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뷔 합작]발렌타인의 기적
by. 백설 ( @KV_BAKESEOL )
*주제 ‘발렌타인데이’로 참가합니다. (딱히 언급되지 않음 주의)
*제 취향이 다소 스며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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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Ver. 1 태형
부스럭-
“아…병문안 선물이었나, 이거.”
꽤나 좋아하던 초콜릿이였다고 생각한다. 뭐, 이제는 보기만 해도 거북해서 토기가 올라오지만. 태형이 제 손에 집히는 빨리 낫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이 적힌 노란 포스트잇이 붙은 초콜릿을 손등으로 밀어내 시야 밖으로 내보냈다. 하나 밖에 없는 친구였다 믿었는데, 이렇게 먹을 것 몇 가지를 보내고는 연락을 두절했다. 더 이상 보고 있으면 눈물이 흐를 까봐. 더 울면 탈수 온다고 안 된다고 했는데.
“일어났어? 몸은 좀 어때?”
“아…. 그냥. 뭐. 똑같아, 어제도, 오늘도.”
“괜찮다는 말로 들을게.”
말 해 봤자잖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들을 거면서. 아, 들켰나? 헤. 웃지 마. 왜, 뭐 왜.
아이 마냥 장난스럽게 웃는 정국을 보던 태형이 제 옆에 달린 창문의, 하얀색 커튼을 걷고 창가로 몸을 틀었다. 병원 앞,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아이들이 축구를 하며 뛰어다니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부럽다, 고 중얼거린 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태형이 조용히 투명한 유리창에 이마를 기댔다. 앞머리가 눌려서 꽤나 우스운 모양새가 되었지만, 딱히 그렇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
아마 5중 충돌이라고 했다. 대형 트럭의 바퀴가 펑크가 나서 멈추게 됐는데, 뒤에 있던 음주 운전 차량이 박고, 그걸 본 다음 차가 급정차했는데 뒤에 있던 차는 아무것도 모르고 쌩쌩 달리다 그걸 보고 급정차하다 미끄러져 박고, 그 뒤에 있던 차도…음주 운전 차라서 박았다고.
그렇게 다섯 대의 차가 파손이 되었고, 그 앞 신호등에서 건너던 태형에게 차의 잔재가 날아가 부딪혔단다. 참 어이없는 교통사고에서, 어이없게 사고를 당한 격이었다. 그렇게 정신을 잃었고, 알코올 냄새가 가득히 풍기는 병원에서, 눈을 떴다.
떴더니, 어떻게 됐더라? 병명이…
하체 마비.
차의 잔재, 그러니까 앞 범퍼가 날아가 그대로 하체에 박혔는데, 하필이면 신경에 날카로운 모서리가 박혀서 그렇게 됐다고.
그렇게 평생을 휠체어에 의지하며 살아가야만 하게 됐다고, 미안하다고. 의사의 말이었다. 아, 대신 병원비의 반을 깎아주겠다고 했나? 고아니까, 가족이 없으니까. 참 웃긴 말이었다.
깎아 줘 봤자 당장 1500만원을 어떻게 낸다고. 당신 말대로 나는 고안데. 살아가기도 빠듯한 갓 스물인데. 이제 막 취업에 성공한, 그런 20댄데.
저기요.
하체를 잃었어요. 두 다리를, 평생 못 쓴다고요. 그런데, 1500만원이 끝인가요?
제가 당한 고통과, 앞으로 살아가면서 받을 고통의 크기는 고작 1500만원인 건가요?
살려주신 건 고맙지만, 제 하체를 잃은 후의 보상은 없는 건가요. 저는 이제 평생 못 걷고, 못 뛰는데요.
태형의 질문에 의사는 잠깐의 정적 끝에 사고를 낸 사람들에게 말 해보겠다고, 푹 쉬라는 말과 함께 흰 가운을 펄럭이며 도망가듯 병실을 나갔다. 아니지, 도망갔다. 태형의 눈에 아롱아롱 매달린 눈물 속, 슬픔에 찔렸겠지. 투명한 창문 틀 구석에 놓인 작은 선인장을 바라보던 태형의 눈에 어렴풋 독기가 서렸다가도, 다시 풀어졌다.
따지자면 내 생명의 은인인데, 뭘 그렇게 겁먹어요. 하하…정말 자세히 따지면 저는 이상한 질문을 한 민폐 환자인데.
