

 

말하는 와중에도 정국의 시선이 자신 대신 교과서와 공책으로 향해있자 태형도 포기했는지 한숨 한번 푹 쉬고는 턱을 괴고 정국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곧 중간고사가 다가오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며칠째 이 상황이 반복됐다. 요상했던 첫 만남 이후 둘은 사이가 꽤나 가까워졌다. 태형의 부탁으로 인한 강제성만이 그 이유는 아니었다. 정국은 살고자, 태형은 죽고자 하는 것만 제외한다면 둘은 잘 맞는 축에 속했다. 그런 덕분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는 했는데 그중 정국은 대학등록금 따위 낼 돈도 없으며 성적특례로 기숙사에 들어가려면 학업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부모는커녕 친척 하나도 없는 몸이라 한 푼이라도 지원받을 수 있는 곳이 없다며 이도저도 아닌 알바를 할 시간에 차라리 공부를 해서 후에 경제적인 능력을 얻는 게 효율적이라는 게 정국의 생각이었다. 그 말에 태형 역시 전적으로 공감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과 긴 시간을 보내주지 않는 정국이 밉살스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당장도 그러했다. 어쩜 이렇게 눈길 하나 안 줄 수가 있는지 평소의 그 동그란 눈이 집중하느라 지그시 반쯤 감긴 채 오로지 아래만을 향해 있는 모습이 미웠다. 친구를 사귀는 것. 오직 이 하나의 버킷리스트만 이룬 상태에서 진전이 없으니 조급하기보단 몸이 근질거렸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의 태형은 버킷리스트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몸이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정국을 이해해줄 수 없는 노릇도 아니니 놀자며 가끔 떼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중간고사 끝나기만 해봐. 잔뜩 귀찮게 할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태형은 괴고 있던 손을 떼고는 아예 책상에 엎드린 후 눈을 감았다. 정국의 시선이 태형에게로 향한 건 그 직후였다. 잘 생각인지 제풀에 못 이겨 엎드린 태형의 오른 볼이 볼록 튀어나왔다. 이내 정국은 다시 고개를 내려 하던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미 그었던 밑줄을 또 긋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계속해서 읽어보는 와중에 얼마가지 않아 작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들려와 정국은 결국 제 입꼬리를 말아 올리고는 펜을 내려놓고 책을 덮었다. 그러고는 아까의 태형처럼 턱을 괴어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긴 속눈썹이 얌전히 내려앉은 채로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는 태형을 한참동안 바라보던 정국이 제 주머니를 더듬거리더니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그때 찍어둔 버킷리스트 목록 사진을 확인한 정국이 다시 핸드폰을 들여놓으며 태형을 깨웠다.

 

“야, 일어나.”

“으음, 왜. 공부 더 해.”

“아깐 그렇게 방해하더니. 나가자.”

 

으으, 방금 막 잠들었는데. 태형이 꿍얼거리며 몸을 일으킬 때 정국은 이미 가방까지 다 싼 상태였다. 졸음에 살짝 감긴 눈으로 시간을 확인한 태형의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전날보다 이른 시간이었다. 근데 얜 왜 이렇게 보채? 태형이 물으려 하기 전에 정국의 목소리가 더 빨랐다.

 

“집 가기 전에 잠깐 공원 좀 들리자.”

“왜?”

“불꽃놀이 하게.”

 

 

#201x년 9월 7.PM

 

 

“이게 뭐가 불꽃놀이야.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라고. 심지어 아직 해도 안 졌잖아.”

“이런 도시에서 불꽃놀이 했다간 신고 당할 걸? 그리고 여기서 더 늦으면 아버지 퇴근시간이랑 겹치잖아.”

“쓸데없이 현실적이고 배려심 넘치기는.”

