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KV] 사랑의 추억 속에서
결국 그 튼튼한 몸에도 한계란 게 찾아왔다. 역시 풀타임은 오버였나. 만화카페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든 오래하는 건 힘들구나. 뻐근한 어깨를 주무르며 침대 위로 쓰러지듯 누운 정국은 핸드폰 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한시 십사 분. 형은 지금쯤 자고 있겠지. 취직한 이후론 항상 열두시면 잤으니까. 졸린 눈을 꿈뻑이며 태형과 나눈 카톡방에 들어가 마지막 대화를 곱씹어 보았다.
오후 11:20 형 퇴근 했어요?
[태형이형] 나 이제 퇴근해ㅠㅠ 오후 11:23
오후 11:25 오늘도 늦네, 어서 쉬어요. 피곤하겠다.
시간대를 보니 집 가자마자 뻗은 게 분명하다. 옷은 벗고 잤으려나. 어제는 눈 떠보니 거실 가운데에서 자고 있었다던데. 아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이러다간 깜빡 잠들어버리겠다. 정국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어기적어기적 욕실로 향했다.
큰일 났다. 씻고 나니 잠이 하나도 안 온다. 점심시간에 맞추려면 적어도 10시엔 일어나야 할 텐데... 형 앞에서 졸면 어떡하지? 어떻게든 잠들기 위해 두 눈을 꼭 감은 뒤 최대한 졸린 생각을 해보았다. 그러다 문득 잠시 후 펼쳐질 멋지고 근사한 장면들이 풍선처럼 떠올랐다. 형은 분명 엄청 놀랄 거야. 내일 일어나면 케이크랑 꽃다발부터 사자. 선물로 손목시계 사줘도 되나? 아버지가 사준 시계라고 맨날 그것만 차고 다니던데. 아냐, 형은 분명 좋아할 거야. 내가 무엇을 주든. 정국은 태형의 웃는 얼굴을 떠올리며 기분 좋게 잠들었다.
시작이 좋다. 예정보다 10분이나 일찍 집을 나선 정국은 여유롭게 케이크와 꽃다발을 고르고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점검했다. 모든 준비를 완벽하게 마친 뒤 태형이 사는 원룸 앞에서 전화를 건다. 신호음은 조금 길었다.
“여보세요...”
태형의 목소리가 힘없이 떨어졌다.
“형 어디 아파요?”
“아니, 괜찮아. 방금 일어나서 그래,”
하품소리가 길게 늘어졌다. 침대에 누운 채로 받고 있는지 부스럭 소리가 한참 나더니 조금은 정돈된 목소리로 묻는다.
“근데 무슨 일로 전화했어?”
“아, 그, 같이 점심 먹자고요, 오늘 쉬잖아요.”
“점심? 벌써 점심 먹을 시간이야? 야 미안, 미안. 내가 3일 동안 잠을 못자서 몰아서 좀 자느라... ”
“그럼 좀 더 잘래요? 밥은 이따 먹어도 되니까.”
연신 미안하다고 하는 태형에게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던 정국은 전화를 끊고 나서야 후회했다. 깜짝 선물이고 뭐고 그냥 처음부터 말하고 올 걸.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뭐하는 거냐 지금. 그래, 내가 한 것 중에 제대로 된 게 없긴 했지. 그 자리에서 한참을 서 있던 정국은 대충 시간이라도 때울 겸 근처 카페에 들어가기로 했다. 무심코 들어간 그 카페는 정국에게 꽤나 익숙한 장소였다. 신입생 때 주구장창 와서 과제하던 곳. 맨날 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제일 큰 사이즈로 시켜먹곤 했는데. 이젠 추억이 되어버린 지난 날 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태형이형하고도 두 번인가 왔었지. (동아리 선배들이랑 다 같이 온 거지만.) 형은 그 때도 딸기 스무디 먹었던가. 음 아마 그랬던 거 같다. 여긴 딸기류가 하나밖에 없다고 투덜거린 걸 보니. 예전과 같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주문한 정국은 창가에 앉아 핸드폰 갤러리를 뒤졌다. 아, 찾았다. 첫 공연 때 사진. 오랜만에 보는 선배들의 얼굴과 그 중심에 서 있는 태형이형, 그리고 오른쪽 끝에 어리숙한 나. 그 모든 게 다 추억으로 다가왔다. 벌써 4년이나 지났다. 우리가 만난 지.