그 후로는 밤낮으로 돈에 대해 걱정했다. 취직한 지 2달도 안 된 신입인 제게 1500만원이란 큰돈이 있을 리 만무했다. 물론 그렇게 큰돈을 선뜻 빌려줄 친구조차 없었으니 앞길이 막막했다. 차라리 죽었다면, 죽어버렸다면 더 편했을 텐데.
그저 죽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잘 오지 않는 병원 로비에 구석에 배치되어 있는 소파에 앉아 손목을 그어 보기도 하고, 하얀 1인용 병실에서 몰래 수면제를 먹고 죽으려고도 했었다.
결과적으로 죽지는 못했지만.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장실에서 손목을 긋던 날, 정국을 만났다.
“저기요. 한참 전에 들어갔으면서 왜 안 나와요. 변비세요?”
“… ….”
“저기요? 안에 문 고장 나서 못 나오시는 거예요? 아니죠? 자나? 저기요! 흠. 저 들어갑니다!”
밝은 목소리에 맞게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에 핏물로 물든 환자 복 소매를 말아 쥐고 휠체어를 벗어나 벽에 기대 미끄러지듯 앉아 있던 태형이 거의 닫히려던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에 비치 검은 정장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남자에 방금 전 까지 죽으려 했던 주제에 우습게도 호기심이 들어 조금 더 자세히 보고 싶어 변기를 쥐고 느낌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를 세우려 팔에 힘을 주고 천천히 변기에 의지해 휠체어에 타려 했지만, 이미 헤진 손목, 그리고 힘이 빠진 몸은 결국 더 이상 태형의 의지대로 말을 듣지 않고 남자의 품으로 쓰러져 버렸고, 잠시 당황하던 남자는 급하게 태형을 안고는 응급실로 데려갔다.
깨어났을 때는 또다시 병실이었다. 다만, 다른 점은 옆에 그 남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것. 붕대가 칭칭 감겨 있는 손목은 조금 불편했지만 정신을 잃기 직전의 흐릿한 시야와는 달리 멀쩡해진 지금, 선명한 시야로 보이는 남자의 얼굴은 조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잘생겨서 태형은 잠시 입을 벌리고 감탄했다.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도 있는 거구나.
“괜찮아요?”
아, 맞아. 나 죽으려고 했었지. 불현듯 머릿속에 박혀든 생각에 태형이 손이 살짝 떨려왔다.
나, 그때. 죽었어야 했는데. 왜…
?
“…왜.”
“네?”
“왜 살린 거예요…! 저 따위, 저 같은 거, 살아 있어봤자 아무한테도 도움 되지 않는데, 그냥 쓰레기일 뿐인데…! ”
“아니요, 쓰레기 아니에요, 태형 씨. 어, 일단 제 소개부터 하자면, 저는 전정국 이라고 합니다.”
“소개고 뭐고, 저는 그 때 죽었어야 했어요…”
남자, 아니 정국이 오돌토돌하게 흉터가 남은, 붕대로 감기지 않은 가는 손목을 살살 쓸었다. 손목 진짜 가늘다. 부러질 것 같아. 그나저나,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참으로 아픈 사람인 것 같았다. 한참을 답 없이 손목을 만지작거리던 정국이 어느새 눈물범벅이 된 태형의 볼을 붙잡고 제 시선과 맞췄다.
“많이 힘든 것 같은데, 제가, 다 도와줄게요. 다 괜찮아요. 정식으로 인사 합니다. 이 병원 후원하는 기업 이사 전정국 이라고 합니다.”
그 때, 너무 놀라 까무러칠 뻔 했다고, 태형은 생각했다. 사실 제가 입원했을 때부터 우연히 마주쳐서 계속 지켜봤었다고. 첫 눈에 반했다고.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사실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제가 정국에게 반쯤은 의지하게 된 계기 였었다. 태형은 제 옆에서 알짱거리며 창 밖에 뭐 재밌는 거 있냐고 물어오는 정국을 보며 살짝 웃었다.
“에, 왜 웃어요?”
“그냥. 우리 첫 만남이 생각나서.”
“엥, 구 만남이죠. 나는 형 꽤 오래 지켜봤는데?”
“시끄럽다, 임마. 나한테는 첫 만남이야. 그리고…늘 미안하다고 생각하고 있어.”