 

할 말 없어졌지만 기분이 좋아지진 않았는지 태형의 입술이 삐쭉 나왔다. 정국이 말한 불꽃놀이가 퍽 마음에 안든 모양이었다. 정국은 그런 태형을 타박하지 않았다. 솔직히 볼품없는 건 사실이었다. 폭죽이라고 해봤자 화려한 불꽃이 터지는 게 아닌 단순히 파지직거리는 가느다란 막대기가 전부였다. 흔히‘스파클라’라고 불리는 것 말이다. 여름은 지났지만 아직 다 가진 않은 9월의 오후 7시 언저리는 불꽃놀이를 하기엔 확실히 밝았다. 하지만 정국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특히 둘이 있는 공원 근처엔 주택이라든가 빌라, 이런저런 사람이 사는 곳이 모여 있기 때문에 더욱이 폭죽이라든가 함부로 했다간 신고 당할 게 뻔했다. 사실 그 이전에 같은 센터에서 사는 아는 동생이 어디서 났는지 우연찮게 정국에게 남은 불꽃놀이 물건을 건네줬을 뿐이지만 말이다. 자, 여기. 정국이 하나를 태형에게 건넸지만 태형은 받지도 않은 채 입술을 더욱 삐쭉거렸다. 그런 태형을 가만히 보던 정국이 이내 제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고는 가는 막대기 끝에 불을 붙였다. 요란하게 타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밝은 노란 빛 불꽃이 잘게 튀는 것을 정국이 다시 건넸고 이번엔 태형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냈다. 그 모습에 작게 웃은 정국이 제 몫에도 불을 지피고는 타들어가는 막대 끝을 가만히 바라봤다. 근처엔 정국과 태형 말고는 어떤 이도 없었으나 혹 누가 봤다면 둘의 모습을 무신경하게 지나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자라진 않았으나 거의 클대로 큰 남고생 둘이서 멀뚱히 서서 가느다란 스파클라가 불꽃을 내며 타는 걸 구경하고 있는 상황 따위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이내 태형이 막대기를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경로에 따라 빛이 움직여 허공에 그림이 그려졌다. 단순한 동그라미 하나, 세모 하나, 세모 두개를 더해 별 하나, 하트 하나. 이에 재미가 붙었는지 태형의 표정이 아까보다 풀어진 게 보였다. 별 다를 것 없이 스파클라를 휘적이며 의미불명의 그림을 그리던 정국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런 것도 나름 나쁘지 않지?”

 

물음이 던져오자 태형의 동공이 정국에게로 향했다.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태형이 다시 시선을 스파클라로 돌리고는 뾰로통한 어투로 말했다.

 

“그래도 인정 못해. 다음엔 진짜 제대로 된 불꽃놀이 하자.”

 

다음엔. 다음. 정국은 태형의 말에 즉각 대답하지 못했다. 당장을 즐기고 있느라 잊은 건지 오히려 정국이 태형의 ‘다음엔’이라는 말에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 다음에.”

 

나에게 너의 다음이 존재한다면, 그 날에.

 

 

 

버킷리스트

 

 

#201x년 10월 하교시간

 

 

빨간 볼펜으로 마지막 동그라미를 치는 것으로 정국은 채점을 마쳤다. 뭐, 공부한 정도는 나온 것 같네.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점수를 시험지 위에 찍찍 적은 정국이 고개를 돌려 태형을 바라봤다. 채점하며 틀린 점수에 안타까워하고 간간히 찍은 게 맞았다며 기뻐하는 이들 사이에서 태형만이 제 책상 위에 엎드려 팔에 고개를 박고 있을 뿐이었다. 여러 장의 시험지를 모아 책상 위에 가볍게 툭툭 쳐 정리한 정국이 몸을 일으켜 태형에게로 향했다. 자고 있는지 규칙적인 숨소리가 쌕쌕 들려왔다. 동그란 태형의 어깨 위로 정국의 손이 올려지더니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했다.

 

“김태형 일어나.”

