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맴-맴-
더운 여름날 밤. 에어컨도 없는 집에만 박혀있으려니 답답한 마음에 태형이 먼저 정국을 밖으로 불러냈다. 저녁이 되어도 식지 않는 온도 때문인지 산책로에는 사람이 많지 않아 둘은 손을 잡고 걸었다. 태형은 혹여나 아는 사람과 마주칠까 봐 아까부터 계속 주변을 살피는 정국의 팔을 꼬집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아! 라고 한소리 하자 그제야 정국이 피식 웃고 태형을 쳐다봤다. 더워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 티셔츠가 축축해졌지만 더운 것도 잊고 둘은 서로의 이야기를 하는데 바빴다.
"정국아, 저기 봐봐."
"어디요?"
태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바라보니 어린아이가 자신보다 몸집이 더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부모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애가 애를 돌보네. 미소가 절로 나는 풍경이었다.
"우리도 결혼할까?"
또, 또 그 소리예요? 정국이 태형의 말을 받아쳤다. 그러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태형이 틈만 나면 결혼할까, 라며 물었기 때문이다. 정국은 하도 듣다 보니 이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됐다.
"나랑 결혼하기 싫어?"
"그게 아니라... 우리 결혼할 돈도 없어요."
"나 이번에 취직했잖아! 내가 돈 많이 벌어올게. 그니까 나랑 결혼하자."
처음에는 애정표현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것도 한두 번이지. 지긋지긋하다 못해 귀에 못이 박일 지경인 정국은 슬쩍 말을 돌려 화제전환을 시도했다가 태형에게 딱 걸려 된통 혼났다. 그럼에도 꿋꿋이 딴 얘기를 하는 정국을 보고 태형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산책로를 지나 둘이서 자주 가던 커피숍 앞에 도착해있었다. 태형이 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찾았지만 지폐 한 장 없는 지갑은 있으나 마나였다. 어쩔 수 없이 둘은 카페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한 채 그곳에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섰다. 아직 대학생이던 정국은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는 중이고, 태형도 취직한 지 몇 달 되지 않아 수입이 썩 좋진 못했기 때문에 비싼 돈이 드는 데이트는 어려웠다. 그래도 둘은 남부럽지 않은 연애를 했다. 다른 연인들과 다를 바 없이 연애하고, 키스하고, 관계도 맺었다. 결혼하자고 노래를 부르는 태형의 말대로 정국도 속으로는 평생 둘이서 살아갈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준비가 길어지자 정국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겪었다. 태형이 곁에서 위로와 격려를 해준다 한들 그걸로 스트레스가 해소되진 않았고, 태형을 만나면 괜히 성질 부리며 화풀이를 했다. 그러나 맨날 그런 것은 아니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전과 다름없이 태형에게 한없이 다정한 애인이 되었다.
"정국아, 먹고 싶은 거 없어?"
태형은 일이 없는 주말에는 정국이 자취하는 집에 찾아가 밥을 차렸다. 실력이 그다지 좋진 않았지만 정국은 태형이 만든 음식을 입안 가득 꾸역꾸역 집어넣으며 맛있다고 한다. 정국이 억지로 먹으면서까지 칭찬해주자 태형은 요리책도 찾아보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성과를 냈다. 전에는 자취생인 정국이 만든 음식이 맛있었다면 지금은 태형이 만든 요리가 더 맛있다고 장담할 수 있다.
"계란밥이요. 오랜만에 먹고 싶다."
좋아. 태형이 부엌으로 들어갔고, 정국은 멈췄던 포트폴리오를 마저 작성했다. 간단한 메뉴인 만큼 부엌으로 들어간 지 이십 분도 지나지 않아 태형이 정국을 불렀다.
"어때. 맛있어 보이지?"
꽤 먹음직스러운 모양새가 군침을 돌게 하였다. 정국은 고개를 끄덕이고 한입씩 먹었다. 맛있어요. 그릇을 싹싹 비워 먹은 정국은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 자신과 같이 먹지 않은 태형에게 물었다.
"형은 안 먹어요?"
"여기 오기 전에 빵 먹었더니 배가 안 고프네......그나저나 내가 여기 뒀던 약 어디 있어?"