*
전공은 컴퓨터공학이지만 정국은 연극동아리에 지원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수행평가로 아주 짧은 연극을 하게 됐는데 연기를 하면서 낯가림이 많이 없어진 경험이 유일한 지원동기였다. 오디션에선 당시 흥행하던 영화 비긴어게인 댄의 대사를 연기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도 제대로 못 풀고 시작해 거의 반 포기상태였는데 다음날 바로 합격문자가 날아와 놀랐다. (나중엔 잘생긴 애들이 적어 어쩔 수 없이 뽑았다고 선배들이 농담 삼아 말하곤 했다.) 태형을 처음 만난 곳은 동아리 실이었다. 정국은 아직까지도 그 날의 태형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하얀 볼캡에 푸마 마크가 그려진 검은색 트레이닝복 차림. 음 솔직히 말하면 조금 무서웠다. 한 손은 바지 주머니에 꽂아 넣고 혼자 조용히 대본을 훑어보는 모습이 굉장히 날카롭고 예민해보였다. 절대 저 선배한텐 찍히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 순간 ‘선배님’ 한 마디에 사르르 풀리는데 갭이 너무 커서 이건 이거대로 당황스러웠다.
연극 동아리는 대체로 즐거웠다. 선배들도 다 잘해주셨고 특별히 힘든 일도 없었다. 그러나 습관처럼 쌓아온 벽은 쉽게 허물 수 없었다. 그들이 전부 착한 사람이란 걸 아는데도 말이다. 동아리에 들어 간지 2개월쯤 지나자 정국의 손에 첫 대본이 들어왔다. 정국이 맡은 배역은 여자주인공의 동생으로 장난기 많고 활달한 고등학교 유도 부 에이스. 주조연이라 분량이 많진 않았지만 대부분이 개그신이라 어느 정도의 개그센스가 필요하단 말을 몇 번이고 강조해 부담이 컸다. 그런 정국에게 다가온 사람이 태형이었다. 그 날의 태형은 볼캡을 쓰지 않아 긴 앞머리가 눈썹을 다 덮었는데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샛노란 머리카락이 찰랑거렸다.
“많이 어렵지?”
“네, 조금요.”
“어려운 부분 있어? 내가 도와줄게.”
왠지 발목 잡는 기분이었다. 태형이형은 남자 주인공역이라 대사도 엄청 많을 텐데 괜히 나 때문에 시간 뺏는 거 같고... 그러나 태형은 기꺼이 시간을 내주었다. 캐릭터해석부터 대본해석까지 전부 태형과 함께 했다. 틈틈이 쌓아온 벽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 시점이었다.
선배들은 정국을 꽤나 막내취급 해줬는데 힘들고 고된 일은 2학년이, 그 외 심부름이나 뒷정리는 1학년인 정국이 맡았다. 하지만 이러한 배려는 정국을 몹시 불편하게 만들었다. 눈치 보이는 건 둘째 치고 다름 아닌 김태형이 2학년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여러 가지로 도움 받고 있는데 이런 거라도 내가 해야겠단 생각에 일부러 30분정도 일찍 가 무거운 물건들을 대신 옮겨놨었다. 근데 결국 사흘 만에 들켰다. 김태형한테.
“너일 줄 알았어.”
“서, 선배...”
“왜 꼭 도둑질하다 걸린 놈처럼 그래?”
그러게요. 제가 왜 그럴까요.
“누가 혼내기라도 한 대?”
고개를 갸웃거린 태형이 순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다 이내 정국이 대답하기 곤란할 거라 판단했는지 들고 있던 편의점 봉투를 내밀며 화제를 돌리기 시작한다.
“저녁 안 먹었지? 같이 먹자.”
편의점 봉투엔 2개의 삼각 김밥과 2개의 컵라면이 들어있었다. (젤리는 후식) 처음부터 나랑 같이 먹으려고 그런 거였구나. 괜히 쫄았네. 별 시덥지 않은 일로 어색해질 뻔 했단 걸 깨달은 정국은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겨우 참았다.
“네가 후배로 들어와서 정말 다행이야. 원랜 내가 여기 개막내였거든.”
“오히려 저 때문에 더 피곤해진 거 아니에요?”
“그렇게 보여?”
“아뇨. 그냥... 제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한껏 시무룩한 표정으로 오물거리는 게 퍽이나 귀여웠는지 정국의 머리를 엉망진창으로 헤집은 태형이 환히 웃었다.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 그런 사람 있으면 당장 데뷔하라 그래!”
“그런 말하는 선배도 엄청 잘하시잖아요. 연습하는 거 다 봤어요.”