 

우응, 앓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부비적거리던 태형이 부스스 일어났다. 보이는 정국에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던 태형이 잠긴 목소리를 느긋하게 냈다.

 

“잘 봤어?”

“그럭저럭. 너는 뭐 안 물어봐도―”

 

무의식적으로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태형의 시험지를 본 정국의 말이 끊기고 대신 그 눈이 크게 뜨여졌다. 예상한 것과는 달리 점수가 바닥을 기기는커녕 정국 자신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멍청해 보이는 애들이 사실은 천재라는 게 사실일까 싶던 그때.

 

“아, 그거 빼야 할 점수야.”

“그럼 그렇지.”

 

헛웃음 치는 정국과는 달리 해맑게도 웃던 태형이 이내 제 가방을 챙기며 정국을 보챘다. 그도 그럴게 한동안 정국이 시험공부 해야 한다며 그렇게 놀아주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오늘을 기다리고 기다렸다고. 남 공부하는 걸 구경하는 것만큼 재미없고 시시한 건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다니까. 실실 웃는 낯짝과 투덜거리는 목소리가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렸다. 태형의 보챔에 보답하듯 정국 역시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는 남은 한 팔을 태형의 어깨에 둘렀다. 어느샌가 익숙해진 신체접촉이었다.

 

“그래, 수고했네. 어디 가고 싶은 곳 있냐?”

“당연하지. 그전에 너 오늘 외박 할 수 있어?”

“나야 상관없지만, 어디서 자게?”

“찜질방 가자!”

 

그제야 정국은 꽤 오랜만에 태형의 버킷리스트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있었지. 세 번째 항목, 찜질방 가기. 하기야 이제 시험도 끝났겠다, 완전한 가을도 됐겠다, 슬슬 태형과 만났던 본 목적을 위해야 할 시기였다. 정국의 이 생각이 끝날 때쯤 둘은 어느새 교문을 향해 운동장을 나아가고 있었다.

 

“미자들은 찜질방에서 못 자.”

“다 이 형아가 조사해왔지. 뚫리는 곳 있대.”

“어디서 주워 들은 거야?”

“우리반 양아치 나부랭이들이 말하는 걸 조금 엿들었지, 뭐.”

 

맨날 엎드려 있나 싶었는데 귀도 참 밝네. 웃던 것도 잠시, 또다시 문제가 생겼다. 우리 지금 교복 입고 있잖아. 정국의 말에 태형이 뭐가 문제냐는 듯 말했다.

 

“너 후드집업 있잖아. 목 끝까지 잠가 올려.”

“오.”

“이거이거 헛똑똑이네 전정구기.”

 

입을 네모지게 웃으며 말하는 태형의 코를 살짝 꼬집으며 정국이 대꾸했다. 넌 그냥 멍청이 그 자체잖아. 그 말에 태형의 눈이 날카롭게 뜨여졌지만 입술은 꾹 다문 채였다. 원래였다면 당장 반박했겠지만 아까 슬쩍 정국의 채점 점수를 봐버렸기 때문에 불가능이었다. 여느 때처럼 삐쭉 내밀어진 태형의 입술 위에 정국의 손이 올려졌다.

 

“또 입 내밀지, 또.”

 

태형이 그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꾹 눌러지는 힘 따라 입술을 쑥 넣고 나서야 정국의 손이 떨어졌다. 태형은 허전해진 입가를 괜히 씰룩였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음에도 아직까지 머물고 있는 정국의 온도가 얼굴 전체와 목까지 전도되었는지 태형의 피부가 붉어졌다.

 

“가자.”

“…길도 모르면서.”

“어서 안내해, 태비게이션.”

 

 

#201x년 10월 이른 저녁

 

 

“성인 둘, 숙박이요.”