몇 달 전 태형이 소화가 안 된다며 사온 약이었다. 정국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평소 태형이 자신의 집을 찾지 않을 때는 책장 맨 위에 두었다.
"거기 있는 책장 봐요."
태형은 손에 닿을라 말라 하는 약 봉투를 발꿈치를 들어 겨우 꺼내 약을 삼켰다.
"속 안 좋아요?"
"그냥......"
태형이 말을 흐리자 정국은 신경 쓰지 않고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로 가져가 설거지를 했다. 요리도 해줬는데, 설거지까지 시킬 수는 없지 않은가. 정국이 설거지하는 동안 태형은 정국이 쓰고 있던 포트폴리오를 구경했다. 그러다 부엌에 있는 정국의 눈치를 살피고 입을 연다.
"정국아 다음 주에 놀러 갈래? 여름 지나기 전에 바다 갔다 오자."
마침 설거지를 끝낸 정국이 책상 앞으로 왔다. 태형이 눈치껏 자리를 비켜주자 또다시 포트폴리오를 작성하는 데 집중했다.
"바다 갔다 오자. 응?"
스트레스도 없앨 겸 오랜만에 데이트하고 싶었던 태형은 제 나름대로 생각해낸 정국을 위한 계획이었다. 그렇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썩 시원찮다. 여름 다 끝나가는데 무슨 바다예요. 자신의 깊은 뜻이 담긴 계획을 알아주지 못하고 서운한 소릴 하자 속이 상한 태형이 입을 삐쭉 내밀고선 조르기 시작했다. 실은 태형이 몇 달 전부터 자꾸 여행을 가자고 하고, 어떤 때는 시도때도없이 전화를 거는 바람에 정국이 화를 냈던 적이 있다. 처음 사귈 때도 하지 않던 고집을 피우니 정국도 황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지금 바쁜 거 알잖아요. 이번에도 취직 안 되면 형한테 빌붙어 살지도 모른다고요."
정국은 더는 형에게 화를 내고 싶지 않아, '참을 인' 자를 마음속으로 세 번 새기고 말했다. 그러나 태형은 자꾸만 정국의 속을 긁어내 없는 성질도 나오게 했다.
"하루종일 일 찾는 건 아니잖아. 잠깐 다녀오는 것도 안 돼?"
"아, 쫌."
짜증이 난 정국이 자신에게 들러붙는 태형을 발꿈치로 밀어냈다. 짜증 나게 굴지 마요. 확실히 말이 험해진 것을 느낀 정국은 곧바로 사과했다.
"제가 지금 다른데 신경을 쓸 여유가 없어요. 말 심하게 해서 미안해요."
"미안하면 나랑 같이 바다 가자."
저놈의 바다. 상황파악이 안 되는 건지, 모른 척하는 것인지. 태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휴대폰을 꺼내 검색창에 바다를 치고 사진을 보여주며 배시시 웃는 모습은 정국의 신경을 더 자극할 뿐이었다. 하지 말라는 말에도 눈앞에다 대고 사진을 들이대니 참는 것도 한계였다. 집안 사정상 들어오는 돈이 없으면 곤란한 정국은 하루라도 빨리 취직할 곳을 찾아야 했는데, 아무리 애인이라도 옆에서 부추기니 욱하고 성질이 났다.
"하지 말라고요!"
어금니를 꽉 깨물다 버럭 하고 소리를 치자 태형의 표정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분을 참지 못한 정국은 태형의 짐을 집어 들어 태형에게 던지며 말했다.
"나가요. 그리고 우리 시간 좀 가져요. 다시 연락할 테니까 그때까지 집에 찾아오지도 말고요."
태형이 우물쭈물 발을 떼기 망설이는 낌새가 보이자 정국이 태형의 등을 꾸욱하고 밀었다. 나중에 가서 태형에게 했던 자신의 모든 짓을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현관문 앞까지 떠밀려 신발장에 선 태형의 얼굴은 눈가가 빨개져 눈망울에 있는 눈물이 금방이라도 똑하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안녕.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현관문이 열렸다가 닫힌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국은 태형을 금방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 윽."
