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上
“이거 완전 김태형.”
의진이 입 꼬리를 실룩거리며 휴대폰을 내밀자 옆에 앉아있던 윤화가 내용을 읽고 깔깔 웃었다. 우렁찬 소리가 세미나실을 뒤흔든다. 또 뭔데 저래? 두 사람을 번갈아보다 책상을 짚고 몸을 날려 휴대폰을 뺏어들었다. 그들은 서로를 손바닥으로 때려가며 웃느라 휴대폰이 내 손에 들어오는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밸런타인데이 [Saint Valentaine's Day]
…… 밸런타인데이의 유래는 3세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결혼은 황제의 허락 아래 할 수 있었는데, 밸런타인은 서로 사랑하는 젊은이들을 황제의 허락 없이 결혼을 시켜준 죄로 순교한 사제의 이름이다. 그가 순교한 뒤 이날을 축일로 정하고 해마다 애인들의 날로 기념하여 온다. 이날은 ……
“야. 김 발렌타인으로 개명해. 한 몸 희생하여 사랑을 이어주는….”
“개짱나 너네.”
기분이 팍 상해 책상 위에 펼쳤던 책을 덮으며 불퉁하게 대꾸했다. 짐을 갈무리하고 자리를 뜨려하자 의진과 윤화가 목소리를 늘어뜨리며 애원하는 시늉을 했다. 가지마아, 잘못했어. 그러다 의진의 ‘미안해 김발렌.’ 소리에 다시 자지러진다. 대체 뭐가 웃기단거야. 거친 손길로 가방의 지퍼를 잠그고 일어났다.
“간다.”
의자에 드러눕다시피 엎어진 의진과 윤화는 딱히 나를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순간적으로 맥박이 멎고 의식이 다른 차원에 다녀오는 듯한 기분을 살면서 몇 번이나 느낄 수 있을까? 불행히도 나는 스물 두 해를 살아오는 동안 그 기이한 감각을 세 번이나 겪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인생을 통틀어 세 번의 실연을 당했다는 것이다.
열다섯에 맞이했던 첫사랑 그녀는 친구 A와 잘 되게 다리 좀 놓아 달라 비밀스럽게 도움을 청하더라. 울며 겨자 먹는 심경으로 도와 이루어진 커플은 아직도 뜨거운 사랑중이시다. 고등학생 때 좋아한 후배 B는 내가 사물함에 넣어둔 선물을 엉뚱한 이의 것으로 착각했다. O가 B 사물함에 초콜릿을 넣어뒀다며, 소문이 돌고 며칠 뒤 페X스북에 ‘O님과 연애 중♥’ 문구를 보았을 때의 심경이란.... 작년 겨울 즈음부터 좋아했던 C선배(남)은 같이 게임이나 하라고 소개해 준 동기 D군과 최근 연애를 시작했다. 게임 하랬지 연애를 하랬냐고. 당연히 이성애자일 것이라 생각해 고백은 꿈도 못 꾸고 지내온지라 억울해 미칠 것 같았다.
역시 태형이 너는 이해할거라 생각했어. 고맙다.
“씨발!”
자동으로 지원되는 C선배의 음성에 허공을 걷어차며 분을 풀었다. 몇 개월이 지난 지금에 와서 슬픔이랄 것도 싹 휘발되긴 했다. 하지만 첫사랑의 일이나 C선배의 일이나 여전히 짜증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힘껏 발을 구르며 걷던 중 길 건너 동방이 있는 건물이 보였다. 아무나 잡고 술을 마셔야겠다 싶어 그 쪽으로 몸을 틀었다. 실연의 상처를 회복한다고 은둔 생활을 하느라 한 학기를 통으로 날려먹었으니 누구든 마주치면 적잖게 욕먹을 각오를 해야 했다. 동방으로 내려가는 계단은 어둑하고 습했다. 메케한 냄새가 코를 찔러 숨을 참고 문손잡이를 틀어쥐었다.
“안녕하세요.”
“켁, 콜록. 아, 안녕하세요.”