 

태형이 태연하게 카운터를 상대하는 동안 옆에서 정국은 잔뜩 긴장한 내색을 숨기느라 바빴다. 담배 피는 청소년은 우습게도 그 외의 일탈엔 경험이 없는 순수한 인물이었다. 카운터의 중년 여성은 둘을 무신경한 눈빛으로 훑어보고는 찜질복과 수건 몇 개, 그리고 고무팔찌 같이 생긴 키를 챙겨 내밀었다. 팔천원씩 해서 만육천원. 뻣뻣이 굳어 있던 정국이 겨우 움직여 제 지갑을 꺼내려 할 땐 이미 태형이 결제를 마친 상태였다. 정국이 멀뚱거리고 있자니 태형이 정국의 몫의 찜질복과 수건을 건넸다.

 

“뭐해?”

“좀 이따가 돈 줄게.”

“됐거든.”

 

장난스럽게 정국의 가슴팍을 툭 친 태형이 빨리 들어가자며 정국을 재촉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훅 끼쳐오는 습기와 함께 적나라한 알몸들이 둘의 시야에 가득 담겼다. 이내 둘은 제 키번호에 맞는 수납함을 찾아 나섰다. 나란히 91, 92번을 받은 둘이 수납함을 찾고는 옷을 하나 둘 벗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태형만 벗기 시작했다. 태형이 그런 정국을 눈치 챈 건 윗도리는 이미 다 벗고 바지버클을 벗던 참이었다.

 

“왜 안 벗어?”

“어, 그, 바로 씻을 거야?”

“찜질하고 내일 씻어야지.”

“아.”

 

그럼에도 정국의 손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태형이 그런 정국을 눈치 챈 건 바지를 벗고 찜질복 윗도리에 머리를 집어넣은 후였다. 아직도 입고 온 차림 그대로인 정국을 바라보는 태형의 눈빛이 이상한 놈 보는 것 그 자체였다.

 

“너 뭐하냐?”

“어?”

“설마 부끄러워서 못 벗겠어?”

“아니?”

“아니면 왜 안 갈아입고 발끈하는 건데?”

“…벗으면 될 거 아니야, 벗으면.”

 

그제야 정국이 제 옷을 하나 둘 벗기 시작하자 태형이 개구지게 웃었다. 정국이 상의 전부를 탈의할 때쯤엔 태형은 이미 찜질복을 완벽히 갖추어 입은 후였다. 눈을 반짝이며 정국을 보던 태형의 입이 떡 벌어졌다.

 

“너 헬스 해?”

“돈 없어서 급식비도 못내는데 하겠냐?”

“근데 무슨 몸이, 와 진짜 말이 안 나오네.”

“보지마, 변태새끼야.”

 

치, 보면 닳기라도 해? 태형이 입술을 삐죽 내미는 동안 빠르게 남은 옷을 갈아입은 정국이 간단히 지폐 몇 개와 핸드폰을 빼고 남은 짐을 수납장 안에 넣은 후 열쇠로 단단히 잠갔다.

 

“찜질방 어디로 가야 돼?”

“위층. 계단 저기 있다.”

“가면 밥부터 먹자, 배고파.”

“너 개명하는 거 어때? 김태형 돼지, 김태지로.”

“아무리 곧 죽는다고 해도 절대 불리고 싶지 않은 이름인 걸.”

“내가 그런 소리 하지 말라고 했지.”

“내가 틀린 말 했나, 뭐.”

 

태형의 투덜거리는 말투에도 정국의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질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정국은 이런 뉘앙스의 태형의 말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이런 뉘앙스란 죽을 날 머지않은 노인이 할 법한 말들을 말한다. 노인만 아닐 뿐 예정대로라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정국은 그 사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이란 게 이래서 무섭다는 걸까. 하지만 그 ‘정’의 이름이 ‘우정’이라는 단순한 건 아니라고 정국은 생각했다. 어딘가가 좀 더 복잡한 부분이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렇다면 대체 뭘까. 정국은 그저 미운 정이라고 판단했다. 그것 말고는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아무튼 밥부터 먹자. 배고파.”