화장실에서 누군가의 신음이 새어나온다. 복통을 호소하던 이는 변기 커버를 붙잡은 채 변기 안으로 머리를 숙였다. 기침과 동시에 변기에는 피가 떨어졌고, 거친 숨소리가 울렸다. 태형은 맨손으로 입 주변을 닦았다. 그리고선 손에 묻은 피를 멍하니 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씻어냈다. 입을 헹구고 거울을 보자 자신의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썩 좋지 못한 모양새다.
태형은 몇 달 전 가슴에 통증이 느껴져 찾아간 병원에서 진찰받은 의사의 말을 떠올렸다. 길어야 반년. 정말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청천벽력같은 말을 태형은 직접 들었다. 의사는 폐암 말기에 이어 뇌 전이로 치료가 힘들다고 했다. 게다가 치료 비용까지 어마어마하게 들자 태형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병원에서 나왔다. 감당할 수 있는 비용도 아니었고, 치료를 버틸 자신도 없었던 태형은 자신의 병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아니, 꺼낼 수가 없었다. 치료는 목숨연장을 하는 것일 뿐. 완치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태형은 갑자기 일을 그만두면 의심받을까 봐 평소대로 주말에만 정국의 집을 찾아갔다. 그리고 정국에게 마지막으로 바다에 가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태형의 시한부 소식을 모르는 정국에게 태형을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욕심 아닌 욕심이었다. 태형의 제안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마음이 더 시큰거렸다.
그렇게 태형은 혼자 고통을 짊어진 채, 정국과 연락을 끊었다.
치료를 받지 않은 태형의 상태는 빠르게 악화됐다. 호흡곤란은 물론이고 심한 날에는 극심한 두통과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다. 진통제 하나로 통증을 완화하는 것도 한계에 이르러 태형은 이제 정상적인 생활이 힘들었다. 날이 갈수록 죽음이 자신을 조여오고 있다는 느낌이 선명했다. 괜찮을 거라 자신을 위로해 봤지만 위로 되지 않았다. 오히려 깊게 각인되어 암담한 현실에 괴로워 했다.
힘들게 들어간 회사는 결근하고, 혼자 있는 방에서 우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무교였던 태형은 매일 밤 살려달라고 하나님께 빌 정도로 정신이 쇠약해져 갔다. 죽고 싶지 않아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리 없는 걸 알고 있기에 더 간절했다.
"선생님, 죽을 때 많이 아프겠죠?"
아픈 건 이제 싫은데.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어떤 말도 위로 되지 않을 것이다. 여러 번 치료를 권유해봐도 어차피 죽을 거라는 말만 되풀이되어 돌아와 의사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의사로서 병원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환자를 지켜보는 일이란 절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의사는 잠시 바깥바람을 쐬고 오라 해도 말을 듣지 않는 환자가 안타깝기만 했다.
태형이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가족이나 지인이 찾아온 것을 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담당 간호사가 연락할 사람이 없느냐고 물으면 태형은 없다고 배시시 웃기만 했다. 부모없는 태형이 연락할 가족은 정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자 태형은 육체적 고통과는 별개로 외로움을 느꼈다. 몸이 아파서. 보고 싶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태형은 속이 타들어 갔다. 간호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끝내 태형은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으로 지내던 친구에게 연락했다. 과는 달랐지만 같은 대학교에 들어갔던 친구라 졸업한 후에도 쉽게 연락이 닿았다. 그는 태형이 시한부인 것을 밝히자 잠시 동안 말없이 통화를 이어갔다. 그리고 병원 주소를 듣고선 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태형이 있는 병실에 찾아왔다.
"......빨리 왔네."
뛰어오기라도 했는지 그의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거기에 서 있지 말고 들어와. 준아."
한유준. 그가 바로 태형의 절친이라 불리는 인물이다. 태형은 그의 이름을 발음하기 힘들다며 그를 '준'으로 자주 부르곤 했다.
유준은 병실 문을 닫고 병원복을 입고 비쩍 마른 태형에게 다가갔다. 태형은 웃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반가운 마음에 표정이 좋아 보이는 것은 아니었다. 울 수 없으니까 웃고 있는 거다. 속으로는 울고 있는 것이 눈에 훤했다. 안쓰러운 친구의 모습에 유준은 주먹을 꽉 쥐었다.
"차라리 울어."