호기롭게 열어젖힌 문 안에는 초면의 남성이 있었다. 것도 무진장 예쁜. 삼켰던 숨을 기침과 함께 내뱉으며 꾸벅 목례했다. 갑작스러운 침입에 놀랐는지 둥글게 휘어져 올라간 눈썹과 쌍꺼풀 진 동그란 눈이, ……너무 귀엽다. 놀란 토끼 같은 이목구비가 차차 안정된 모양을 찾아가는 것을 보며 맞은편의 길쭉한 소파에 앉았다. 패브릭 커버는 까칠했고 퀴퀴한 냄새가 났지만 그런 사소한 것들은 신경 쓸 거리도 아니었다. 나를 빤히 쳐다보던 정국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과 인사 사이 어디쯤에 걸친 어투로 말했다.
“17학번 전정국입니다?”
“아, 15학번 김태형이요.”
“아아. 저는 저번 학기에 들어왔어요.”
“음. 네에.”
첫 눈에 반했다는 게 맞을까?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청순한 이목구비에 동글동글 머리통. 쭉 뻗은 목선을 따라 이어지는 탄탄한 어깨라니. 하얀 티셔츠와 대비되는 빨간 입술, 그 아래 보일 듯 말 듯 콕 찍힌 점이 섹시하다. 아니, 이렇게 안 어울리는 요소들이 저렇게 조화로운 인간으로 빚어질 수가 있나? 반소매 아래로 보이는 팔뚝의 굴곡과 책상 위에 올린 손등의 힘줄까지 보고 움찔거리는 입술을 감춰 물었다. 2미터쯤 떨어진 곳에서 씩씩하게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마저 달콤했다.
“누구 만나러 오셨어요? 오늘 다들 엠티 갔는데.”
“시험기간인데요?”
“그런 거 신경 안 쓰시는 분들이더라고요.”
“술 먹으려고 왔는데…….”
그건 그렇지 고개를 끄덕이다 아쉬움에 말끝을 흐렸다. 단연코 술상대가 없어 아쉬운 것은 아니었다. 조금 더 머무르며 정국을 구경하고 싶었으나 명목이 없다. 용건이 사라졌으니 돌아가야겠다 말할 타이밍인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정국은 소파에서 일어나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테이블 위에 책들이 여러 권 펼쳐져 있다. 공부하고 있었구나. 무언의 축객령에 뒷목을 깔짝깔짝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백팩의 스트랩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 인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정국이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한쪽에 밀어내며 말을 걸었다.
“저랑 드실래요?”
“엉?”
“형 친구 많으실 것 같지만….”
“아니? 나 아싸야. 막 맨날 너무 외롭고 그래.”
고장 난 로봇처럼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소리 없이 웃은 정국은 제 가방을 메고 나와 문을 열었다. 그를 뒤따라 몇 칸 떨어진 거리에서 계단을 오르다 난관에 봉착했다. 정국의 하체가 시야 앞에서 불끈거리는 것이었다.
미친 얘 허벅지 좀 봐!
길고 얄팍할 줄 알았던 다리는 계단을 디딜 때 바지가 찰싹 달라붙으며 튼실한 자태를 뽐냈다. 얼굴은 아기천사인데 몸매가 짐승이다. 정신건강에 매우 유해하다. 눈을 질끈 감고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신이시여 저는 죄가 없사옵고 불과 30초 전까지 플라토닉 러브를 지향하던 바……
“억!”
열심히 기도를 하느라 계단을 다 올라서 헛발질을 했다. 휘청거리며 정국의 등판에 이마를 콱 들이받자 그가 휙 돌아보았다. 제 발이 저려 ‘아니, 저기, 그게’ 따위를 더듬거리자 씩 웃으며 팔뚝을 잡아끌었다. 뜨끈한 체온이 얇은 소매를 감쌌다.
“조심하세요.”
유니버스 스윗 보이스 콘테스트에서 당당히 대상을 차지하고도 남을 목소리가 갈빗대 사이를 파고들었다. 정국은 오랫동안 내 팔을 잡고 있었다.
두 시간이 넘도록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며 정국에 대해 야트막하게 파헤쳤다. 술잔을 기울일수록 소리가 먹먹해지고 시야가 흔들렸다. 취기가 오르니 그제야 정국과 눈을 마주칠 수 있었다. 얼굴이 살짝 붉은 것처럼 보였다. 조명하고 있는 것이 주황빛 전등이라 확실치는 않았다. 눈꺼풀이 무거워지는 나와는 달리 정국의 눈은 아직 똘망똘망했다.
“너는 여친 같은 거 없어?”