“뭐 먹을래?”

“찜질방 하면 미역국이지.”

“누가 그래?”

“인터넷.”

 

별걸 다 찾아봤네.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찜질방에 도착한 둘은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메뉴판을 보던 정국이 태형의 말대로 미역국을 먹겠다고 하자 태형은 김치찌개를 먹겠다며 지갑을 들고 일어섰다. 진짜 뭐하는 놈이지. 태형이 주문과 계산을 마치고 돌아와 앉을 때까지 정국의 얼굴 위 황당한 기색은 가시지 않았다. 그런 정국을 가만히 보던 태형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그러게 좀 신중히 고르지 그랬어.”

“죽인다, 진짜.”

 

 

#201x년 10월 저녁

 

 

배를 채운 둘은 이내 자리를 잡은 후 향토방으로 향했다. 미성년자인지 아닌지 확인도 잘 안하는 이유가 있다면 아마 손님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탓일 거라고 정국은 생각했다. 그도 그럴게 밖에도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향토방엔 아예 정국과 태형 둘뿐이었으니까 말이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뜨거운 안쪽에 눕는 태형과는 달리 정국은 최대한 문 쪽에 앉았다.

 

“야아, 일로와. 왜 거기 있어?”

“더운 거 싫어.”

“그럼 찜질방에 온 이유가 없잖아.”

“니가 오고 싶어 했으니까.”

“이왕 맞춰줄 거 더 성의껏 해줘.”

 

마지못해 일어난 정국이 딱딱 목베개―나무로 만들어진―를 챙겨 태형의 옆으로 가 누웠다. 그제야 만족했는지 히히 소리 내어 웃은 태형이 정국 쪽으로 바짝 다가갔다. 붙지 마, 가뜩이나 더워 죽겠는데. 나랑 같이 죽을래? 싫거든. 매정하긴. 이후 정적이 흘렀다. 뜨겁고 습한 공기가 폐를 짓눌러 숨이 막히기도 했으나 그 때문인지는 모르게 어쩐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올 수가 없었다. 팔뚝에, 허벅지에, 눌린 종아리에 닿은 태형의 살결과 목가로 불어오는 태형의 숨결이 그 이유였다. 들숨과 날숨 사이가 불규칙한 걸 보아하니 태형은 자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리고 닿은 몸은 떨어지지도 더 붙지도 않았다. 한참동안 바뀌지 않는 상황에, 습기에 무거워진 공기에 정국의 눈꺼풀이 가라앉으려던 그때, 태형의 입술이 열렸다.

 

“전정국.”

“응.”

“나 하고 싶은 거 더 생겼는데 도와줄 수 있어?”

“버킷리스트?”

“응.”

 

정국이 천장을 향해 있던 몸을 돌려 태형과 마주 누웠다. 처음부터 신이 난 상태로 더운 곳에 있었던 탓인지 태형의 얼굴에 붉은기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자니 정국의 몸 역시 더욱 더위를 타기 시작했다. 아니, 사실 묘하게 달랐다. 밖의 온도 탓이 아니었다. 속에서부터 열이 올라 천천히 침식당하고 있었다.

 

“뭔데?”

“너 키스 해봤어?”

“하고 싶어?”

 

정국의 물음에 태형의 양 입술이 다물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유심히 보지 않는 이상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잘게 떨리는 태형의 속눈썹을 가만히 보던 정국이 말했다.

 

“눈감아.”

 

태형의 눈이 크게 뜨여진 것도 잠시, 이내 눈가에 주름이 질만큼 눈꺼풀을 꽉 닫았다. 눈을 감아도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 정도는 느낄 수 있다. 태형이 그랬다. 점점 다가오는 듯한 느낌에 괜히 입술을 움찔거리던 그때 태형의 땀에 살짝 젖은 앞머리가 걷어지더니 이마에 따뜻하고 말캉한 것이 닿았다 떨어졌다. 태형이 실눈을 뜬 건 정국에게서 작은 웃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였다. 정국의 광대가 볼록 올라가 있었다.