저와 같이 장난조로 얘기하는 태형을 보던 정국이 태형의 옆에 살짝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형. 응, 왜.
“저는 괜찮다니까요. 죄책감 가지지 말라고 했잖아요. 저는 형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할 수 있어요. 그게 제 목숨을 버리는 거라도. 돈 따위 하나도 안 아까워요. 저는 형이 더 소중하니까요.”
아…. 태형이 대답 대신 제 옆에 앉은 정국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제 병원비를 정국이 대신 내준다는 것이 너무 미안해서 제 전 재산을 보내줬지만 온갖 화를 내며 종국엔 대신 내게 해 달라며 애원하던 정국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미어지고 너무 고마워서, 태형은 그 때마다 정국을 불러 가만히 안겨 기대어 있었다. 처음에는 모르고 좋아했던 정국이지만, 워낙에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이젠 토닥여주며 죄책감을 갖지 말라고 한다.
철들었네, 장하다. 태형이 장난기를 참지 못하고 얼굴을 부비며 웃자, 정국도 마지못해 웃으며 대꾸했다. 저 장하면 이제 미안해하지 마요.
“근데 정말 궁금해. 너보다 두 살이나 많고 걷지도 못하고, 병원 신세만 지는 날 왜 좋아하는 거야?”
“그냥…형을 좋아하니까요. 좋아하는 데 이유가 있나요.”
“…같은 남잔데도?”
“좋아하는 데 성별이 어디 있어요. 그럼 형은 제가 형 이렇게 간호 안 해주고 막 다른 여자들하고 사귀는 게 좋아요?”
“……아니. 절대로.”
“그럼 됐어요. 우리가 좋으니까 된 거예요.”
“…그래, 그러네.”
“제가 다 해 줄게요. 저만 믿어요. 형이 제 구원자니까요. 저도 구원해 주는 거에요. 형이 해 줬던 것처럼. 제가 형 간병도 해주고, 형 가족도 돼주고, 인생의 동반자도 되 줄게요. 그러니까 저만 따라와요, 아니. 그러니까 저랑 같이 있어요.”
말은 잘해요, 정말. 그게 제 특기니까요. 밝게 웃는 정국의 얼굴을 주욱 밀어버린 태형이 창틀에 턱을 괴었다. 그래, 네가 해. 내 병, 이라기 보단 다리? 간호도, 내 애인도. 내 가족도.
“초콜릿 먹을래요?”
“…응!”
하늘은 맑았다. 태형의 몸은 더 이상 축구를 하는 아이들을 향해 있지 않았다. 흘러가는 구름처럼, 그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인생이 찍는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그냥 그렇게 흘러가도록 두었다.
다리를 잃은 댓가는, 23년 솔로 인생에 내린 사랑이라는 이름의 햇살과, 고아라는 이름으로 어둡게 점철되어있던 태형의 세상을 밝혀줄 별을 얻어 행복이라는 단어로 세상이 점점 밝아지기 시작했다는 것과,
더 이상 세상에서 혼자라는 생각에 외로움으로 절여진 하루하루를 보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
사고 당사자들이 태형을 잊어버려 그 만한 대가를 치루지 못했다는 점에서 처음엔 그저 절망을 하고 체념이라는 약을 먹고 힘겹게 잠들기도 여러 번이었지만, 이젠 그런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제 마음의 병을 치료해주는 간병인이 생겼다는 것.
그것에 태형은 꽤나, 아니 아주 많이 만족했다.
02. Ver. 2 정국
정말로 지루하고 삭막한 인생이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외동아들로 태어나 그룹의 대를 잇는 후계자가 되기 위하여 일생을 공부와 후계자 수업에 받쳐야만 했고, 당연히 부모의 사랑이나 친구와의 우정 따위는 찾아볼 수도 없는 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그것이 너무나도 싫고 괴로웠지만 말을 듣지 않으면 바늘 가는 데 실 따라가듯 날아오는 구타에 결국 꾸역꾸역 그들이 원하는 대로 맞춰 가야만 했다.
한 번이라도 반항을 하는 날엔, 정말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고 반성이라는 명목으로 집에서 쫓겨나야 했다.
여느 날도 숙제하는 시간을 1분 뒤로 밀었다고 자로 여기저기 흠씬 두들겨 맞고는 쫓겨났었다.
