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멋대로맨스
화상 부위를 소독하는 간호사의 동그란 정수리 보며 생각했다. 발렌타인데이는 누가 만들었지? 연인이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날이라는 취지는 좋았다. 백날 천날 사랑 확인하지만 하루 정도 굳이 부산스럽게 확인하는 거, 나쁘지 않았다. 근데 여성이 남성에게 초콜릿을 줘야 한다는 식의 상술은 누가 시작한 걸까. 이때다 싶어서 배 누르면 아이러브유라고 말하는 곰인형 끼워 파는 대기업도 문제였다. 페이스북에는 오늘 받은 초콜릿 떼로 찍어 자랑하거나 하나도 못 받았다며 한탄하는 딱한 동기들뿐이었다. 여자 친구로부터 하트 모양 수제 초콜릿을 받았다는 미연이의 게시물에 김태형도 댓글 달았다. 야 부럽다 미여나. (내남친이란새끼는초콜릿도안사주고어디서뭘하는건지연락도없고)
아악 아파요 따가워요 아악 아악
김태형은 지 잘난 얼굴 믿고 제멋대로 구는 경향이 있다. 사실 모르겠다. 얼굴이 잘나서 제멋대로 구는 건지 제멋대로 구니까 얼굴이라도 잘난 건지. 처음 만난 날부터 줄곧 고민해 왔다.
호석이 형은 아싸 생활 자처한 내게 베프 만들어 준다며 구닥다리 모아 놓은 동아리 회식을 열었다. 나는 약속 시간 십 분 전까지 침대에 양다리 붙이고 있었다. 진짜진짜 가기 싫어. 자고로 구닥다리는 지 사상이 옳은 줄만 알아서 모르는 작자에게 무례한 언행 덩어리째 쏟아붓기 일쑤였다. 어떤 변명 댈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문자 하나 도착했다. 회식 장소 바뀜 학교 앞 맘터 고고. 나는 햄버거집에서 회식한다는 점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이건 정말 몰상식하다 절대 갈 수 없다는 답장을 전송했다. 호석이 형은 싸이버거 세트에 휠랩과 옥수수콘샐러드 추가해 준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나를 뭘로 보구. 나는 검정 후드티 모자 뒤집어쓰고 야금야금 휠랩 갉아 먹었다. 무한 삼겹살집에서 맘스터치로 회식 장소를 바꾼 놈은 김태형이었다. (놈은 놈나 좋은 것의 약자다.) 생각보다 유한 구닥다리 1호의 케찹을 훔쳐 먹으며 그놈만 기다렸다.
김태형이 햄버거 먹자 하면 햄버거 먹는 거고 돌멩이 먹자 하면 돌멩이 먹는 거였다. 김태형은 천사 같았다. 존나 대천사. 아, 놈나 좋은 것.
그날 나는 제멋대로 구는 김태형한테 반해 버렸다. 다짜고짜 이 예쁜 꼬맹이는 누구냐 묻는 김태형도, 허리 구십 도 꺾어 인사하니까 대뜸 허벅지 만지는 김태형도, 가슴 만져 봐두 되냐고 묻는 김태형도 내 눈에는 다... 천사 같았다. 김태형은 친화력이 너무너무 좋아서 만난 지 삼십 분만에 족보 빌려 주라고 협박했다. 족보 안 빌려 줄 거면 딸기스무디 사 줘. 딸기스무디 안 사 줄 거면 동아리 나가. 그러고서 힝힝 웃었다. 족보 뜯기고 딸기스무디 뜯기며 장장 두 달을 짝사랑했다. 한 번은 술 먹고 김태형한테 꼬장 부렸다. 발끝까지 만취돼 있던 터라 내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내가 자주 생각만 하던 것을 필터링 없이 나불거렸다. 형 엉덩이 너무 귀여워 만져 볼래 형은 내 허벅지랑 가슴 만지면서 나는 왜 못 만져 형 엉덩이 잘 때 몰래 만질 거야. 아무튼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눈 떠 보니 김태형 자취방이었다.