 

“우리 양치 안 했잖아.”

“아.”

 

태형이 바보 같은 소리를 내자 정국의 입꼬리가 더욱 말려 올라갔다. 이내 태형의 앞머리를 다시 내려 정돈해준 정국이 이번엔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려 제 쪽으로 조심스럽게 끌어당겼다. 그 소심한 행동에도 태형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상태였다.

 

“이 닦고 제대로 해줄게.”

“…지금 바로 닦으러 가자.”

“나쁠 거 없지.”

 

 

 

버킷리스트

 

 

그날 이후 둘은 자주 입술을 맞댔다. 가끔은 혀를 넣어 깊게 서로를 느꼈다. 거의 먼저 조르는 건 태형이었고 하다가 더 흥분하는 건 정국이었다. 가끔은 너무 밀어붙여 숨이 막힌 태형이 정국의 어깨를 때리기도 했다. 그때마다 벌겋게 익은 얼굴로 헥헥거리는 태형을 보는 걸 정국은 가장 좋아했다. 어느 날은 그런 정국에게 태형이 변태 같다며 질타 아닌 질타를 했지만 정국은 그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저 정국은 태형의 여러 모습을 보길 원했다. 특히 자신에 의해 나타나는 태형의 표정을 제 눈에 가득 담길 원했다. 함께 찜질방에 간 그날로부터 두 달 하고도 십 여일의 기간은 서로에 대한 애정을 키우기엔 너무 길었고 정리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정국은 일단 마음을 이어나가기로 결심했다. 태형은 빨리 떠나겠지만 자신은 계속해서 남을 것이다. 지겹도록 긴 남은 시간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잊을 수 있지 않을까. 확신 대신 안일함만 가득한 대책 없는 행동이었다. 그러는 동안 태형은 ‘죽음’에 가까워질수록 이에 대한 언급의 빈도가 줄어들었다. 더 이상 자신의 죽음을 농담의 주제로 사용하지도 않았고 이용해서 정국을 떠보지도 않았다. 정국은 태형의 변화에 불안과 희망을 동시에 걸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죽음에 진지하게 임하겠다는 건지 아니면 그것과 멀어지고 싶어진 건지 정국은 알 길이 없었다. 그렇게 가을은 겨울이 되고 숫자는 더해지고 더해져 30이 되었다. 12월 30일. D-day 태형의 버킷리스트 그 마지막 항목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재료의 날이 되었다.

 

 

#201x년 12월 30일. D-day

 

 

떨리는 숨을 입김과 함께 내뱉고는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나 그때 공원인데 지금 나올 수 있어? 응. 밖에 눈 오니까 따뜻하게 입어. 괜히 덤벙대다가 다치지 말고 천천히 와. 응. 기다릴게. 이내 끊긴 전화에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넣은 후 손에 들고 있던 짐을 벤치 위에 올려두고는 그 옆에 앉은 정국이 살짝 웃으며 중얼거렸다.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생인이데, 어떠냐?”

 

우습다며 비웃을 수 있지만 정국은 진심이었다. 태형의 생일은 축복과 동시에 절망의 날이었다. 태형의 존재가 시작된 날임과 동시에 그 끝을 알리는 날이기도 했다. 자신의 호흡에 맞춰 공중에 흩날리는 입김을 멍하니 보는 정국의 몸에 눈꽃이 조금씩 쌓여갈 때쯤 멀리서 보이는 모습에 정국이 벌떡 일어나 팔을 벌리자 희미하게 웃음소리가 들리더니 그 주인이 호다닥 뛰어와 정국에게 폭 안겼다. 안은 정국도, 안긴 태형도 순간만큼은 밝은 얼굴로 서로를 반겼다.