“같은 건 뭐예요? 여친도 비슷한 것도 없는데.”
“오오. 좋아좋아.”
"제가 여친이 없는데 형이 왜 좋아요?"
미친. 술에 절어 방정을 떠는 입을 살짝 두들겼다. 정국은 날카롭게 되물었으나 더 캐물을 생각은 없는지 대수롭지 않게 술을 들이켜고 안주를 집어먹었다. 정신 차리자는 의미에서 두 손으로 뺨을 짝 치고 눈을 부릅떴다. 정국에게 맞추어 한 잔을 비우고 나니 몸이 자꾸 앞뒤양옆으로 흔들거렸다. 커졌다 작아지길 반복하는 테이블 위의 그릇들을 보며 내 주사가 뭐였던가 곱씹어보았다. 친구들은 시끄럽고 짜증이 난다 했으나 정확히 알려주지는 않았다. 주사가 무엇이건 간에 이 이상 마시면 추태를 부릴 것이 뻔했다.
“형 시험 끝나면 저랑 또 놀아주실 거죠?”
이런 저돌적인 연하남! 기특한 발언에 몸을 배배 꼬았다. 물론 정국의 의도는 순수했겠으나 내게는 반쯤 그을려 입력되었다. 놀아줘? 어떻게 놀아줄까? 물으려다 초면에 너무 변태 같은 발언이라 그만 두었다. 실실 웃음이 샜다.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의 눈 아래 애교 살이 통통하게 오르고 하얀 앞니가 서서히 드러났다. 상큼하기로는 어지간한 과일 저리가라 할 정도라 절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서둘러 오른쪽에 밀어두었던 술병을 집어 들었다.
"형?"
한 입 크게 들이켜기 무섭게 손에 쥐었던 것이 쏙 빠져나갔다. 갑자기 병나발을 부는 게 이상할 만 하지. 술에 취해 자유의지를 행사하는 자아는 이성과 완벽하게 분리되는 중이었으며 이드(id) 그 자체였고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테이블이 가까워지고 있다. 정신을 놓으면 안 된다는 미약한 이성의 외침이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얼굴만 치켜든 요상한 모양새로 앞으로 기울었다. 정국이 내게서 뺏어든 병을 팽개치다시피 떨어뜨리고 손을 내밀어 턱을 받쳐주었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다. 조금은 거칠지만 뜨겁고 포근한 표면에 얼굴을 비볐다는 느낌만 남았고 그게 정국의 손이었을 것이라 추측할 뿐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새벽이었다. 어슴푸레한 빛이 들어오는 정국의 기숙사 방에, 그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벌떡 일어나다가 2층 침대 프레임에 머리를 박았다. 쾅 부딪히는 소리가 비명을 대신했다. 김태형 미쳤나 만난 지 하루 만에 한 침대에서 눈을 떠?! 색색 세상모르고 잠든 아기천사를 살피고 조심스레 움직여 방에서 뛰쳐나왔다. 정국에게는 메시지를 남겨두었다.
―정국아 곤히 자고 있어서 안 깨우고 나왔어 내가 실수한 거 있으면 정말정말 미안해 그리고 계좌번호 알려주라 돈 보내줄게 나 때문에 고생했지 넘넘 미안ㅠㅠ
답장은 오후가 되어서야 돌아왔다.
―괜찮아여
정수리에 볼록 튀어나왔던 그 날의 훈장이 사그라지기까지 나흘이 걸렸다.
시험이 끝나고 간만에 늘어지게 누워있었다. 잠은 깼는데 일어나기는 싫은 상태. 메시지 알림음이 울려 더듬더듬 휴대폰을 뒤집었다. 팝업에 떠 있는 정국의 이름에 몸을 뒤집어 두 손으로 움켜쥐었다.
―형 저랑 산책하실래요?
이거 약간…. 라면 먹고 갈래요 같은 느낌인가? 뜬금없는 데이트 요청에 일단 욕실로 달려가 칫솔을 물고 전화를 걸었다.
"정구가 나 지금 막 일어나긴 했는데 20분 안에 나갈 수 있어. 아니 진짜 빨리하면 10분?"