“그만큼 연습했으면 이 정돈 해야지. 나 1학년 땐 진짜 가관이었어. 내가 처음 맡은 배역이 뭔 줄 알아? 외국인이었어, 외국인. 지금 생각해도 어이없네. 우리말도 못하는데 무슨 외국말이야.”
억울해 죽겠다는 말투에 정국이 배꼽 빠져라 웃었다. 저 선배가 저렇게 또박또박 말하는 거 연기할 때 빼곤 처음이야.
“영상 없어요? 진짜 궁금하다.”
“몰라. 아마 있을 걸.”
“보여주면 안 돼요?”
“아무리 그래도 선배 체면이 있지... 진짜 창피한 건 당시엔 좀 잘했다고 생각했다? 엄청 혼나가면서 연습해서 조금만 나아져도 괜찮아보였거든.”
“혼냈다고요? 지금 선배들이?”
“아니, 지금은 없어.”
태형이 틈만 나면 대본을 펼쳐보는 건 어쩌면 그 선배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외국인 단역에서 주인공자리까지 간 것도 어찌 보면 그 선배들 덕분이고.
“여튼 난 네가 있어서 진짜 진짜 좋아. 너 보면 왠지 힘도 나고.”
“저도 선배가 있어서 좋아요.”
“나는 진짜 진짜 좋은데 너는 그냥 좋기만 해?”
커다란 눈을 가늘게 뜬 태형이 새침하게 물었다. 그런 태형과 눈을 맞추며 미소 짓는다.
“아뇨, 저도 진짜 진짜 좋아요.”
“진짜지?”
“그럼요!”
만족스럽게 웃은 태형이 흐트러진 정국의 머리칼을 차분히 정리해줬다. 가느다란 손가락이 정국의 귀를 간지럽히며 찬찬히 내려온다. 정국은 괜히 태형의 손길이 닿은 곳을 자꾸만 매만지게 되었다.
첫 공연을 시작하기 전, 너무 긴장한 나머지 물통 두 개를 뚝딱 해치웠다. 옆에서 그만 마시라고 말려도 손이 계속 가는 걸 어떡하랴. 크게 긴장한 정국은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신의 대사를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럴수록 곧잘 하던 대사까지 꼬여 이젠 손이 다 떨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실수하면 안 돼. 다들 얼마나 열심히 준비했는데... 떨리는 손으로 대본을 잡으려는 순간, 태형의 손이 정국의 손을 감쌌다.
“너 괜찮아?”
“네? 네. 저 괜찮아요.”
“아, 맞다. 나 청심환 있는데. 그거라도 먹을래?”
“청심환이요?”
“응. 나도 첫공 땐 가끔 먹어. 줄까?”
태형과 손깍지를 낀 정국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그 정도까진 아니니까.”
선배랑 손잡고 있으면 금방 풀릴 것도 같고.
“걱정 마. 실수해도 돼. 내가 다 커버 칠게!”
“와아 진짜 믿음직하다.”
“그치? 나 그런 거 완전 잘해!”
“경험에서 우러난 말이에요?”
고개 끄덕거리는 게 참 해맑다. 그래서 같이 웃었다. 태형은 주변 사람들에게 참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다. 그의 밝은 에너지는 주변을 환히 비춘다. 태형선배는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런 거라고, 당시의 정국은 생각했다.
그렇게 착각했다.
첫 공연을 무사히 마치자마자 정국의 품 안으로 냅다 달려든 태형은 수고했다며 방방 뛰었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려 태형의 어깨 위로 고개를 떨어뜨린다.
“고마워요, 형. 다 형 덕분이에요.”
“어, 우리 드디어 형 동생 하는 거야?”
“...아, 그, 제가 너무 긴장해가지고... 죄송해요 선배.”
“아니야, 안 돼. 한 번 형이면 계속 형인거야.”
이제부턴 계속 형이라고 불러. 알았지? 정국의 품에 안긴 채로 고개만 빼꼼 내민 태형이 사랑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무대 내내 쿵쾅거리던 심장은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했고 새빨개진 얼굴은 곧 터질 것만 같았다. 심장이 튀어나오기 전에, 얼굴이 터져버리기 전에 어서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네, 그럴게요. 태형이형,”
정국은 깨달았다. 이 마음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참으로 복잡한 감정이란 걸.