 

“많이 기다렸지.”

“별로.”

“너 어깨에 눈 쌓였거든?”

“눈한테 질투해?”

“뭐라는 거야 진짜.”

 

정국의 농담에 태형이 해맑게 웃었다. 정국 역시 웃었다. 정국의 머리에 쌓인 눈을 살살 털어주던 태형의 눈에 벤치에 올려진 정국의 짐이 담겼다. 이를 눈치 챈 정국이 제 품에서 태형을 살짝 떼어낸 후 짐을 들어 흔들었다.

 

“생일선물.”

“무슨 돈이 있다고?”

“없어서 고생했어.”

 

태형이 기뻐하며 손을 뻗자 정국이 곧바로 등 뒤로 숨겼다. 내가 직접 꺼내줄 거야. 그게 뭐야, 치사해. 태형이 삐쭉 내민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정국이 작게 웃고는 가지고 온 긴 쇼핑백에서 케이크를 꺼냈다.

 

“네가 좋아하는 딸기 케이크.”

“사랑해, 정국아.”

“이럴 때만 말이지.”

 

 상자 윗부분의 투명한 부분으로 케이크를 들여다보며 신나하는 태형을 보는 정국의 표정이 쇼핑백 속 남은 선물들을 만지작거리며 점점 어두워져갔다. 부르는 목소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태형아.”

“응.”

“아직 선물 더 남았는데.”

“뭔데?”

 

잠시 주저하던 정국이 남은 선물들을 꺼내 건넸다. 일순 밝은 표정으로 받던 태형의 얼굴이 굳고 행동이 멈췄다. 정국의 손에 들려진 건 다음 해의 달력과 다이어리였다. 그리고 맨 위에 올려진 편지봉투 하나까지. 분의 단위는 아니어도 꽤 긴 시간이 흘러도 태형은 받을 생각을 안했다. 그저 물끄러미 정국이 내민 그것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기에 먼저 입을 뗀 건 정국이었다. 여전히 내리는 눈꽃이 하필 속눈썹 위로 내려앉았는지 눈꺼풀이 잘게 떨렸다.

 

“생각해봤어. 너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날, 대체 뭘 줄까. 뭘 주고 싶은가.”

“…….”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역시 이것밖에 없더라.”

“…….”

“너에게 내일을 주고, 너의 내일을 받고 싶어.”

 

태형의 눈이 정국에게로 향했다. 정국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태형의 눈이 다시 정국이 들고 있는 선물로 향했다. 이내 손을 내밀어 받아냈다. 조그마한 미소와 함께였다.

 

“고마워.”

 

잘 쓸게. 정국이 원했던 이 말은 들을 수 없었다. 정국의 눈이 더욱 서글프게 휘어졌다. 하지만 태형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케이크 지금 먹고 싶어.”

“…여기서?”

“응, 빨리 초 꽂아줘.”

 

태형이 재촉하며 내민 케이크를 되돌려 받은 정국이 이내 벤치를 테이블 삼아 케이크를 꺼내고 그 위에 초를 꽂았다. 긴 촛불 하나와 짧은 촛불 여러 개. 이내 촛불과 함께 담겨 있던 성냥을 꺼내 불을 붙여 촛불로 옮겼다. 시린 겨울바람에 정국의 눈가가 시려웠다. 불을 다 붙인 후 태형에게 내밀자 또다시 요구가 들어왔다.

 

“노래 불러줘.”

“싫어.”

“아, 왜.”

 

메어오는 목을 들키고 싶지 않은 정국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태형은 계속해서 정국을 재촉했다. 정국은 하는 수 없다는 듯 헛기침 몇 번 하여 목을 풀고는 입술을 뗐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김태형- 생일 축하합니다- 태형의 박수를 스스로에게 보내며 말했다.

 

“이제 소원 빌면 되는 거지?”

“응, 촛불 불면서.”