칫솔 때문에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우다다 말하니 수화기 너머에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렸다. 오늘 말고 주말에요. 웃음기 서린 정국의 제안에 어느 때보다 우렁찬 함성으로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침대에 엎어져 흐흐 웃었다. 석촌호수에 둘이서 산책이라니 완전 썸이잖아. 근본 없는 희망이 가슴을 간질였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여섯 번째 코디를 최종 점검했다. 어지러운 패턴의 셔츠를 걸쳤다가, 미래지향적 디자인의 바지를 입었다가…. 정국이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 수 없어 결국 가장 무난한 차림으로 돌아왔다. 이 날을 위해 사둔 옷이 아직 몇 벌 남았지만 이만 외출해야 할 시간이었다. 나름 포인트를 준다고 기다란 줄 귀걸이를 장착했다. 패션은 자신감이야. …음, 정정한다. 잘생긴 얼굴에서 비롯된 자신감이다. 거울을 보며 콧김을 흥 내뿜었다.
저기, 지하철 역 입구 앞에서 손목시계를 보고 있는 훤칠한 남자. 멀리서 정국이 보이자 들뜨는 마음을 감출 수 없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걷어 올린 하늘색 스트라이프 셔츠의 소매 아래로 전완근이 드러났다. 청바지로는 감춰지지 않는 울끈불끈 허벅지는 어떻고. 감탄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자태였다. 정국이 멋있어, 멋있어 주접을 떨며 다가갔다. 그와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지는 이목구비에 어느새 예뻐예뻐 중얼거리고 있었다. 아……. 전정국 너무 좋아.
“정국아.”
정국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눈을 사르르 접으며 형! 외쳤다. 전정국은 이게 문제다. 무표정일 땐 적당쌔끈미남인데 입을 여는 순간부터 오버큐티쌔끈미남이 된다. 스무 살이 가질 수 있는 소년과 어른의 간극인가. 보기만 해도 원기가 왕성해지고 맥박이 빨라졌다. 만나자마자 사랑스러움이 치사량을 넘어서 목숨을 위협했다. 히히 웃으며 그의 옆에 나란히 서 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스치는 팔이 간지러웠다.
딱 두 번째 만나는 사이임에도 어색함 없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호숫가를 빙빙 돈 지 한 시간쯤에 이르렀을 땐 얘가 진짜 산책만 하다 가려는 건가 싶었다. 다행히 정국은 세 바퀴째에 잠깐 앉아서 쉬자며 벤치를 가리켰다. 누가 먼저 앉을세라 후다닥 뛰어가 먼저 착석하고 손짓했다. 길게 늘어진 귀걸이 줄이 얼굴 옆에서 달랑거렸다. 가까이 다가오는 정국을 보며 옆 자리를 팡팡 두들겼다. 그는 앉지는 않고 앞에 서서 손을 뻗었다. 흔들리던 귀걸이가 정국의 손에 잡혔다.
"귀걸이…."
"어? 엉. 그냥 가끔 껴."
"아아."
"왜? 이상해?"
정국의 눈길이 귓가에 닿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체온이 오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귀걸이만 보기에 괜히 침을 삼키는 것도 의식이 되었다. 정국이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귓불 끝에 살이 스치는 감촉이 선명했다. 톡톡, 귀걸이를 받치고 있던 손가락이 턱 선 어딘가를 두들겼다.
“예뻐요.”
정국이 손을 거두며 웃는다. 뭉툭한 감각 위로 처음 만난 날의 다정한 손바닥이 떠올랐다. 풀 냄새를 압축한 바람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 나뭇잎에 조각난 햇빛……. 그보다 찬란한 이와 눈을 맞추고 있는 오후.
어떻게 전정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단순한 호감을 사랑으로 발화시키는 원인은 늘 존재한다. 운동장을 가로지르다 축구공에 맞은 나를 일으켜 세우던 첫사랑의 손, 머리를 쓸어 넘길 때 은은하게 퍼지는 고등학교 후배의 비누 향, 애정을 담고 지켜봐주는 C선배의 눈빛 같은 것들. 고작 본 지 한 달이 조금 넘은 사이에 확언하긴 좀 그렇지만, 정국은 사랑의 시작 그 자체였다. 그의 모든 요소들이 사랑하지 않고 배길 수 있겠느냐 시험에 들게 했다. 나는 결국 동성애자가 된 걸까, 정국을 만난 후로 이틀에 한 번 꼴로는 고민하며 밤을 지새울 때도 있었다. 끝없이 되물으면서 해가 뜨면 고개를 젓고 지쳐 잠에 들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 모든 이유들은 남자만의 것도 여자만의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 사람이 가진 어떤 것. 그게 좋았다.