나 아홉 시 수업 있어서 간당. 해장국 마니마니 사 놨음. -남친♡-
존나 제멋대로라니까.
반강제적 비밀 연애였다. 김태형이나 나나 시디과 요정, 경영학과 아이돌로 유명하기도 하고. 어디 떴다 하면 사방에서 수군 대기 일쑤라 공개 연애했다가는 전국에 찐 호모 신상이 깔릴 거라는 김태형의 소신이었다. 잘생기니까 피곤하다 그치 정구가. 나는 김태형이 나를 설득하려고 이유를 제시했다는 데에 감동해서 솜털 날리도록 고개 끄덕였다. (여기저기 미팅 소개팅 끌려다닐 거 알았으면 안 그랬지.)
무리가 파하면 우리두 그만 헤어지자 하하 하고 성수동에서 재회했다. 꽉 막힌 구닥다리 형들은 우리가 볼 뽀뽀 하며 돌아다녀도 찐 호모라고 생각 못할 텐데... 매번 그렇게 했다. 발렌타인데이가 이틀 남은 날엔 쌓인 눈이 예뻐서 손 꽉 붙들고 걸었다. 초콜릿이며 사탕이며 각종 휘황찬란한 이벤트 물픔으로 도배된 거리였다. 나는 내심 먹고 싶은 초콜릿을 눈으로 골랐다. 김태형이 그에 대해 묻는다면 저는 비싼 거 말고요 형이 준다면 가나도 좋아요 라고 말할 준비까지 마친 후였다.
초콜릿이 이만 원? 입에 넣으면 달구 끈적한 건 똑같은데. 나는 발렌타인데이 너무 싫어. 저거 다 약간 상술이야 대기업의 횡포라구. 속아 넘어가는 커플들도 웃기다. 그칭 정구가.
그쵸 그쵸. 내가 들어도 내 목소리는 형편없이 떨리고 부자연스러웠다. 김태형은 발렌타인데이 비롯한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 짜장면데이 삼겹살데이의 문제점을 줄줄이 나열했다. 나는 당연히 미리 사 둔 초콜릿을 버렸다(는 아니고 먹어치웠다). 이걸 줬다가는 대기업의 희생양으로서 잔소리 오지게 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김태형은 제멋대론데. 내가 안일했다.
페레로 로셰 30개 세트와 배 누르면 아이러브유라고 말하는 곰인형 선물 받았다. 김태형이 줬다. 아니 어제 그렇게 말해 놓고 초콜릿을 준다고? 도토리 가방에서 abc 초콜릿 꺼내 먹던 호석이 형이 너희 찐 호모냐? 물었다. 나는 현명한 대처 방법 생각하기 바빠서 대답 안 했다. 내가 우물쭈물하는 시간 늘어 갈수록 김태형 얼굴은 차차 굳었다. 형이 싫다며 저거 다 상술이구 대기업의 횡포라며. 따지고 싶은 맘 목구멍 너머로 씹어 넘겼다. 아 그래. 이거 하면 김태형 반응 좆 아님 개다. 제발제발제발제발
나는 김태형 손에 들린 페레로 로셰 30개 세트를 홱 빼앗았다. 그때까지 김태형 표정은 이 새끼 어떻게 조지지 딱 그거였다. 따뜻한 입안에서 초콜릿 살살 녹이고 두 손으론 김태형 천사 같은 양 볼을 쥐었다. 미연이 일본에서 사 온 곤약젤리랑 촉감이 같아서 닳아 없어질 때까지 쭈물거리고 싶었다. 나는 달고 끈적해진 입술 곧장 김태형 입술에 꾹 눌러 댔다. 순순히 입 벌리는 김태형이 너무 좋아서 주책맞은 눈물 터지려고 했다. 묽게 녹은 초콜릿은 유연하게 우리 입안 왕복했다. 자제하려고 했는데 스물한 살 건장한 청년인 나는 흥분했다. 힘으로 눌러 김태형 눕히고 그 위에 올라탔다. 내가 무릎으로 곰인형 배를 누르는 바람에 끊임없이 아이러브유 아이러브유 들려왔다. 김태형 가느다란 손이 내 복근을 훑었다. 환장하게. 고개를 거의 구십 도 꺾어 김태형과 몸을 겹쳤다. 이어폰 두고 간 호석이 형이 아 이 새끼들 찐 호모 맞잖아 하고 소리 질렀다. 거기가 아마 동방이었다.
