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물고기 떼를 본다고 했다.
비가 온다. 오전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어둑어둑한 창밖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책상에 처박았다. 책상과 마주 본 얼굴이 눅눅해 짜증이 났다. 애당초 비를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거니와 말도 안 되는 말을 진지하게 지껄이던 그 말간 얼굴이 생각나서 더 그랬다. 비가 오는 날에는 정말 물속에 잠긴 기분이 들어서, 자신조차 물고기가 된 것 같아서 싫다는 너의 말을 듣고서. 내 속도 모르고 늦가을 단비는 그칠 생각이 없다. 너를 처음 만난 그 해 봄의 끝자락에도 이렇게 속절없이 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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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정국 김태형
물고기를 죽이는 방법
(BGM; 최영태 - Present, Merry Christmas)
정국아, 우산 없어?
그게 처음으로 들어본 김태형의 목소리였다. 김태형과 나는 초면이었고 김태형은 내 이름을 알고 있었다. 봄비가 한창이던 늦봄의 어느 날, 아침에 늦잠을 자서 급하게 나오느라 우산을 챙기지 못한 날이었다. 나는 중앙 현관 계단에 걸터앉아 이 비를 뚫고 뛰어갈지 비가 어느 정도 잦아들 때까지 기다릴지 고민하고 있었다. 나를 부른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나보다 한 학년 위의 명찰 색과 김 태형이라는 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저요?
그럼 정국이가 여기 너 말고 또 있어? 마치 절친이라도 부르는 양 친근하게 이름을 부른 김태형은 내게 지금 할 일이 없냐고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김태형은 잘 됐다는 듯 환하게 웃으며 내게 제 심부름을 함께해줄 것을 부탁했다. 애초에 나는 그다지 친절한 편이 아니었으며 아무리 선배라고 하더라도 초면인 그의 부탁을 들어줄 의무도 딱히 없었다.
허나 지금 생각해보니 이때부터 그랬던 것 같은데 나는 항상 김태형의 부탁을 선뜻 거절하지 못했다. 김태형의 눈에선 물 냄새가 났다. 그런 김태형의 눈을 보고 있으면 그 누구도 감히 그에게 거역할 수 없으리라. 나는 어딘지 모를 처연함을 담은 그의 눈빛을 무시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충분히 혼자서 해낼 수 있는 일을 김태형은 굳이 나에게 저를 도와 달라 부탁했고, 나는 그걸 거부하지 못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딱 같은 반 학우들끼리 할 법한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며 심부름을 마치고 김태형은 나에게 잠시만 기다리라고 손짓했다. 잠깐의 대화를 통해 내가 알아낸 것은 김태형이 나보다 두 살 많다는 것. 유학을 다녀왔다고 했다. 가방을 뒤적거리던 김태형이 꺼낸 것은 파란색 줄무늬가 그려진 3단 접이 우산이었다.
우산 없지? 씌워줄게. 같이 가자.
애초에 김태형은 이러려고 날 불러 세운 건지도 모른다. 친하지도 않은 애가 우산도 없이 학교에 혼자 남아있는 꼴을 못 봐서. 김태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
비는 그냥 맞고 갈만한 수준이 아니었고 오히려 우산을 써도 잔뜩 젖을 게 뻔했지만 나는 김태형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집 어디 방향이야? 묻는 김태형에 그냥 사거리까지만 씌워달라고 했다. 김태형은 잠시 고민하더니 그래?라고만 대답했다. 그래요. 나는 의미 없는 대답을 김태형에게 건넸다. 김태형이 우산을 들고서 내 오른쪽에 선다. 잘 몰랐는데 나란히 서니 키가 정말 비슷한 것 같았다. 좁은 접이식 우산 안에 건장한 남고딩 둘이 몸을 구겨 넣으니 어깨가 잔뜩 맞닿는다. 아무리 내 오른쪽과 김태형의 왼쪽을 부대껴도 우산 밖으로 삐져나온 서로의 어깨가 조금씩 젖어갔다. 김태형이 우산을 썼는데도 왜 다 젖는 거냐며 호들갑을 떨며 이미 0에 수렴한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려 한다.