마음을 확신한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은 친구들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이번에도 남자라는 말에 잠시 주춤했던 의진과 윤화는 군말 없이 ‘김태형 탈발렌 프로젝트 팀’을 꾸렸다.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사랑 필승 법에 대해 논의했다. 나는 내년 밸런타인데이까지 그를 꼬셔서 김발렌 딱지를 떼겠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윤화가 어깨를 퍽 밀쳤다. 연애는 해본적도 없으면서 무슨 자신감이 그렇게 넘쳐?
“이번엔 좀…. 먼저 만나자고도 하고 둘이서 하루종일 석촌호수도 돌았는데.”
“대박대박. 드디어 탈발렌인가요?”
“진정해 친구들. 우리 김칫국 마시지 말자. …근데 잘생겼냐?”
“존나 예뻐.”
허리를 곧추세우고 가슴을 쭉 펴며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김태형 주책 쩐다. 두 사람에게 등짝을 여러 대 두들겨 맞고도 실실 웃었다. 그로부터 보름 후엔 의진과 윤화가 정국의 실물을 영접하고 등을 살살 쓸어주었다. C선배는 애매한 감이 있었는데 그 친구는 아주 훌륭하다 손뼉을 쳤다. 정국을 칭찬하는 말이 뿌듯하면서도 불쾌했다. 정국이 내 거니까 넘보지 마. 툴툴거리다 또 얻어맞았다.
정국을 꼭 매부 삼아야겠다며 윤화가 구체적인 계획을 물었다. 1. 자주본다 2. 밥사준다 3. 술사준다 등등을 읊자 잘난 얼굴 멀쩡한 허우대 뒀다 어따 쓰냐고 핀잔을 들었다. 의진과 윤화의 코칭 아래서 정국을 꼬시기 위한 본격적인 작전에 돌입했다. 대략 두 달간 열과 성을 다했다. 먼저 스타일. 정국의 취향을 찾는다고 놈코어룩부터 복고풍 고무줄바지까지 안 입어본 옷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정국은 한결같이 ‘예뻐요, 멋있어요, 섹시해요’ 같은 준비된 답만 돌려주었다. 그냥 까놓고 물어보면 되는 거 아니냐고 꿍얼대다 한 소리 들었다. 벌써 좋아하는 티를 내면 안 된단다.
“썸은 오래 타면 안 된다.”
“뭐 이렇게 안 된다는 게 많아?!”
의진이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목소리로 전한 말이 마음에 채찍질을 했다. 급기야 11월이 반 이상 넘어갔을 땐 정국을 자취방으로 초대했다. 일명 ‘은근 섹시텐션 작전’으로 의진이 기획한 것이었다. 술을 진탕 마신 다음 함께 침대에 누우면 술 때문에 달아오른 건지 옆에 누운 사람 때문에 후끈거리는 건지 헷갈리게 된다는 것이다. 흔들다리 효과가 어쩌고 하는 걸 윤화가,
“그게 무슨 섹시야? 이 새끼는 꼭 지 같은 소리만 하더라.”
면박을 주었다.
윤화 말대로 작전은 기대에서 한참 벗어난 채 종료되었다. 정국의 주량이 더 센데다 덩달아 티셔츠 하나에 반바지를 입은 몸을 보니 도리어 내 정신이 더 혼미했다. 긴 바지에 가려있어 늘 상상만 해오던 허벅지가 맨살을 드러내고 있으니 술 없이도 취하는 기분이었다. 눈을 둘 곳이 없어 폭풍 음주를 감행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느 시점부턴 기억도 사라져 불안했다. …물론 눈을 떴을 때 코앞에 있던 정국의 얼굴은 평생 가슴에 새겨야 할 나이스한 광경이었지만.
시험기간이 다가온다. 즉 종강이 오고 있다는 말이다. 전 같았으면 그 무엇보다 기다렸겠으나 이번만큼은 마음이 묵직했다. 아직 정국과 내 사이에는 이렇다 할 진전이 없다. 시험기간이라 일주일에 한 번 볼까말까 한 것도 견디기 어려운데, 가끔 만난다 하더라도 지금만치 가까이 있지 못한다는 게 더없이 끔찍했다. 독서실에 앉아 출력물의 문구를 따라 줄을 긋다가 펜을 놓았다. 딴 생각을 하느라 같은 자리를 두 번 그었다. 구석에 뒤집어 놓았던 휴대폰을 집었다. 기분도 꿀꿀하니 정국의 기를 받아야 했다.