*
투명한 유리컵엔 녹다 만 각 얼음만이 남았다. 처음 마셨을 땐 마셔도 마셔도 끝이 없었는데 이젠 조금 모자라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한 잔 더 시키기엔 너무 많다. 기지개를 피며 손목시계를 확인한 정국은 1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있단 걸 알곤 조금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난 오늘만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는데, 형은 아니었나? 물론 일 때문에 많이 피곤한 건 이해하지만 아예 잊고 있었단 거 아냐. 하지만 이런 말을 하면 분명 형이 엄청 미안해하겠지. 그건 또 싫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정국과 태형이 교제한지 1년째 되는 날이자 그들이 보내는 첫 기념일이기에. 주변사람들이 들으면 거짓말 하지 말라 그런다. 둘이 그렇게 죽고 못 사는데 무슨 기념일 하나 제대로 안 챙기고 살았냐고. 하지만 그 날마다 나름대로의 이유란 게 있었다. 투투 챙기면 금방 깨진다는 친구의 말에 투투는 자연스레 건너뛰었고 50일째엔 시험기간이라 가볍게 밥만 먹었었다. 그리고 100일째엔 태형이형이 지방출장을 떠나 기차역에서 얼굴만 좀 봤다.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같은 건 잘 챙겼지만 이상하게 커플기념일에만 타이밍이 영 안 맞았다. 그래도 1주년은 무사히 챙길 수 있겠구나 싶었는데... 아니야, 조금만 있으면 형 만나잖아. 금세 미소를 되찾은 정국은 문득 첫 키스 한 날이 생각났다. 그 땐 진짜 꿈같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1년이나 지났구나. 감성에 조금씩 젖으려던 참에 전화가 걸려왔다. 태형으로부터의 전화다.
“형? 벌써 일어났어요? 아직 5시도 안 됐는데.”
“응. 눈이 떠졌어. 너 지금 어디야?”
“저 잠깐 카페 들어왔어요. 제가 그리로 금방 갈게요.”
“아니, 잠깐만.”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이 멈추었다.
“우리 레스토랑 앞에서 만나자. 내가 그 근처에 볼 일이 좀 있거든.”
알겠다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 정국은 입가 가득 미소를 띠었다. 오히려 잘 됐다. 집 앞에서 주는 것보단 레스토랑에서 주는 게 훨씬 더 좋을 테니까. 태형이형보다 일찍 가서 미리 준비해놔야지. 정국의 발걸음은 한껏 가벼워져 곧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영장을 본 순간, 태형의 얼굴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아, 결국 안 될 운명이구나. 접어야 할 감정이겠구나, 싶었다. 그래. 어차피 고백할 용기도 없었잖아. 괜히 나 혼자 들떠가지곤... 한심하게. 내가 제대할 쯤, 형은 이미 이 학교에 없을 것이다. 부랴부랴 복학해봤자 형은 더 이상 이곳에 없어. 우리의 관계는 여기까지가 끝이라고. 시작도 못 해봤는데. 와씨, 너무 허무해서 눈물도 안 나오네,
입대하기 전 마지막인사도 할 겸 태형과 술을 마셨다. 까까머리 좀 보자며 짓궂은 장난을 치던 태형도 헤어질 시간이 되자 정국의 머리를 끌어안곤 위로의 말을 해주었다.
“다치지 말고 건강히 잘 다녀와, 정국아.”
어쩌면 오늘이 정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온 정국은 태형의 다정한 목소리에 왈칵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귓가에 닿는 더운 숨결과 울음을 들은 태형은 얼른 고개를 틀어 정국의 발간 볼을 꼬집었다.
“아이구 아기야. 왜 벌써 울고 그래. 아예 떠나는 것도 아니잖아. 2년 금방 간다?”
“혀, 형은 그러겠죠! 하지만 저는 아니란 말이에요.”
정국이 코를 훌쩍이며 외쳤다.
“난 군대도 그럭저럭 괜찮던데? 생각보다 좋은 사람 되게 많아.”
“형은 이미 다녀왔으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예요. 하씨, 나도 그냥 빨리 다녀올걸 그랬어. 왜 하필 지금이야?”
코맹맹이 소리로 투덜거리는 정국이 그저 귀여웠던 태형은 아기처럼 우는 정국을 꽉 안곤 보드라운 뺨을 부벼댔다.
“가서 전화랑 편지 맨날 하면 되지, 휴가 나오면 이렇게 같이 술도 먹고.”
“...정말요?”
“못 믿겠음 나랑 손가락 걸까?”
불쑥 내밀어진 새끼손가락에 조심스레 저의 손가락을 걸었다.
“....약속 했어요 나랑.”