 

이내 태형이 은은하게 웃으며 눈을 감고는 후우- 초를 껐다. 그리고 두 손을 모았다.

 

“정국이와 매일의 내일을 함께 살아가게 해주세요.”

 

순간 정국은 케이크를 떨어뜨릴 뻔했다. 잘못 들었나 싶어 귀라도 파고 싶었지만 손이 모자라 그러질 못했다. 대신 태형을 바라봤다. 태형은 활짝 웃고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내일 없는 오늘을 살고 있지 않는 사람처럼. 그제야 정국은 믿을 수 있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걸. 똑똑히 제대로 들었지만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는 걸. 또다시 목이 잠기려 들었다. 애써 가다듬고 목소리를 냈지만 그마저도 볼품없이 떨렸다.

 

“소원을 소리 내서 말하면 어떡해. 신이 안 이뤄주신단 말이야.”

“그럼 네가 대신 이뤄주면 되겠네.”

 

눈이 보다 펑펑 내리기 했다. 눈뿐만이 아니었다. 아마 눈이 많이 내리는 건 정국 탓일 것이다. 정국의 눈에서 흐르는 따뜻한 눈물에 녹을까 겁이난 하늘이 보다 더 굵은 눈꽃을 많이 뿌리는 게 분명했다. 그만큼 정국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태형이 정국의 손에 들린 케이크와 선물을 벤치 위에 두고는 정국을 꽉 끌어안았다. 이 추운 날 정국이 기다릴까 급하게 나오느라 목도리를 잊어 적나라한 태형의 목에 이내 뜨거운 온도가 닿았다. 태형은 더욱 힘주어 정국을 끌어안았고 이에 보답하듯 정국이 태형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가빠진 숨을 몰아쉬며 어깨를 들썩이는 정국의 귓가에 태형이 부드럽고 따뜻하게 속삭였다.

 

“살려줘서 고마워.”

 

태형이 이내 정국을 제 품에서 떨어뜨렸다. 내리는 눈만큼 하얗던 정국의 얼굴이 울음으로 인해 붉은 기로 얼룩덜룩해졌다. 태형이 제 겉옷 소매로 눈물을 닦아주고는 어느새 차가워진 손으로 정국의 볼을 감쌌다.

 

“많이 좋아해, 정국아.”

 

한 사람의, 한 생명의 탄생만큼 축복인 날은 없다. 하지만 그날의 주인공들은, 우리들은 그날의 일을 기억하지 못한다. 태형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국과 만난 그날은 태형의 인생의 구원의 날이었으며 존재를 의심하다 못해 부정했던 신에게서 받은 유일한 축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정국과 만난 이후 모든 나날이 태형의 생일이었다. 하루하루 늘어가는 촛불 수에 가끔은 가슴 아팠던 날도 있었지만 모두 정국을 너무나 마음 한구석에 품어버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케이크가 구멍투성이가 될 때까지 태형이 행복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고, 당신들이 모르는 둘의 과정을 전부 지켜본 필자는 자부할 수 있다.

 

태형은 살았다. 정국의 도움으로 호흡을 이어가고 박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정국은 삶 같은 삶을, 삶보다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상처가 깊은 자와 가진 게 없는 자일지라도 보듬어주고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서로가 있기에 둘은 행복할 것이다. 죽으려는 이유 하나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이를 당연시 여겼던 태형이 이제와 죽음에 겁을 먹게 된 것은 지키고 싶은 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본인 하나 챙기기 바빴던 정국이 누군가를 위해 눈물을 흘리게 된 것도 지키고 싶은 자가 생겼기 때문이다.

 

서로를 지키고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를 아끼며

서로를 살리는

 

전정국과 김태형은

 

오늘 새로운 생일을 맞이했다.

 

 

해피버스데이.

 

 

#FOREVER

© 2023 by FEEDs & GRIDs. Proudly created with Wix.com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