아마 펑펑 울며 부끄러움도 모르는 체 하고 여기저기서 난 생채기에 피를 흘리며 국민 공원 벤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을 때, 머리 위로 드리워지는 그림자에 정국은 혹시나 부모가 시킨 사람이 저를 잡으러 왔을까 잔뜩 겁을 먹으며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제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 앞엔, 열 아홉의 태형이 서 있었다.
“저기, 괜찮아? 많이 다친 것 같아서….”
“……”
“내가 치료 해 줄게. 나보다 어려 보이는데, 몇 살이야?”
“…열일곱.”
“에휴, 애기네 애기. 어떻게 이렇게 귀여운 애를 때릴 수가 있지…이리와, 형 나쁜 사람 아니다? 형이 치료 해줄게.”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와 인형 같은 외모에 홀려 저도 모르게 따라간 정국은 제 집, 아니 제 방과도 비교도 안 되는 허름한, 집이라고 부르기에도 뭐 한 집에 자연스럽게 들어가는 태형을 보며 잠시 기겁하다가도 왜 안 들어 오냐는 태형의 부름에 이제 들어간다는 말과 함께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조금 좁지? 하하…아무데나 앉아있어, 약 가지고 올게.”
태형이 민망하게 웃으며 정국을 거실-로 보이는 곳-으로 데려갔다.
정국이 어정쩡하게 자리를 잡고 앉을 동안 빨간약과 함께 약과 밴드를 들고 온 태형이 정국의 앞에 앉아 정국의 얼굴을 마주했다.
“야, 피부 되게 좋다, 눈도 진짜 크고! 너 엄청 잘생겼다…, 아, 아니 이게 아니지. 미안, 내가 정신이 좀 산만해서.”
갑자기 터진 칭찬 세례에 얼굴이 붉어지려던 정국은 이제 치료 시작한다는 말과 함께 붉은 소독약을 집어 드는 태형에 안도했다. 멋쟁이 토마토 될 뻔 했네.
**
치료를 끝낸 태형은 이내 제 소개를 까먹었다며 당황하더니 이내 제 이름을 소개했고, 정국은 그냥 웃으며 태형의 명찰을 가리켰다. 아,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며 얼굴을 붉히던 태형이, 이내 아! 하는 소리를 내고는 부엌으로 보이는 곳의 자그만 선반에서 무언가를 꺼내들고는 정국에게 다가왔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정국에게 살풋 웃어준 태형이 정국의 손에 그것을 쥐어주었다.
“이거, 초콜릿이야. 오늘 발렌타인데이니까…기분 좀 내 보려고 샀던 건데, 이렇게 너한테 주게 됬네. 이번엔 내가 줄 테니까, 다음엔 네가 줘. 알았지? 헤헤.”
정국이 태형을 빤히 쳐다보다 결국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예쁘고 귀엽지. 한참을 태형과 대화를 나누던 정국은 왜 안 들어 오냐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아쉬움을 뒤로 하곤 집에 가야 했다.
뒤에서 또 만나자고, 더는 다치지 말라고 소리치던 태형의 예쁜 웃음과 목소리를 생각하며 정국은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저를 쳐다보는 가족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앞으로는 제대로 잘 하겠다는 사과를 했다.
그 첫 만남 같지 않은 첫 만남이, 약속 같지 않은 그 약속이 정국에게는 꽤나 큰 변화를 불러다 준 계기가 되었다.
꼭 성공해서 태형을 다시 만났을 땐 그런 상처투성이에 나약한 제 모습이 아닌, 멋지고 잘생긴 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작은 다짐이, 점점 크게 불어나 21살의 제 아버지보다 능력 있고 힘 있는 이사 전정국을 만들었다.
점점 흐릿해지는 태형의 얼굴이 보고 싶어 태형의 뒷조사를 실시한 정국은, 태형이 교통사고를 당해 저희 기업이 후원하는 병원에 입원 해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수술비를 감당하지 못해 퇴원을 못 하고 있다는 것도, 태형이 이혼가정에서 아버지를 따라 살다가 매일매일 술에 취해 저를 폭행하는 아버지에 결국 15살에 집을 나와 겨우 사정사정해가며 알바를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는 것도.
처음엔 뒤통수를 강타하는 충격에 허우적거렸지만 이내 정국은 정신을 차렸다.