그는 또래 남자아이들이 동성의 친구에게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을 하곤 했다. 물론 이건 김태형이 날 이성으로 본다든가 그런 게 아니고 그냥 그렇게 태어난 인간이라서 그렇다. 김태형을 ‘보통’으로 정의하는 일은 수능 만점보다 더 어려울 거다. 나는 멍청하게도, 그를 ‘보통’으로 정의하고자 했나 보다.
여기서부턴 그냥 뛰어가면 돼요.
안 돼. 데려다줄게.
나는 사거리에 도착해 김태형을 보내려 했지만, 단호하게 거절한 김태형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분명 우리 집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게 맞긴 했지만 내가 앞장서서 걷고 있는지 김태형이 앞장서서 걷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거리에서 조금 걸어 나가 횡단보도에 나란히 서서 신호등이 바뀌는 것을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콰드득, 우산을 부술 듯이 내리는 빗소리에 김태형이 아주 희미하게 들리는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진짜 비 오는 날이 싫어.
나도 물고기가 된 기분이야.
독특하네요. 생각이.
나 물고기가 보이거든. 얘네 지금도 여기 헤엄치고 있어.
물고기? 순간 빗소리에 잘못 들었나 했다. 장난을 치는 건가? 그러기엔 김태형이 너무 진지했다. 신호등은 진작 초록불로 바뀐 지 오래되어 깜빡이는 중이었고, 김태형은 정말로 뭔가가 보이는 사람처럼 허공을 둘러보고 있었다.
물고기가 보인다구요?
응. 유학도 그래서 다녀왔어. 정신병인가 해서 치료하려고.
잘 안됐지만. 신호등이 다시 빨간 불로 바뀌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김태형의 고백에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모르겠던 참이었다. 굳어서 눈알만 굴리고 있는 나를 본 김태형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며 내 어깨에 기대듯 턱을 얹어 놨다. 정신병이라고 뭐 별거 아니야. 너무 그러지 마. 김태형은 너스레를 떨었지만 나는 아직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제대로 인지조차 못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김태형과 나는 초면이었고, 이 이야기는 초면인 사이에 할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원래 이런 거 말 안 하는데.
...
순간 너한테는 말해도 될 것 같았나 봐. 비밀이야.
... 왜 보이는 건지 물어봐도 돼요?
글쎄. 전생에 상어였나? 나한테 잡아먹힌 물고기들의 원한일지도.
끝까지 김태형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는 웃을 수 없었다.
∫
김태형은 비 오는 날을 싫어했다. 물고기 떼를 본다고 했다. 본인은 환각이 보이는 정신병이라고 했지만 평소엔 전혀 환각이 보이는 사람처럼 굴지 않았다. 일부러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하는 건가 싶었지만 어릴 때부터 보였던 것들이라 익숙하기도 하고 평소엔 그냥 수족관에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만 비 오는 날은 본인도 그 수족관에 빠진 물고기가 된 기분이라 싫다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건 나한테만 알려주는 비밀이라고 했다.
그날을 기점으로 김태형과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김태형은 제 비밀을 나에게 알려줌으로써 나와의 관계를 시작했고, 제대로 된 통성명은 그 이후에 했다. 김태형과 나는 서로 비슷한 면이 꽤나 많다고 생각했다. 김태형은 나보다 한 학년 위라서 지금 수험생이지만, 대학에 갈 생각은 없다고 한다. 내 이름을 알게 된 계기는 최근 내가 수학경시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던 날 처음 알게 되었다고 했다. 잘생긴 애가 공부도 잘하는구나, 하면서 기억에 남았다면서. 그 말을 듣고 잘생긴 건 형이고요.라고 하자 김태형은 킥킥대며 그냥 둘 다 잘생긴 걸로 하자고 했다.