그가 태형을 마주하고 내뱉은 첫마디였다. 겨우 참고 있었는데. 태형은 유준의 얼굴을 보고 코웃음을 쳤다. 자신보다 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멋진 척은 혼자 다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아. 얼마 지나지 않아 태형이 울기 시작했다. 병실 침대에서 제대로 앉지도 못하고 웅크린 자세로 머리를 침대에 처박았다. 보고 싶었다. 누구든지 보고 싶었다. 자신의 처지에 한탄하고 같이 슬퍼해 줄, 꽉 조인 가슴을 터뜨려 줄 사람이 너무나도 필요했다. 태형은 여러 감정이 뒤섞여 옆 병실까지 들릴 정도로 서럽게 울음을 토해냈다. 조심스럽게 자신을 보듬어주는 손길을 받으며 말이다.
*
[고객님의 전화기가 꺼져있어 삐 소리 이후 음성]
뚝.
정국이 태형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건 횟수가 50통이 넘었다. 연락이 닿지 않자 안 되겠다 싶어 집까지 찾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안에서는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날 태형을 내쫓는 게 아니었다. 그제야 밀려오는 후회에 정국은 한숨을 쉬며 돌멩이를 걷어찼다. 벌써 태형을 못 본 지 두 달이 넘어가는 날이 되었다. 주변 사람에게 물어보려 해도 태형의 소식을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하나같이 모르겠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마음에 과 동기들한테 전부 연락해봐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태형이 먼저 자신에게 연락하길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포기하려 할 때쯤 처음 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여보세요."
[전정국씨 맞나요?]
"네. 접니다."
상대방은 아,하는 탄식을 내뱉고 말을 이어갔다.
[저는 태형이 친구, 한유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갑자기 연락드린 건...]
느낌이 싸했다. 그리고 나쁜 예감은 항상 틀리지 않는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한유준이라는 자가 말했다.
[지금 당장 병원으로 와주셨으면 합니다.]
정국은 무슨 소리인가 싶으면서도 발걸음은 이미 병원을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급하게 택시를 잡고 끊지 않은 통화를 계속했다. 유준은 자초지종 설명을 하며 태형의 상태를 알려주었다. 폐암에 더불어 뇌 전이로 이어졌다고. 정국은 그와의 통화를 끊고 병원에 도착할 때까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닌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병원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잔돈은 됐습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병원 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그러나 김태형이라 적힌 병실 문앞에 서자 문을 열기 망설여졌다. 정국은 꿈이길 빌며 천천히 병실 문을 열었다.
불행 중 다행이라 해야할 지, 문을 열고 보이는 것은 침대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태형이었다. 태형은 정국을 보고 놀란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읽고 있던 책을 덮고 침대에서 나왔다.
"......뭐해요. 여기서."
두 달만에 본 애인의 모습은 조금 말라 보였다. 얼굴을 보니 한편으로는 안심이 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정국의 눈에 태형의 손등에 꽂힌 주삿바늘이 아른거린다.
"너가 왜 여기 있어."
"내가 불렀어."
유준이 병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기로 했잖아."
유준이 먼저 고개를 숙이자 정국도 그에 고개 숙여 인사했다. 서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서로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태형의 친구이고, 태형의 애인이다.
태형은 자신을 보며 웃음을 지어내 보이는 유준에게 주먹을 선사했다. 멋대로 말한 벌이야. 유준은 태형에게 맞은 팔을 매만지고 아프다는 시늉을 했다. 당연히 힘도 없는 애가 쥔 주먹이 아플 리 없었다. 눈치를 살피던 유준은 일이 생겼다며 슬쩍 자리를 비켜주었다. 유준이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 나머지는 둘이 알아서 해낼 일이었다.
둘만 남은 병실은 조용했다. 정국은 태형을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시선을 바닥에 두었다. 태형도 아무 말 없이 침대에 걸터앉아 죄 없는 시트만 꼭 쥔 채 입술을 깨물었다.
전날밤, 병원에만 갇혀 사는 태형을 보다 못한 유준이 태형에게 찾아와 쓴소리를 했었다. 미련 남길 생각 말고 하고 싶은 거 전부 하라고. 혼자 끙끙 앓아봤자 알아주는 사람 없다면서 울며 분을 냈다. 아픈 건 태형인데, 우는 건 한유준이었다. 태형은 한참을 생각하다 유준을 보며 쓰게 웃어 보였다. 그럴까.