생각해보니 저를 이 자리로 올려준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태형이었고, 지금의 저는 조금이라도 더 이상 태형을 만날 시간을 지체한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의 후계자라는 사실과, 그 사실을 버티게 해준 버팀목을 잃을 것 같다는 불안감에 미쳐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하체 마비라고 했나. 못 걷는다고…그럼 내가 다리가 돼 줄게요. 형의 어둠에 태양이 되어 줄게요. 형은 제 인생에, 어둠에 불을 밝힌 달이고 별이니까, 제가 그 놈들 다 조져줄, 아니 우리 순수한 형 놀라면 안 돼지. 혼내줄게요.
우리 기업이 후원하는 병원인데, 꼴이 잘 돌아가는지 직접 보고 와야겠다는 명목 하에 병원에 들어오기를 성공한 정국은 급히 태형을 찾아 여기 저기 돌아다녔지만, 자살시도를 한 후 거의 병실에 감금되어 살아간다는 간호사의 말에 천천히 태형을 만날 기회를 노렸다.
병원 침대에 피를 묻히는 게 미안했는지 로비 구석진 곳에 있는 소파나, 화장실에서 한다고, 했나. 마음이 아팠지만, 그때 조금 웃음이 났다고 기억한다. 참 태형다운 생각이었다.
형이 다치는 건 싫지만, 빨리 만나고 싶어요. 빨리 만나서 초콜릿 먹여 줘야 하는데.
그러다 우연찮게 복도에서 수다를 떨던 간호사들에게 태형이 무언가를 감추고 1층 화장실로 간 것 같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정국은 4층에서 1층을 향해 뛰었다.
그리고 도착한 화장실엔,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고 있었다. 없나, 하고 나가려던 찰나 살짝 벌어진 두 번째 칸 문 사이로 흘러나오는 핏물에 정국이 숨을 참았다.
형. 왜 그랬어요. 당장이라도 나오려는 눈물을 참고 발개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정국이 애써 밝게 말했다.
“저기요. 한참 전에 들어갔으면서 왜 안 나와요. 변비세요?”
“… ….”
“저기요? 안에 문 고장 나서 못 나오시는 거예요? 아니죠? 자나? 저기요! 저 들어갑니다!”
말을 끝낸 후, 급히 두 번째 칸 앞으로 가 문을 연 정국은, 여전히 아름다운 태형에 감탄했다가도 핏물로 잔뜩 물든, 원래는 흰 색이었을 병원 복의 소매를 꾹 말아 쥐고는 변기에 의지해 일어나려는 태형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냐고 말을 꺼내려던 순간 눈에 초점이 흐려지며 제 품에 안기듯 쓰러지는 태형에 놀라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태형을 안아들고는 응급실 쪽으로 달렸다.
이제야 만났는데, 몇 년을 기다렸는데, 왜 어째서 죽으려고 하는 거예요.
형……
**
까딱하면 과다 출혈로 죽을 뻔 했다고 태연히 말하는 의사에게 역정을 내며 병실에서 쫓아낸 정국은 눈을 감고 누워있는 태형의 손을 맞잡았다.
더 이상 다치지 말라면서 왜 형이 다쳐요. 나는 형 말 잘 들었는데. 그래서 악착같이 살아왔는데.
“…아,”
창백해진 피부 위에 그림자를 드리우던 짙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자, 정국은 태형의 손을 놓았다. 놀랄 테니까, 아마도.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며 태형의 옅은 갈색 눈이 보였다. 이미 생기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눈에 정국은 안타까웠다. 많이, 아픈가요. 그래도 조금만 버텨줘요.
“괜찮아요?”
손목에 감긴 붕대를 내려다보다가 멍하니 제 얼굴을 올려다보는 것에 정국이 목을 축이곤 입을 열자, 태형이 고개를 내리며 말을 꺼냈다.
“…왜.”
“네?”
“왜 살렸어요? 저 같은 거. 부모도 없고, 이젠 살아갈 희망도 없는데, 왜…!”
“아니요, 있어요, 당신.”
저를 원망하지만 한 편으론 살짝 빛을 담은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에 정국이 태형의 다치지 않은 손목을 쥐었다. 하지만 오돌토돌하게 남은 짙은 붉은색의 흉터는 그가 이미 자살기도를 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제 걱정 하지 마요. 아프지 마요.
