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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의 겨울

 

 

 

 

기록적인 추위였었다.

 

 

그 애를 만난 날에도, 오늘도 그랬다.

 

 

따뜻한 지역에서만 살아오던 정국은 추위가 너무 낯설었다.

까마득한 어린 기억에도 눈 오는 날이면 나가 눈싸움하고 눈사람 만들던 주변 아이들과 달리, 내복 입고 나가라는 부모의 말을 뒤로 한 채 추운 게 싫어 집안에 더 꽁꽁 틀어 박혀 있었었다.

겨울을 떠나 여름만 있는 따뜻한 곳으로 이사 왔을 때, 변하지않는 풍경이 지겨우면서도 안정감이 들었다.

그렇게 겨울을 잊었다.

겨울이 사라졌다고 믿었을 무렵, 밀린 겨울이 찾아오듯이 1년에 절반은 항상 눈이 쌓여있는 이 곳으로 오게 되었다.?

 

 

어쩌다가 만난 사람들은 정국이 온 지역을 말하면, 의례처럼 왜 그 좋은 곳을 두고 왔냐며 의아해했다.

그러게, 여기도 좋잖아요. 하고 웃어넘기면 다들 그건 그래 하며 넘어갔다.

그들은 정국의 의견이나 생각이 궁금했던 것보다, 그저 겉치레 뿐인 인사같은 것이었다.

늘 같은 질문에 항상 비슷한 대답을 하면서도 정국은 그게 진짜 이유인지 확신은 하지 못했다.

그저 흘러가는 듯 살았더니 어느덧 여기였을 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아직 반팔을 입고 스웨터의 온도로 넘어갈 때, 정국은 언젠가 사온 세일로 싸게 산 패딩을 꺼내 입었다.

여름 끝 무렵에 태어나서인지 추위를 유독 타서 가끔씩은 겨울에 대한 이질감이 짙어질 때도 있었다.

따뜻한 곳에서 살다 보니 마음이 추워져서, 몸이 추워지면 상대적으로 나아질 줄 알았는데.?

겨울이 가득한 곳으로 와도 마음이 추운 건 여전했다.

 

 

어쩌면 사람들이 부러워 할 수도 있을 평범한 가정에서 적당한 애정을 받으며 무난하게 살아왔다.

그럼에도 추위를 타듯 외로움을 탔다.

내 괴로움 돌보기 급급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산다는 이야기가 끔찍했다.

이 상태에서 끝까지 영영 못 벗어 날까 다른 사람들은 행복한 것처럼, 혼자만 외로움에 죽어가는 것처럼 여겼다.

그래서 사랑이 무서웠다.

스스로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감정이 다른 사람에게서 까지 휘둘려진다면 그때에는 버틸 지도 못 할 것 같아서.?

응, 그래서.

매일 추위에 싸우는 스스로를 토닥이느라 다른 사람을 돌봐주지 못 할 것같은 걱정에 중요한 사람을 두지도 못했다.

따뜻한 날씨에 추운 온도를 잊은 것처럼, 사람의 온기를 알아버리면 떠난 이후의 또다른 추위를 견뎌내지 못할 것을 두려워했었다.

눈이 오는 정국의 세상에는 혼자만 서 있었다.

 

 

그렇게 홀로 매일을 살아남는 와중에, 여느 똑같던 날에 김태형을 만났다. 그 전 날과 같이 눈이 내리던 날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에 곧잘 웃는 그 애는 겉돌기만 하던 정국의 곁에 자연스럽게 머물렀다.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기뻤다. 정국의 세상에 같은 눈 위를 밟고 있는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같은 온도로, 하지만 더 따뜻하게 태형은 정국의 주위를 맴돌며 정국을 서서히 데웠다.

주변으로 태형의 자국을 따라 눈이 녹고 아지랑이가 피어났다.

정국의 입술 사이로 시린 입김이 아닌 따스한 숨이 새어 나왔다.

함께 하고싶은 마음이 커지면서도 차마 겨울을 달래 달라며 태형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잡으려고 하면 달아났던 그 전의 온기처럼 태형마저 사라질 까봐, 불안한 호흡으로 태형의 곁에 머물 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편했다. 같이 있으면 슬프지도 않았고 외롭지도 않았다. 간헐적으로 사람들에게서 찾아오는 고독함은 그 애에게선 없었다.

조금 떨어져 앉아도 그 거리에는 정국과 다른 온기가 느껴졌다. 뜨겁지는 않지만 잔잔히 정국을 따뜻하게 감쌌다.

문득 그 애와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누구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단 둘이 있으면 겨울을 겪기 전인 듯 마음이 평화로웠다.

시야 속의 겨울을 내쫓아 태형의 어깨에 기댔다.

 

 

결국 자연스레, 서로가 서로에게 남이 아니게 되었다.

태형은 자신의 온기가 유일한 듯 사르르 녹아 흐트러지는 정국의 곁에 남았다.

기꺼이 겨울에서 홀로 버티느라 지쳐버린 정국에게 어깨를 내주었다.

 

 

정국아,하고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웃는 태형의 얼굴이 정국은 좋았다.

온 몸으로 정국을 만나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 애가 좋았다.

저 멀리서부터 정국밖에 존재하지 않는듯, 누군가의 애정이 힘껏 느껴진다는 것은 새롭고 달콤했다.