“걱정하지 마. 나 약속 완전 잘 지켜.”
얽힌 손가락엔 자그마한 희망이 걸렸다.
태형의 약속은 거짓이 아니었다. 정국이 입대한 이후로도 꾸준히 편지를 주고받았고 틈나는 대로 수화기를 들었다. 휴가를 나오면 가장 먼저 태형을 보러 갔으며 그 때마다 서로의 깊은 이야기까지 나눌 수 있었다. 가까운 미래부터 먼 미래의 이야기까지. 전에는 그저 즐거움만을 나누었다면, 이젠 슬픔도, 괴로움도 함께 나눌 수 있게 되어 기뻤다. 태형에게 힘이 될 수 있다면 뭐든 좋다고 생각했기에. 관계가 깊어질수록 정국의 마음은 겉잡을 수없이 커져갔다. 좋아한단 말 한마디가 목구멍 끝까지 차올라 괴롭기까지 했다. 말하고 싶은데, 감당할 용기가 없다. 어쩌면 이 거리가 가장 적합하다 생각하면서도 저의 어깨에 기대오는 태형을 볼수록 그에게 더 다가가고 싶다. 정국은 이런 바보 같은 자신이 정말 답답하고 싫었다.
군대에서의 2년은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다. 태형의 말대로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이 더 많았다. 그래서 더 보고 싶었다. 하루 종일 함께 뒹굴 거리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야 내가 제대했다는 게 실감날 거 같아서. 마중 나온 부모님과 감격의 포옹을 한 정국은 아버지 차에 올라타며 태형에게 미리 카톡을 보냈다.
오전 11:32 저 이제 나왔어요. 괜찮으면 저녁에 만날래요? 오늘은 내가 살게요.
답은 전화로 왔다. 간식거리를 챙겨주며 안부를 묻던 어머니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정국은 조금 낮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네, 형. 저예요. 정국이.”
“야아 정국아! 너 지금 집 오는 길이야?”
“네. 지금 고속도로 타고 가고 있어요. 근데 형 지금 전화 받을 수 있어요?”
“지금은 괜찮아. 잠깐 화장실 간다고 하고 나왔거든.”
대학을 졸업하고 얼마 후, 태형은 한 중소기업의 인턴으로 들어갔다. 온갖 잡일이란 잡일은 전부 도맡아 하다 보니 연락도 뜸하고 어쩌다 한 번씩 전화해도 졸음 가득한 목소리로 답하곤 했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신나 보인다. 그 이유가 나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헛된 꿈은 고이고이 접어두도록 하자.
“제대 완전 축하해. 내가 말했지? 2년 금방 간다고.”
“금방까지는 아니었는데... 네, 뭐. 그럭저럭 잘 갔네요. 형은? 일 괜찮아요?”
“이젠 적응됐어. 아, 참. 오늘 좀 늦게 만나도 돼? 윤사원님이랑 퇴근하고 가볍게 술 한 잔 하기로 했거든.”
윤사원. 태형의 중학교 선배이자 가장 친한 상사. 요즘 그 윤사원 덕분에 고된 회사일도 견딜 만한가 보다. 형이 기운을 차린 건 정말 다행인데... 헛된 꿈이 고이고이 접는다고 접어지나?
“그럼 헤어질 쯤에 전화해요. 내가 그리로 갈 테니까.”
쉽게 접히는 게 아니지, 그게.
연락이 온 건 9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처음엔 자음과 모음을 내키는 대로 조합한 알 수 없는 메시지를 보내더니 몇 분 뒤 전화가 걸려왔다. 눈 감고 걷다 발목을 삐끗했다는 전화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자신이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 전봇대 아래에 앉아있는 태형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저를 향해 달려오는 정국을 두 팔 벌려 반긴 태형은 정국의 목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정국은 그대로 태형을 안아들어 근처 놀이터까지 걸어갔다. 어디 벤치에라도 앉히려 한 건데 갑자기 그네를 타겠다며 어리광을 부리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네위에 앉혔다.
“왜 형 혼자 있었어요. 윤사원은요? 설마 형 버리고 먼저 간 거예요?”
“아니, 아니. 내가 혼자 가겠다고 했어.”
“그럼 택시라도 타던가. 이게 뭐예요.”
쭈그려 앉은 정국은 태형의 바지를 탈탈 털어주었다. 전화해준 건 고맙지만 속상함이 더 큰 게 사실이다. 아무리 형이 혼자 가겠다고 해도 그렇지, 저렇게 취한 사람을 혼자 두고 가? 진짜 친한 거 맞아? 하다못해 택시라도 불러주던가. 뭐냐고, 이게.