―꾹아
―넹
역시나 칼답이 날아온다.
―크리스마스때
―몇 시
―ㅋㅋㅋㅋ7시
―콜
입을 틀어막고 온 몸을 비틀었다. 양 옆에 앉아있던 의진과 윤화가 인상을 쓰고 쳐다봤다. 정국과의 대화를 보여주자 전염된 것처럼 두 사람도 팔을 퍼덕거렸다. 부산한 움직임이 내는 소음에 멀찍이 앉아있던 학생이 고개를 내밀고 이 쪽을 주시했다. 그에게까지 휴대폰을 보여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머리를 숙이고 칸막이 안으로 숨었다.
中
사춘기를 지나면서 크리스마스는 딱히 큰 의미로 와 닿지 않았다. 산타클로스는 언젠가부터 오지 않았고 가족들은 더 이상 트리를 장식하지 않았다. 크리스마스에 딱 맞추어 눈이 내리는 경우도 드물어졌다. 길거리에 사람이 많고 오지게 추우니 집에 콕 박혀있어야 하는 날, 그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정국은 산타클로스가 머리맡에 두고 간 선물꾸러미였고 크리스마스트리 꼭대기에 장식한 별이었으며 괜히 마음을 술렁이게 하는 함박눈이었다. 약속장소로 향하는 걸음이 경쾌했다.
의진과 윤화의 도움으로 애쉬 어쩌고(윤화가 주문한 색이라 잘 모른다.) 금발로 염색을 하고, 옷도 나름 빼입었다. 가게의 유리창에 비친 모습을 흘끔거리며 약속장소로 향했다. 이 정도의 인파 속을 걸어본 적은 처음이라, 어깨를 움츠려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다리를 바삐 움직였다. 설레는 마음에 준비를 마치자마자 튀어나온 터라 30분정도 여유가 있었다. 자리를 잡을만한 카페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머지않은 곳에 걸린 프랜차이즈 체인 카페의 간판을 보고 다가갔다.
“어?”
카페에 가까워질수록 통유리 너머에 앉은 이가 정국과 비슷해보였다. …아니, 정국이 맞다. 걸음을 멈추고 그와 마주앉은 이를 보았다. 동아리 선배 K누나. 급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맞은편 건물의 화장품 가게로 들어섰다. 정국이 카페 입구를 향해 앉아있어 무작정 들어갔다가는 그의 눈에 띌 것이 분명했다. 가게 직원이 수상한 눈빛으로 다가왔으나 안 주머니에서 챙겨온 안경을 꺼내 유리 앞에 바싹 붙었다. 거리가 멀어 맨 눈으로는 정국이 어떤 얼굴인지 알 수가 없다.
“고객님.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잠깐, 잠깐만요. 죄송해요.”
정국을 바라보며 손을 휘저었다. 민폐고 실례고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에요. 직원은 덩달아 옆에 붙어 유리창 밖을 쳐다봤다. 내 눈길이 닿는 곳을 찾는지 머리통이 두리번거렸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정국과 내 사이를 가르고 지나칠 때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움직였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정국은 내게 하던 것처럼 애교를 부리듯 테이블에 한쪽 팔을 괴고 엎드리기도 했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기도 했다. 저는 연상이 좋아요. 언젠가 술자리에서 스치듯 정국이 했던 말이다. 괜히 두 뺨을 붉히며 내가 뭐라고 주접을 떨었더라.
‘나도 연하가 좋더라.’
몇 분이 흘렀을까, 두 사람이 테이블을 정리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국이 카페 밖으로 나오고 뒤를 K누나가 따랐다. 길가에 마주보고 서서 몇 마디 주고받더니 누나가 웃으며 정국을 주먹으로 툭 쳤다. 정국은 팔을 문지르며 맑게 웃었다. 정국이 들고 있던 짐을 누나에게 넘겨주었다. 어쭈 짐도 들어주셨어. 차오르는 심술로 눈썹이 꿈틀거렸다. 손을 흔들고 뒤돌아 가는 누나를 정국이 불러 세웠다. 제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며 다가간다. 곧 나는 입을 가리고 탄식했다. 정국이 누나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는 것이 아닌가!