하지만 막상 정국을 마주하니 눈앞이 깜깜했다. 헤어지자고 온 것이면 어쩌나 싶어 입을 떼기가 어려웠다.
"우리 바다 가요."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고민하던 태형은 정국의 말에 두 눈을 깜빡이고 정국을 바라봤다. 눈가가 시뻘게져 부릅뜬 정국의 눈이 웃기고 슬펐다. 태형은 피식 웃으며 좋다고 일어섰다. 곧바로 옷도 갈아입고 담당 간호사를 만나러 갔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저 잠시 다녀올게요. 간호사는 태형의 옆에 서 있던 정국과 눈이 마주치고 미소로 마중했다. 잘 다녀오라는 의미였다. 더 복잡한 뜻이 담겨있을지라도 지금은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아 춥다."
기차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바닷가 주변에 도착했다. 아직 겨울이 되려면 한참 남았는데, 공기가 차게 불어왔다. 태형이 팔을 매만지자 정국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입혀주었다.
"아프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춥게 입어요."
정국의 다정한 모습에 그저 좋다며 웃는다. 얼굴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 태형과는 달리 정국은 속이 답답해서 웃지 못했다. 바다에 와서는 태형이 촐랑촐랑 헤집어 다니며 정국에게 물을 튀겼다. 같이 놀자는 천진난만한 행동에 정국은 잠시 생각을 접고 태형이 바라는 대로 해주었다. 이미 흠뻑 젖은 태형을 안아 들어 같이 물속에 빠졌다가 나오기도 하고, 바다가 붉게 물드는 풍경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 눈이 맞아 키스하기도 했다. 주변인들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았다. 둘만 있는 것처럼 진한 키스를 나눴다.
온 세상이 깜깜해지고 나서야 호텔을 찾아 들어갔다. 엣취. 찬물에 오래 있다가 젖은 채로 바람까지 맞았으니 감기에 걸릴 만도 했다. 태형이 벌벌 떨자 정국은 욕실로 들어가 따뜻한 물을 틀었다. 그리고선 태형의 옷을 벗겨 아무렇게 내던져두고 샤워기로 태형을 씻겼다. 얼굴부터 시작해서 겨드랑이, 엉덩이까지 꼼꼼히 씻겨 만졌다. 태형은 서슴없이 만지는 손길에 흠칫 놀라기도 했지만 정국은 묵묵히 제 일을 했다. 추위에 부르르 떨다 따뜻한 물에 몸이 녹자 태형은 본인 옷은 벗지도 않고 자신을 씻기는 정국을 바라봤다. 조용하다 싶었더니 역시나 눈에 눈물이 고여있었다.
"정국아, 울어?"
"......"
"내가 미워?"
"......네."
눈물이 똑하고 떨어졌다. 태형은 물에 젖은 손으로 정국의 두 눈을 닦아주었다. 닦은 건지 물을 얼굴에 적신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정국은 더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울지마."
이번에는 정국이 태형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붉은 볼 위로 입술을 갖다 대자 태형은 간지럽다며 웃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울고 있었다. 울지 말라고 한 사람은 태형인데, 태형이 울고 있었다. 그때 깨달았다. 태형은 정국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울지말라 한 것을. 바다에 오기 전부터 웃는 모습만 봐서 태형이 얼마나 아픈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정국은 먹먹해져 오는 가슴을 툭툭 쳤다. 그리고 샤워기를 끄고선 커다란 수건을 태형의 몸에 돌돌 말아 꽉 껴안았다.
"형 우리 결혼할까요?"
훌쩍. 코 먹는 소리가 욕실을 매웠다. 태형은 꼼짝없이 정국의 품에 안겨 코를 닦지 못하는 탓에 콧물이 입까지 흘러내려 대답은커녕 입을 벌리는 것조차 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이려 해도 콧물이 점점 내려가 턱까지 흘러내려 그러지 못했다. 정국은 태형이 대답이 없자 무슨 일인가 싶어 팔에 힘을 풀고 태형과 얼굴을 마주했다.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정국은 태형을 보고 참다못한 웃음을 흘렸고 태형은 울상인 채로 정국의 다리를 퍽하고 찼다.
"으브브."