“정국아.”
상체를 숙인 태형이 정국의 까만 정수리를 손가락으로 꾹 눌렀다.
“화났어?”
“...아뇨.”
“화났구나?”
“아니에요, 그런 거.”
“아이 미안해. 나는 진짜 조금만 먹고 가려고 했는데 약간 마셔야하는 그런 분위기였어.”
형 때문에 화난 거 아닌데, 진짠데.
“저 만나는 게 뭐 대수라고...”
“어?”
“다음부턴 혼자 집 가지 마요. 오늘 못 만나면 다음에 만나면 되잖아요.”
“무슨 소리야.”
“...다음부턴 혼자 집 가지 말라고...”
“아니, 그거 말고.”
깊은 목소리가 정국의 귓가로 스며들었다. 놀란 정국이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가느다란 손가락이 정국의 두 뺨을 감싸며 커다란 눈동자를 마주하게 했다.
“왜 그런 말을 해. 네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면서.”
“태형이형...?”
“내가 정국이 널 얼마나 좋아하는데.”
태형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졌다. 당장이라도 떨어질 것 같던 눈물방울이 정국의 뺨 위로 떨어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이건 더 이상 꿈이 아니다. 남몰래 접어온 헛된 꿈 따위가 아니야. 어느덧 정국의 눈가에도 맺힌 눈물이 턱 밑으로 떨어짐과 동시에 두 사람은 입을 맞췄다.
*
지금 흐르는 이 눈물은 애통의 눈물이 아니다. 감격의 눈물이지. 태형의 이름으로 예약된 자리에는 두 사람의 추억으로 가득한 영상과 선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뛰어난 기술력이 돋보이는 영상은 아니었지만 태형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그런 영상이었다. 정직원이 된 이후부턴 지방출장도 잦고 정상퇴근도 거의 못한다고 들었는데 그 시간마저 쪼개어 준비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다 나더라. 빨갛게 부은 눈가를 손등으로 벅벅 닦아내는 정국을 보며 웃음을 터트린 태형이 얼른 다가와 정국을 껴안았다.
“그렇게 많이 섭섭했어? 내가 진짜 잊어버렸을까봐?”
“형 일부러 그랬죠? 난 진짜 형 많이 피곤한 줄 알고 미안해서 막...”
눈물 닦으랴, 말하랴 정신없던 정국이 뒤늦게 꽃다발과 선물을 건넸다. 예쁜 꽃다발을 품에 안은 태형이 그보다 더 아름답게 웃는다.
“나 주는 거야?”
“더 좋은 거 주고 싶었는데...”
“더 좋은 거 거기 있네.”
정국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꾹 누른 태형이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당황한 정국이 여기서 어떻게 하냐고 소리치자 농담이라며 어깨를 으쓱인다. 눈물을 멈춘 정국은 직접 포장지를 뜯어 태형의 얇은 손목에 시계를 걸어줬다. 태형이 손목을 들어 시계를 구경하는 동안 정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녁시간 전이라 다행히 조용하다. 직원들도 자기 할 일하느라 바쁜 거 같고. 마침 자리도 외곽이라 눈에 안 띈다.
“와 이거 진짜 예쁘다! 진짜 잘 쓸게. 근데 내 선물은 맨날 못해서 어떡해?”
“왜 맨날 못해요. 맨날 할 수도 있지.”
“그걸 맨날 입고 다닌다고?”
“매일 빨아서 잘 입고 다니면 되잖아요.”
가을 자켓이 들어있는 선물상자를 가볍게 흔든 정국이 싱긋 웃었다. 그래, 뭐. 너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태형이형.”
“응?”
“잠깐 귀 좀 대봐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미 정국의 몸은 태형에게로 가 있었다. 고개라도 조금 틀어줄까 싶어 반쯤 올리려는데 봉긋 올라간 태형의 뺨에 정국의 입술이 닿았다 떨어졌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태형이 급히 주위를 둘러본다.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한 태형은 정국을 곁눈질로 흘겨봤다. 태형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해맑던지. 그래, 네가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입술을 한 번 축인 태형은 정국의 목덜미를 잡고 재빠르게 입 맞췄다. 그리고 그대로 도망갈 계획이었으나 그냥 놔줄 정국이 아니다. 태형의 마른 몸을 세게 껴안은 정국이 보드라운 뺨을 부비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1주년 축하해요. 그리고 고마워요.”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태형이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