“하.”
“손님….”
눈을 질끈 감고 있으니 옆에 서 있던 직원이 애타는 목소리로 부른다. 침을 꿀꺽 삼키고 쳐다보니 내 처지에 지나치게 이입했는지 턱에 호두를 박고 우물거렸다. 곧 손에 움켜쥐고 있던 휴대폰이 몇 번 진동했다. 잠깐 사이에 정국은 혼자 남았다. 액정에 뜬 이름을 쳐다보다 꾸벅 인사하고 밖으로 나왔다. 찬바람이 눈물을 쏙 빼도록 따귀를 때리는 듯했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서서 전화를 받았다. 한 손을 주머니에 넣고 신발코로 바닥을 툭툭 차는 모습이 인파 사이사이로 보였다.
“응.”
“형, 어디쯤이에요? 저 왔는데.”
“나…. 네 옆에.”
정국이 옆을 돌아봤다. 나를 발견하고 방긋 웃으며 휴대폰을 높이 들고 흔들었다. 그에 답하는 표정이 어색하지 않도록 얼굴근육을 세밀하게 조작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수없이 다짐했건만. 저 말간 얼굴이, 다정한 미소가 어쩌면 내게만 특별한 것일 수도 있다고 여겨왔다.
“나 어떡해….”
정국은 휴대폰을 다시 귀에 대며 네? 물었다. 나는 도리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발목까지 얼어붙은 것 같던 발을 떼자 그도 성큼 내 쪽으로 다가왔다. 확실한 건 아니잖아. 아직은. 그렇게 되뇔수록 비참해지는 건 나 자신이었다.
영화를 콧구멍으로 보고 밥을 귓구멍으로 먹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넋이 나가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무 대화 없이 길거리를 걷고 있었다. 약속장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거리를 보아 계속 같은 자리를 돈 것 같았다. 지금껏 무슨 얘기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묵묵히 옆에서 걷는 이를 보았다. 귀가 새빨갛게 얼어있다. 정국은 저를 쳐다보느라 지나가는 사람과 부딪칠 뻔 한 내 팔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형, 왜 그래요?”
“…뭐가?”
“안 좋아 보이는데….”
팔을 놓지 않고 걸어가던 정국이 광장 중앙쯤에서 멈추었다. 몇 보 앞에 세워진 건물만한 크기의 대형 트리가 알록달록한 조명에 감싸여 반짝거렸다. 주변은 연인들로 가득했다. 매년 크리스마스에 근방의 조명이 전부 소등되고 키스타임이 진행되는 곳이었다. 지금 내게 딱히 중요한 행사는 아니다. 정국의 손에서 팔을 빼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어금니를 꾹 물고 있자 정국이 몸을 틀어 마주보고 섰다.
“말을 해야 알지.”
“…전정국. 너 진짜 연상이 좋아?”
“예?”
뜬금없는 질문에 고갯짓을 하며 되묻는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대답을 부추겼다. 마주쳤던 눈이 잠시 아래로 향했다가 올라온다.
“네.”
“저번에 여친 없다고 했잖아. 오늘은? 오늘도 없어?”
정국이 한참 뜸을 들였다. 몇 분 만에 사위가 북적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던 소음이 점차 흥분을 싣고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문득 정국의 입가로 시선이 갔다. 끝이 빨개진 동그랗고 반질반질한 코끝과 나타났다 흩어지는 뿌연 입김. K누나에게 목도리를 내어준 목이 허전해 보였다. 나 때문에 여태 이러고 길을 쏘다녔구나. 찡해지는 코를 슥삭 문지르고 내 목도리를 풀어 정국에게 매어주었다. 끝이 붉은 손으로 목도리 끝을 만지작거린 정국이 눈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비슷한 거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
“…….”
“오늘만은 아니고 전부터, 저,”
삼, 이, 일! 우르르 모여든 사람들의 외침에 정국의 말이 싹둑 잘렸다. 어둠이 빈틈없이 들어차기 직전 본 것은 경직된 턱이었다. 목이 메었다. 손이 저려와 아래로 늘어뜨리고 마주잡았다. 겨울이 절정에 달하면서 튼 손등이 거칠었다. 그 결대로 쩍쩍 갈라져 소멸하고 싶었다. 왜 당연히 잘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까? 멋대로 정국을 재단한 시간들이 수치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사랑에 빠진 지 겨우 한 계절 반을 지나 또다시 비운의 남자가 되고 만 것이다. 정국이 입은 코트의 깃을 두 손으로 잡았다.