김태형은 공부에 관심이 없었으나 영어는 잘했다. 생긴 것도 이국적으로 생겼는데 영어까지 잘하니까 더 멋있다고 생각했다. 김태형은 유학의 힘이라며 나보고 꼭 1년이라도 유학을 가보라는 얘기를 덧붙였다. 나는 나중에 같이 가자고 했다.
김태형은 사진을 잘 찍었다. 대학은 안 가도 사진 공부는 해보고 싶다고 했다. 어느 날은 김태형이 내 사진을 찍어주겠다며 필름 카메라를 가져왔는데, 프로처럼 필름을 착착 갈아 끼우는 모습도 멋있었고 예술가처럼 나를 열정적으로 찍어대는 모습도 멋있었다. 그리고 김태형이 현상해서 선물해준 내 사진은 더 멋있었다. 김태형이 보는 나는 이렇구나. 왠지 쑥스럽게도 하고 뭐, 그랬다.
김태형은 목소리가 좋았다. 곱상하게 생겼지만 선이 굵은 얼굴에 잘 어울리는 저음을 가지고 있었다. 노래도 잘해서 가끔 흥얼거리는 허밍도 듣기 좋았다. 둘이 노래 취향도 비슷해서 더 좋았다. 이렇게 나에게만 들릴 듯이 작게 읊조리는 김태형의 목소리는 언제까지나 나만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김태형은 동물을 사랑했다. 길을 걷다가 강아지나 고양이를 만나면 한참을 눈을 떼지 못했다. 동물들도 김태형을 꽤나 따르는 편이라 애교 많은 길고양이라도 만나는 날에는 그 자리에 한참을 발이 묶여있기 일쑤였다. 딱히 동물뿐만이 아니라 그는 세상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을 사랑했다. 난 길가에 핀 민들레를 보고도 꺾어들지 않고 자신이 무릎을 꿇어서 민들레 홀씨를 부는 사람은 처음 봤다. 나는 그 모습이 퍽이나 사랑스럽다고 생각했고 이때 김태형이 그날 내게 베푼 호의에 대해 이해했다. 이 사람은 성정이 이렇게 태어나서 그랬던 거구나. 그리고 아마 이때쯤 내가 김태형을 좋아하고 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했다. 왜냐면 모두에게 상냥한 그의 모습을 보고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으니까. 우리의 첫 만남이 나라서 특별했던 게 아니고, 그때 그 중앙 현관에서 우산 없이 서성이던 사람이 누구든 간에 그랬을 것 같았으니까. 사랑에 빠진다는 감각은 생각보다 무덤덤했고 특별할 것 없었다. 설렘보다는 서글픔이 먼저였다. 김태형은 그대로였지만 나는 그의 한결같은 행동에 행복하기도, 슬프기도 했다. 그리고 왜 하필 나는 남자인 김태형을 좋아하게 됐을까 하는 얕고 깊은 고민들도.
김태형은 나를 본인과 가장 친한 후배라고 말했으며 그의 마지막 겨울방학 내내 나를 불러냈다. 나는 종종 그와 함께 피시방에 가 게임을 하기도 했고 나를 자기 집에 초대해 치킨을 시켜놓고 밤새 축구를 보기도 했다. 김태형은 혼자 살았다. 부모님은 파리에 계신다고 했다. 본인이 유학을 다녀왔던 도시도 파리였다고 말했다. 김태형은 나에게 물고기 얘기를 해준 그날 이후로 처음 그 물고기 얘기를 다시 꺼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비가 많이 내려서 짜증이 난다고. 바로 옆에서 헤엄치고 있는 수백 마리의 물고기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자기가 상어라도 돼서 다 잡아먹어 버리고 싶다고. 김태형 말대로 이번 해 겨울은 유난히 따뜻해 비가 많이 내렸다. 나는 김태형과 함께 하는 비 오는 날이 좋았다. 김태형이 알면 짜증 날법도 한 말이지만 나만 알고 있는 김태형의 비밀이라는 건 나에게 있어서 썩 기분 좋은 것이었다. 나는 내 감정을 굳이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했지만 상대가 김태형이라면 얘기가 조금 달랐다. 내가 남자를 좋아하게 된 것을 숨기고 싶은 게 아니었다. 내가 형을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으면 했다.