일 년은 금방 갔다. 연애하는 동안 나는 운동량을 두 배 늘려야 했다. 김태형은 기본적으로 내 허벅지와 사타구니에 손대는 자세를 항시 유지했다. 두 젖꼭지에게 꼭원이와 꼭투라는 이름을 선물해 주고 내 새끼들 잘 있나! 하며 시도 때도 없이 티셔츠를 까 째꼈다. 술 먹고 와서는 고추에 대고 전정국 찾은 적도 있다. 뭐, 그 덕에 우리는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 섹스했다. 김태형은 허리 들썩이다가도 내 몸에서 상처 발견하면 누가 이 부드러운 토끼 복숭아 살갗에 흠집 냈냐 바락바락 소리 질렀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싹싹 비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문제의 발렌타인데이 가까이 왔다. 김태형은 설레발 까는 미연이에게 그거 다 약간 상술이구 대기업의 횡포야 했지만 나는 더 이상 속지 않았다. 김태형은 우주 천치 제멋대로 천사니까.
간호사님. 혹시 병실 문을 잠글 수 있나요?
하하. 여기 응급실이에요.
제발요.
하하.
일 년 정도 특정 상대와 진득히 몸 섞다 보면 감 같은 게 생기나? 내 애인이 가까이 있구나. 그런 거. 허벅지와 사타구니와 꼭원이 꼭투 그리고 찐 정국이 노련한 손길을 갈구했다. 아. 아. 아무 때나 아름다운 천사님. 멀리서 걸어오고 있었다. 왜 이렇게 사나운 표정을 하고 있으신가요 천사님. 김태형은 자다가 급히 왔는지 롱패딩 속에 남색 스트라이프 잠옷 차림 그대로였다. 아무리 봐두 그냥 잠옷인데 김태형은 외출복 겸용이라고 꾸역꾸역 우겨댄다. 김태형과 간호사가 짧게 대화했다. 응급실 시끄러워서 내용은 잘 들리지 않지만 나를 저 새끼라고 칭하는 건 확실했다. 간호사는 나와 김태형을 번갈아 봤다. 이 새끼들 찐 호모다 라고 생각하는 게 눈에 보였다. 김태형은 간호사한테 인사하고 내 쪽으로 성큼성큼 왔다. 다리가 길어서 서엉큼서엉큼. 나는 기죽지 않으려고 했다. 이게 내가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형한테 맛있는 거 만들어 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내가 왜 혼나야 돼. 왜 혼나야 돼. 혼나야 돼 혼나야 돼.
야.
혀엉....
뭐 하다가 그랬어.
다들 들었지? 김태형이 야라고 했다. 김태형은 내가 지 햄버거 짜장면 뺏어 먹을 때 빼고는 야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토끼 애기 꾸기 정구가 자기야 여보야. 보통 그런 호칭이었다. 서러워서 눈물 쏟을 뻔했다.
김태형의 길게 자란 속눈썹이 느리게 팔랑거렸다. 저번에 티브이 프로그램 따라 하느라고 속눈썹 위에 샤프심 올려 봤는데 열두 갠가 올라갔다. 천사 아니야? 나는 살며시 씰룩이는 귀여운 입꼬리도 봐 버렸다. 쫌만 더 쫌만 더. 최후 수단으로 덮고 있던 이불 걷어 회색 트레이닝복 입은 허벅지가 보이게 했다. 어제 스쿼트 5세트 하고 자서 평소보다 몇 배는 우락부락했다. 이곳은 공공장소지만 내 허벅지 만져두 좋다는 무언의 승낙이었다.
강아지는 초콜릿 먹음 죽어.