얼른 닦아달라는 재촉에 정국은 휴지를 뜯어 태형의 코를 닦아주었다. 시원하게 코를 푼 태형은 수건으로 돌돌 말린 상태로 침대까지 옮겨졌다. 그것도 짐짝처럼 정국에게 안겨서 말이다.
티내지 않았지만 태형은 그리 좋은 상태가 아니었다.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져 왔고 숨을 쉬기도 어려워 병원에 가야 했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았다. 조금만 더, 더. 필사적으로 버티며 정국을 눈에 담았다. 애초에 병원에서 나올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간호사도 알고 있었을 터인데, 태형은 쓴웃음을 입에 담았다. 마지막 발버둥이었다. 더는 몸이 버티지 못한다.
태형은 침대에 눕혀지자마자 고통을 호소했다. 태형이 앓는 소리를 내며 아파하자 정국은 허둥지둥 구급차를 불렀다. 그리고 그가 아프다는 것을 그제야 실감했다. 한순간에 멀어져가는 태형을 눈앞에서 보고도 정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응급실은 늦은 새벽임에도 분주했다.
"보호자 맞습니까?"
흰 가운을 입은 의사가 정국을 불렀다. 정국을 부른 이유는 아마 한 가지밖에 없을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까."
정국이 먼저 등을 돌렸다. 태형의 병실로 가려던 것이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아, 정국은 한참 동안 자리에서 떠나지 못했다.
정국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땐 한유준이 태형의 곁에 있었다. 산소호흡기를 찬 태형은 눈을 뜨지 않았다. 유준이 태형의 손을 꼭 붙잡아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아무런 반응이 없다.
그날 이후로 정국은 태형이 잠이 든 것이 맞는지, 하루에도 몇십 번씩 확인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숨이 멎을까 봐 걱정돼서 정국은 잠시라도 병실에 자리를 비우는 것을 자제했다.
태형은 나날이 수축해져 갔다. 식사를 거부하고, 말을 하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어떤 날은 정국을 보고 누구냐며 물었다. 그럴 때마다 정국은 웃으며 말했다.
"형. 우리 결혼할 사이예요. 저 정국이."
기억안나요? 태형은 가끔 기억을 잃었다. 그러다 제정신이 돌아오면 정국을 불렀다. 대답을 바라는 부름은 아니었다. 입에 담아보고 싶어서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정국은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태형이 아프다고 몸 부름을 칠 때도 정국은 그 여린 손을 두 손에 꼭 담았다. 더 많이 아껴줄걸. 더 사랑할걸. 정신을 잃은 태형을 보고 정국은 후회만 했다. 그리고 줄 수 있을 때 더 많이 주자고, 태형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오늘은 며칠인 걸까. 태형이 눈을 뜬 것은 아직 해가 뜨기 전 새벽이다. 정국은 병실 바닥에 이불을 깔아 누워서 자고 있었다.
"무서웠는데."
태형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못하겠지만 입을 열었다.
정국아. 정국아. 더이상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입만 벙긋할 뿐이다. 이렇게나 무기력해진 자신이 미웠다. 무서웠는데, 무서운데. 아직 나는 죽고 싶지 않은데. 그러나 뜻대로 풀리지 않는 것들이 많아서 서글펐다. 태형은 아직도 제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현실을 부정하고, 고통스러울 때마다 절망하고. 그것들이 반복되다 보면 원치 않아도 어느새 끝에 닿아있었다. 자신이 바라던 소망과는 거리가 먼 현재가 있었다. 가슴이 아파져 왔다. 자기 자신을 떠나보낼 시간이 더 필요했는데, 시간은 멈춰주지 않았다.
그런 태형의 외침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 정국이 몸을 뒤척였다. 잠에서 깬 것이다.
"태형이 형, 일어났어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태형은 얕은 미소를 지었다. 정국이 힘없이 쓰러지는 태형을 부축해 앉혀주자 태형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창문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을 보았다. 그곳에는 태양이 떠오르고 있었다. 아름답다면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좋아해요."
마지막을 직감하듯 정국이 말한다. 한쪽 어깨가 무겁게 젖어 왔지만 태형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닿아오는 온기에 속으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나도 좋아해. 정국아."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식은 언제 올릴까요."
형. 나지막이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끝까지 태형을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