김태형은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부터 1월 중순까지 파리에 다녀올 것 같다고 했다. 김태형은 연말에 있는 자신의 생일에 나와 함께하지 못하는 대신 둘이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하자고 했다. 나는 그날 김태형 집에서 처음으로 술을 마셨다. 김태형은 이미 성인이었기 때문에 학생 신분을 숨기면 언제든 술을 마실 수 있었지만 술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도 지금 아니면 언제 마시냐며 나에게 술을 권했다. 우리 둘은 치킨과 피자를 시켜놓고 고작 과일 소주 두 병에 취해 밤새도록 낄낄댔다.
그리고 김태형이 졸업하던 그 졸업식 날조차 비가 내렸다. 그날 김태형의 주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으며 나는 그 꼴이 꽤나 김태형의 물고기들 같다고 느꼈다. 저 형은 물고기한테도, 사람한테도 인기가 많구나.
어! 즌정구기!
아, 형. 졸업 축하해요.
고마워. 이제 집에 가는 거야?
뭐... 아마도요. 이따 과외 있어서.
나랑 밥 먹고 가지. 김태형은 퍽이나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입꼬리만 위로 살짝 늘여서 웃어 보였다. 됐어요. 친구들이랑 먹으러 갈 거면서 무슨. 괜히 퉁명스럽게 그의 권유를 거절하고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내밀었다. 김태형이 고맙다며 입을 네모 모양으로 만들며 히히 웃어 보인다. 그에 손에 들려있는 꽃다발은 내가 전해준 것까지 합해 족히 대여섯 개는 되어 보였다. 나는 그중에서 내가 전해준 꽃다발이 가장 예쁘다고 생각하며 돌아섰다. 내일은 나랑 밥 먹자고 해야지.
그리고 나는 그날 이후 김태형과 연락이 끊겼다.
나는 내가 그와 특별한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확신했지만 그는 그런 확신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방적으로 나와의 관계를 끊어냈다. 맞다. 김태형은 보통으로 정의할 수 없는 인간인데. 우습게도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나는 김태형이 나를 떠난 후에야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래, 김태형은 그런 사람이었지. 하는 것들 말이다. 졸업식 날 보낸 카톡은 아직도 1이 사라지지 않은 상태였고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어도 연락을 받지 않아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기계음만 반복해서 울렸다. 처음에는 바쁜 일이 있나 보다 했는데 일주일쯤 됐을 때 괜히 걱정이 되어 집으로 직접 찾아갔다. 대문 앞에는 광고 전단지가 꽤 여러 개 붙어 있었고 내가 초인종을 열두 번 눌러도 김태형은 문을 열어주지 않았다. 세 번째 김태형의 집에 찾아갔을 때, 그제야 김태형이 사라졌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이 인간 뭐 하자는 거지. 솔직히 이런 생각이 먼저 들었다. 사귀던 사이도 아닌데 괜히 잠수 이별 당한 느낌. 고백도 안 하고 차인 기분. 차라리 고백이라도 했으면 이만큼 억울하지나 않았을 거다.
형, 형은 그때 왜 나한테 형의 비밀을 알려준 거예요?
눈이 내리는 소리에 내 독백이 파묻힌다. 그리고 정적. 작년의 사계절을 나와 함께한 김태형은 이번 연도는 함께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돌연 사라졌다. 아무리 수소문해도 김태형에 대한 얘기는 들을 수가 없었고 봄방학도 끝나가고 있었다. 김태형이 없어도 세상은 굴러갔고 내 일상은 평소와 다를 것이 없었다. 방학 동안 과외도 열심히 했고 김태형과 다니던 피시방도 가끔 혼자 갔다. 며칠 전엔 가족들과 일본에도 다녀왔다. 모든 게 평소와 다를 것 없었고, 김태형도 없었다. 그냥 그뿐이었다.