아. 아. 맞다 맞다....
일어나. 가자.
나는 체내 분노가 2% 정도 남은 김태형 뒤를 얌전히 쫓았다. 얇은 재질의 잠옷이 김태형 통통한 엉덩이 선 따라 하늘하늘했다. 화상 부위가 줄곧 따끔거렸다. 이대로 가도 되는 건가? 나를 치료해 주던 간호사는 가서 떡이나 쳐라 하는 눈빛으로 우리 쳐다봤다. 김태형 자동차는 응급실 건너편에 아무렇게나 주차돼 있었다. 나는 두 다리 휘적이며 뛰어가 정중히 차 문을 열었다. 형 타요. 김태형은 내 손목 낚아채 차 안으로 욱여넣고는 내가 운전할 거야 했다. 어떻게든 이 분위기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려면 내 자취방으로 가면 안 됐다. 초콜릿 제조 현장은 제3차 세계 대전 방불케 했다. 불행하게도 김태형 자동차는 내 자취방을 향해 달렸다. 안 돼 안 돼.
형, 그....
왜.
적절한 사유가 필요했다. 우리 집에 손님 오셨어? 갑자기 형 자취방에 가고 싶어? 둘 다 김태형 기분을 잡치게 할 분노 주머니 수준의 변명이었다. 초조한 마음에 보송보송 자란 솜털 강박적으로 뜯었다. 곧 내 피부 뚫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가 아주 섬뜩한 것과 눈 마주쳤다. 뒷자석에 점잖이 앉아 있는 분홍색 토끼 인형. 그 옆에는 페레로 로셰 50개 세트가 금박 포장 번쩍거리며 제 생존 알리고 있었다.
저거 내 거예요?
뭐?
초콜릿.
김태형은 대꾸 없이 앙증맞은 주먹 쥐고 클락센 꽝 내리쳤다. 새벽 네 시라서 길거리에 차가 거의 없는데두 불구하고. 빵빵빵빵. 우리 옆 지나던 술 취한 아저씨 깜짝 놀라 자빠졌다. 나는 김태형 씩씩거리는 어깨를 더듬었다. 우리 작년에 초콜릿 키스했잖아. 기억 나 형? 촉촉한 곤약젤리 같은 양 볼이 금세 발갛게 올랐다. 한입에 와구와구 먹고 녹이고 삼키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김태형이 한숨 쉬며 길가에 차 세웠다.
초코맛… 콘돔두 있는데.
뭐라고? 그러니까.
초코맛
콘돔도
있는데
차 속 공기가 분주해졌다. 빨리 빨리 초콜릿 빨리 뜯고 빨리 뜯어서 입에 물고 키스키스키스. 머릿속에선 입술 부대끼고 있는데 실상은 껍질도 벗기지 못 했다. 어제 손톱 짧게 다듬은 탓 손가락이 자꾸 헛나갔다. 빨랑 키스키스키스. 혼자 어른 흉내 내며 느긋이 기다리던 김태형도 답답해 죽겠는지 내 손에 들린 초콜릿 채갔다. 가지런한 치아로 초콜릿 껍질 뜯는 얼굴이 지나치게 선정적이었다. 그러니까그제밤에김태형이저런얼굴로콘돔컵질뜯었다니까. 벌어진 입술 사이로 초콜릿이 사라졌다. 나는 하도 쭈물거려서 더 말랑말랑해진 김태형 양 볼 조심히 쥐었다. 김태형 먼저 다가와 달고 짜고 아름다운 초콜릿 넘겨 줬다. 더디게 녹는 초콜릿이 입 밖으로 흘러 내렸다. 너무너무 아까워! 요번엔 바른 몸가짐의 스물두 살 청년답게 자제하려고 했다. 근데 김태형 슬금슬금 움직여 내 사타구니 더듬는 걸 어떡해. 찐 정국이 치고 올라왔다. 페레로 로셰 통에서 초코맛 콘돔 우수수 떨어졌다.
아 형 안 돼 빨리 집 가자 빨리빨리빨리
빨리 집 가자. 형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