태형의 주변에는 싱그러운 풀들과 시들지않는 꽃들이 가득했다.

보이지 않는 자그만 생명들이 그의 주변을 맴도는듯 했다.

태형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 하는 순간, 달콤함은 정국에게도 함께했다.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손을 뻗어 서로를 붙잡았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이 되었다. 가장 중요한 서로가 되었다.

그 날도 처음 만난 날처럼, 정국이 처음 이 곳에 온 날처럼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겨울이 지나, 짧았던 봄이 지나 여름이 와도 정국의 겨울은 여전했지만 홀로 추위를 견뎌내야 했었던 전과 달리 그 겨울에 기꺼이 함께 해주는 태형이 있었다.

돌고 돌아 또 다른 시린 겨울이 찾아왔지만, 더이상 슬프거나 두렵지 않았다.

 

 

하루하루를 태형으로 덧씌웠다.

일년 내내 정국을 가두었던 겨울은 서서히 모습을 바꾸었다.

1년을 돌아 맞은, 태형과 함께하는 겨울의 시작이었다.

 

 

 

 

 

 

 

 

 

 

 

 

 

“있짜나, 친구가 그러는데 결혼할 거 아니면 연애는 2년 넘지 말래.”

 

 

쨍그랑, 태형의 함바그를 썰어주던 정국의 손에서 칼이 미끄러져 접시와 박치기하면서 소스를 탁자 위에 흩뿌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깔끔한 평소 버릇처럼 휴지로 테이블을 닦겠지 만은 정국의 손은 미동도 보이지 않았다.

흔들리는 두 눈이 보이지도 않는지 당사자는 평온하게 입을 오물거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며 히, 웃어 보이는 얼굴에 귀여워서 정국은 웃어버리고 말았다.

태형은 정국에게 그런 사람이었다.

미워할 수 있는게 아니라 그냥 밉지않는 사람이었다.

정국이 태형을 사랑하는 만큼, 태형도 정국을 사랑한다고 굳게 믿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은, 바로 옆에서 정국을 향해 웃고 있어 준다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안정적이고 행복한 일이었다.

태형의 온기를 품기 위해 그 추위를 홀로 견뎌내야 했던 날들에 대해 웃으며 다행이었다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념일에는 수제 햄버거라고 고집부리는 태형과 그래도 로맨틱하게 스테이크를 먹어보자 라고 주장하는 정국이 찾은 타협점인 유명 함바그 가게였다.

미리 예약을 해 좋은 자리에 앉은 테이블 위에는 시린 땅 속에도 있어보지 못한 꽃이 피어있었다.

전과 같으면 생소한 느낌에 외면해 버렸겠지만 태형과 너무나도 잘 어울려서, 마음 속에 품었다.

 

 

“그걸 꼭 1주년 기념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심보가 뭐야.”

“나보구 앞으로 더 잘하라구! 난 정국이랑 2년 넘게 연애할 거니까 정국이가 잘해줘야 해!”

“당연하지.”

 

 

아직 입안에 음식이 남아있으면서도 고개 숙여 열심히 함바그를 써는 집중한 얼굴이 귀여워 잠시 바라보자 태형이 고개를 들어 정국을 마주본다.

히히 웃는 태형의 얼굴에 묻은 소스를 자연스레 손으로 닦았다.

엉덩이를 살짝 떼어내 불편한 자세임에도 태형의 손을 덮어 남은 함바그를 조각조각 썰어주었다.

이 모든 배려와 행동들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넘치게 사랑을 주어도 부족한 사람이라, 그만큼 내게 넘치는 애정을 주는 사람이라.

 

 

내게 세상의 따뜻함을 알려준 사람이라.

겨울이었다. 정국의 마음도 여전히 추웠지만 태형이 있는 겨울은 따뜻했다.

 

 

밖은 여전히 눈이 내리고 여전히 추웠다.?

꺼져가는 온기를 조금이라도 붙들어보고자 몸은 움츠렸지만 손을 뻗어 정국의 손을 기다리고 있던 태형의 손을 맞잡았다.

맞물려 잡은 두 손은 서로를 따뜻이 데워 서서히 심장까지 잠식했다.

혼자서는 할 수 없었던 일이 였다. 내가 내 손을 잡아도 추운 건 여전했는데, 너는 이리도 쉽게 순식간에 나를 바꾼다.

 

 

너와 함께여서 좋았다. 너와 같이 해서 좋다.

편안한 사이면서도 아직까지 설렘이 느껴지는 건, 밤의 헤어짐이 좋고 낮의 만남이 좋은 건.

네가 내 영원 이기를.

 

 

넌 나를 네가 없을 때도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나도 사랑하지 못하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너는,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가 있을까.

1년이였다. 그리고 또 다른 관계의 이름으로 함께한 1년이였다.

앞으로 그렇게 1년이 계속 흐르겠지.

 

 

“우리 디저트 먹으러 가자, 디저트!”

 

 

환하게 웃어주는 태형을 향해 정국도 가장 환하게 웃어주었다.

나의 겨울. 가장 따듯한 나의 겨울.

 

 

1년동안 잡았던 네 품 안에서 겨울을 녹여낸다.

1년 이후에는 네 품 안에서 서서히 겨울을 잊을 것이다.

겨울은 더이상 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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