∫
새 학기가 시작되고 나도 수험생이 되었다. 나는 김태형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나 돼서 굳이 새 친구를 사귈 필요를 못 느꼈으며 그저 공부에만 매진했다. 하지만 김태형은 예고도 없이 내 삶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곤 했다. 예를 들면 비 오는 날. 비 오는 날은 항상 김태형과 물고기 생각이 났다. 김태형이 보던 물고기는 무슨 종류였을까, 어떤 식으로 보이는 환각이었을까, 그리고... 지금 김태형은 이 비를 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라든지. 수험생이라 잡생각은 집어치우고 공부에 집중해야 하는데 장마철엔 정말이지 환장할 노릇이었다. 김태형이 있을 때는 자신의 비밀을 나에게만 말해줬다는 게 내심 기분 좋은 일이었는데, 김태형이 없는 지금은 굳이 이런 얘기를 왜 나한테 말해서 나까지 비 오는 날이 싫어지게 했는지 김태형이 밉기도 했다.
김태형이 없어도 굴러가던 내 세상은 장마철이 끝나자 가속까지 붙어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체감조차 할 수 없었다. 지나온 가을은 무미건조했고 겨울의 시작은 따가웠다. 그래, 나는 차라리 춥고 건조한 계절이 계속되는 것에 감사했다. 비 오는 날에는 김태형 생각이 더 나니까. 사실 나는 김태형을 알고 지낸 1년보다, 김태형 없이 지내온 1년이 오히려 더 김태형이 간절하게 됐다. 있다가 없으면 그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지는 게 당연하지만 김태형의 빈자리는 더 절실하다. 나는 김태형에게 좋아한다는 감정을 처음 느꼈을 때-그것도 남자를 좋아한 건 처음이었는데도- 꽤 덤덤했기 때문에 의외로 그렇게 특별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틀렸다. 특이하지 않다고 해서 특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수능 시험은 평소대로 봤다. 아쉬움도 후련함도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살면서 해야 할 수많은 일들 중 하나가 끝난 정도의 기분이었다. 수능을 본 뒤로는 시간이 더 빨리 갔다. 정시 지원 원서를 접수하고 포트폴리오를 준비했다. 나는 원래 기계공학과를 가려 했으나 희망학과를 사진과로 바꿨다.
그해 크리스마스엔 눈이 내렸다. 12년 만의 기록적인 폭설이었다. 뉴스에서는 항공편이 모두 마비되었고 공항도 폐쇄되었다며 하루 종일 날씨에 대한 얘기만 흘러나왔다. 작년에는 비가 많이 내리더니 올해는 눈으로 난리네. 중간이 없는 날씨에 혀를 차며 TV를 껐다. 방학 내내 이렇게 눈이 많이 오면 어떡하지라는 쓸 데 없는 고민을 하다가 그럼 그냥 집에 처박혀서 게임이나 원 없이 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
누군가 초인종을 마구 누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부모님은 그저께부터 일본으로 여행을 가셨고 나는 집에 혼자 남아 밤새 게임을 하고 늦은 오후에 일어나는 폐인 생활을 하고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시간을 확인하자 아침 7시였다. 눈을 붙인 지 고작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 새벽에 대체 누구야... 짜증을 내며 간신히 몸을 일으키고 현관 앞으로 나갔다. 누구세요. 문 앞의 사람은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초인종을 눌러댔다. 뭐 하는 사람이야.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진 나는 욕이라도 해줄 심산으로 문을 벌컥 열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
히, 미안 정국아. 너무 늦었네.
12월 30일이었다.