“제가, 다 도와줄게요. 정식으로 인사 합니다. 이 병원 후원하는 기업 이사 전정국 이라고 합니다.”
제가 간병도 해주고 함께 할게요. 당신은 내 상처의 간병인이 되어줬던, 내 인생의 구원자니까.
*
어느 정도 생기가 돌아온 맑은 연갈색 눈동자에 비춘 푸른 빛 하늘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흉터가 사라져가는 얇은 손목의 예쁜 손이 제 손을 맞잡아 오는 게 너무나도 기뻐서,
볼에 입을 맞춰주면 수줍은 듯 붉어지는 두 볼이 사랑스러워서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사랑했고, 사랑하고, 사랑 할 게요.
사랑합니다.
+ 본문 끝, 에피소드 모음
1. 넌 나의 구원
태형은 오랜만에 마셔보는 바깥 공기에 눈물이 차오를 것만 같았다.
퇴원. 절대 하지 못할 것만 같았던, 금전적으로도,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 자신을 바라 볼 시선이 무섭다는 심리 때문으로도 입에 담지 못했던 그 단어는, 정국의 지원과 사랑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제 뒤에서 휠체어를 밀어주며 이따금 하얀 눈을 살짝 뭉쳐 태형의 손에 쥐어주는 정국을 가만히 보던 태형은 살짝 고민하다가도 이내 정국을 불렀다. 지금이 아니면 해주지 못할 것 같은 말.
“-정국아.”
“네, 형. 뭐 필요 한 거 있어요?”
“아니…그냥, 고마워서.”
“왜요 또. 갑자기 뭐가 또 그렇게 고마우실까 우리 형은.”
“솔직히 난 네가 나 같은 거한테 왜 관심을 갖는지 이해 못 해. 하지만 이건 알아. 너는 내 인생에 정말 큰 영향을 미쳤고, 나는 너한테 푹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 할 거고, 너는 내 상처를 치료해준, 구원이라는 거. 그래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형.”
“…응.”
“형도 마찬가지에요.”
“어?”
태형이 눈을 키우며 휠체어를 멈추고 제 앞에 와 제게 시선을 맞추는 정국을 쳐다봤다.
정국이 태형의 무릎에 가지런히 놓인 손을 끌어와 꼭 잡으며 조금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형도 제 인생에 정말 많은 영향을 미쳤고, 그래서 저는 이렇게 큰 사람이 돼서 형을 도와 줄 수 있었어요. 형도 제겐 정말 소중한 구원이고, 사랑이에요. 절대 놓지 않아요. 저도 형한테 푹 빠졌거든요. 그러니까 미안해하지 마요. 미안해 할 게 없는걸요.”
저도 고맙고 미안해요. 그럼 우리 쌤쌤이니까 그냥 넘겨요. 서로가 서로의 구원이니까.
2. 회사 안 가냐?
정국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동거를 하게 된 둘은 여느 때처럼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태형은 저를 제 위에 앉히곤 백 허그를 한 정국의 손을 가만히 쓸다가, 문뜩 떠오른 사실에 아, 하며 말문을 열었다.
“야.”
“네?”
“넌 회사 안 가? 이사라며. 높은 직책이면 바빠야 하는 거 아니야?”
“…아, 그거.”
“너 이러다 잘린다?”
“제가 회장님 아들인데요, 뭐. 근데 저 승진해서 사장이에요, 형. 그리고 재택근무…”
“아니, 아니 잠깐만. 뭐라고?”
태형이 순간적으로 놀라 팔꿈치로 정국의 배를 강타하며 돌아보자, 잠시 커헉 하며 호흡을 멈추던 정국이 저를 경악을 금치 못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태형을 쳐다보았다.
“재택…”
“아니, 그거 말고. 네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KV 그룹 회장 아들이라고?!”
“…에, 네.”
“나는 네가 돈 너무 많이 쓰길래 걱정했는데, 이젠 더 걱정해야 하잖아!”
“뭘요?”
“이이, 아니야, 몰라도 돼!!”
“아아, 설마 막 정략결혼 그런 거 생각 하는 거 아니죠…?”
정답. 크게 찔린 태형이 얼굴을 붉히며 앞에 있는 휠체어로 몸을 옮기려 버둥대자 그런 태형을 알아차린 정국이 박장대소를 하며 태형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어딜 가요.