저번엔 생일 파티 대신 크리스마스 파티했었는데. 맞지.
...
이번엔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 내 생일 파티하자!
... 아니, 형. 대체, 아니,
야아, 나 물고기 다 잡아먹고 왔어. 원래 크리스마스에 오려고 했거든. 근데 눈이 너무 많이 와가지구.
날씨가 무슨 중간이 없어~ 문 앞에 서서 으쓱이던 김태형이 내 눈치를 살피며 현관 문틈 사이로 몸을 들이밀었다. 나는 그런 김태형을 한참이나 멍하니 쳐다보다가 그를 소파에 앉히고 속에 담아뒀던 질문을 와르르 쏟아냈다. 김태형은 내 수많은 질문에도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성실히 답변했다. 김태형은 졸업식 당일 조금 늦게 한국에 도착하신 부모님 손에 붙들려 바로 파리로 떠났다고 했다. 정말 거짓말 같겠지만 휴대폰을 파리 공항에서 잃어버려서 번호도 기억이 안 나고, 나에게 연락할 수단이 하나도 없었다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1년 동안 참았던 서운함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안도감에 눈물이 났다. 적어도 내가 싫어져서 떠나거나 한 건 아니구나, 하고. 한참을 울먹이던 날 달래던 김태형은 그동안 심리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며 정신병-김태형 말로는 정신병이라니까- 치료에 최선을 다했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는 물고기들 안 보인다고. 비 오는 날 물고기들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데 아직 한 마리는 남아있어.
이제 안 보인다면서.
한국에 두고 온 우리 정국이인지, 한 마리는 자꾸 아른거리더라고. 그런데 아직도 뭐가 보인다고 말하면 한국 영영 못 올 것 같아서. 그냥 이제 안 보인다고 그랬지. 이건 진짜 너만 아는 비밀이야.
우리 엄마 아빠한테 말하면 나 다시 끌려가. 김태형이 웃으며 말했다. 나는 아까부터 김태형에게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을 짧게 하고 있었지만 김태형은 그런 내 행동에 따로 태클을 걸지 않았다. 오히려 저에게 띠껍게 구는 내 모습을 흐뭇하게 쳐다봤다. 그리고 오늘 형 생일 맞아서 크리스마스 파티 대신에 하는 거 아닌데. 내 말에 김태형이 그런가? 하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나는 다 큰 인간이 애처럼 구는 것을 싫어했지만 이상하게 김태형에게는 괜한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심지어 이렇게 오랜만에 보는 김태형에게는 더더욱. 나는 김태형이 한 얘기가 나 기분 좋으라고 하는 말인지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생각했다. 저 말이 진짜라면 내가 김태형에게 특별한 존재인 거고, 거짓말이어도 굳이 나 기분 좋으라고 거짓말을 지어낸 거니까 만족한다고. 김태형 원래 거짓말 잘 하고 그런 사람도 아닌데.
나는 사실 아직도 김태형이 어떻게 물고기를 다 잡아먹을 수 있었는지 잘 모르겠다. 첫 번째 유학에서는 그렇게 쉽지 않았던 일이, 1년 사이에 갑자기 해결된 이유를. 그리고 그 수많은 물고기들 중 한 마리는 아직도 끈질기게 김태형 옆을 떠나지 않는 이유도 말이다. 하지만 내 시선이 닿는 곳에 김태형이 있어 주기만 한다면 더 이상 그런 이유는 내게 중요하지 않게 된다. 한 번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게 된 것은 주인에게 있어서 더 소중해지기도, 그를 더 관대해지게 하기도 한다.
김태형은 물고기를 다 잡아먹어 버렸지만 딱 한 마리, 한 마리는 계속 함께하기로 했다. 그게 김태형에게 있어서 관상용이든 그의 비밀친구든 물고기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사실이었다. 물고기 한 마리는 자신이 언제 김태형에게 잡아먹힐지 모르지만 그저 지금 살아남았음에 감사하며 헤엄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