“저희 부모님 이제 저한테 관심도 없으세요. 다 컸으니까 알아서 잘 살아라 하는 마인드. 그러니까 걱정 마요, 태형아.”
“너, 너 형한테…!”
“왜 있지도 않은 일에 질투를 해, 아이 귀엽다, 우리 태형이.”
아악 진짜 전정국!!!!!!!!! 아, 아 형!!!!!!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요, 아, 푸흡, 악. 큭헉-
한참 동안 집안에서는 정국의 비명이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후일담으로는 걷지 못하는 저를 피해 쉽게 도망갈 수 있었으면서도 피하지 않고 그대로 맞아주는 정국에 태형의 가슴이 오랜만에 미어졌었다고 한다.
3. 형, 그거 알아요?
“형, 그거 알아요?”
정국이 제 무릎 위에 앉아있는 태형의 허리에 팔을 감고 등에 얼굴을 묻으며 속삭이자 무덤덤하게 티비에 시선을 고정하던 태형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
“우리 처음 만난 날이랑, 형 자살시도 했을 때 날짜요.”
“자살시도…그 얘기 하지 말라니까. 어…그게 왜? 근데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이 따로 있나…?”
정국의 말에 잠시 표정을 굳히다가도 이내 풀며 정국의 큰 손을 쥐고 손장난을 시작한 태형이 다시금 고개를 갸웃거렸다. 날짜…?
“아이, 여튼. 우리 처음 만난 날도, 두 번째로 만난 날도, 모두 2월 14일, 발렌타인데이인 거 알아요?”
“어, 진짜…?신기하네.”
“그죠. 그래서 저는 그렇게 믿고 있어요. 발렌타인데이의 기적이라고. 발렌타인데이가 저랑 형을 이어준 것 같잖아요.”
“으음, 좀 억지인 것 같긴 한데 은근 말 된다. 우리 사귄 날도 2월 14일이잖아.”
태형이 정국의 품에 조금 더 파고들며 문득 떠오른 것을 말하자 정국이 아이처럼 웃었다. 몇 년이 지나도 바뀌지 않는 해맑은 웃음이었다.
“그죠. 그리고 내일은 저희 1주년이에요. 2월 14일인거죠.”
“그치. 근데 갑자기 그건 왜?”
“저희가 1주년이 될 때 까지 진도가 어디까지 나갔게요?”
“…?”
“키스예요. 이건 좀 너무 하잖아요! 하체 마비라도 성욕은 있다면서!!”
“아, 아니, 너는 뭘 그걸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하고 그르냐…”
“그래서 내일은 초콜릿을 먹을 거예요.”
“(얘는 뭘까 이야기의 흐름은 무엇인걸까)”
“무슨 초콜릿인지 알아요?”
“뭔데?”
“부드럽고 달콤하고 맛있는 태형 초콜릿을 먹을 거예요. 근데 저는 아직 어려서, 욕심이 나요. 그러니까 지금 먹을 거예요.”
“어…야, 야? 정국아!?”
그렇게 얼떨결에 거사를 치룬 둘은 다음 날 2월 14일날, 허리를 부여잡고 삐진 태형은 태형을 위해 초콜릿 케이크 위에 태형이 형 사랑해요를 적어온 정국에 의해 풀어졌고, 초콜릿 케이크를 가지고 둘은 신나게 몸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런 둘을 조금 살펴볼까?
“흐읏, 하윽, 먹을 거 가지고, 아으! 장난하면, 으응, 안 된댔는, 하앗, 데!”
“괜찮아요. 후, 여기에, 집중해요, 태형아.”
“아앙! 아! 아프, 흐윽!”
“후우…사랑해요, 윽, 사랑해, 김태형.”
Fin.
[후기]
어…안녕하세요! 백설입니다! 마냥 해맑게 신청한 합작이었는데, 라인업 보니까 전부 존잘님들만 모여 있던 거 있죠…하하…괜히 제 자신이 초라해 보여서 중도 취소를 할까, 말까 많이 망설였는데 그래도 이렇게 용기 내서 글 써봅니다. 많이 부족한 필력이지만 재미있게 읽어주셨다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ㅠㅠ 이런 합작 열어주신 멋진 총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이만 후기 끝내요! 감사합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