“크흠. 형, 저 사실.”
“정국아.”
“…네?”
“미안.”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시야로 어렴풋한 실루엣이 가까워졌다. 입술에 부드럽고 말랑한 감촉이 닿았다. 정국의 입술을 꾹 누르고 있으니 뜨거운 손이 주먹 쥔 손등 위에 겹쳐졌다. 이 와중에도 까칠한 손등이 창피해 손과 얼굴을 떼어냈다. 얼음장처럼 차갑고 말라비틀어진 것은 손뿐만이 아니었다. 짧은 암전을 마치고 조명들이 차례로 밝아왔다. 동그랗게 뜬 눈이 보였다.
“미안. 진짜 미안.”
손등을 반쯤 덮은 코트의 소매로 눈가를 벅벅 문지르고 돌아섰다. ‘그냥’ 끝났다. 이대로 정국과는 친한 형 동생도 못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런 마음으로 더는 붙어있을 수 없으니 차라리 잘 된 건지도 몰랐다. 몰려든 사람들 사이로 몸을 비집고 나왔다. 조금씩 거리에 여백이 생기고 잰걸음이 뜀박질로 변했다. 형! 뒤에서 정국의 목소리가 발목을 붙드는 바람에 스텝이 꼬였다. 크게 휘청거리자 그가 팔을 잡아챘다.
“형 잠깐만요! 왜요? 왜 그래요?”
“…….”
“왜 그러는데!”
“놔, 놔주라.”
억지로 나온 것도 아닌데 온종일 정신을 놓고 있다가, 대뜸 입술을 부비고 도망가는 것이 정국에게는 황당할 법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를 살필 처지가 아니었다. 한 시라도 빨리 아무도 없는 곳에 닿고 싶었다. 최소한 정국이 없는 공간으로. 정국은 내 어깨를 잡아 돌리려 했으나 팔을 뿌리치고 빠져나왔다.
“형!”
바짝 약이 오른 목소리를 무시하고 도로변에 뛰어가 택시를 잡았다. 창밖으로 향하는 시선을 고집스레 앞에 묶어두었다.
눈이 부르트도록 질질 짜다가 어찌어찌 그치고서도 또 눈물을 뽑았다. 기억이 희미해진 탓일 수도 있지만, 지금껏 당한 실연 중에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라 단언할 수 있었다. 어째 머리가 클수록 상대에게 깊이 빠지는 것 같다. 이대로라면 서른 즈음에는 차라리 죽는다고 설쳐댈 수도 있겠다 싶어 소름이 돋았다. 좌우지간 나는 정국을 정말정말 좋아했다보다.
날이 밝자마자 정국에게서 전화가 왔다. 밤새 내리 우느라 기진맥진하여 전화를 받을 힘도 없었다. 열 몇 번은 족히 울리던 휴대폰은 곧 메시지 폭격을 맞았다.
―어디 아파요?
―형
―김태형
―어떡하라고 나보고
갈수록 이놈 아주 싹퉁바가지였네 생각했지만 따지고 보면 내 쪽이 더 면구스러운 상황이었다.
―시험본다고 며칠 밤샜더니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미안해 정국아 면목이 없다 집에 잘 다녀와
눈물에 푹 적신 메시지를 보냈으나 답장은 오지 않았다.
축축한 연말, 깜깜한 새해. 보신각 전경을 비추던 TV의 전원을 끄자 북적거리던 소리들이 끽 숨을 죽였다. 엎어진 등 위로 겹겹이 내려앉는 정적에 질식하기 직전이었다. 베개 맡에 두었던 휴대폰을 집었다. 한동안 전원을 꺼두거나 무음모드로 설정했던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알림이 여럿 찍혀있었다. 그 중 정국의 이름은 없다. 삶의 체계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는 리셋 버튼을 누르고 싶었다. 아아.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뽀뽀는 하지 말 걸. 그냥 친한 형이라도 하고 살 걸.
간간히 의진과 윤화가 찾아왔다. 찬장에 인스턴트 밥을 채우며 사람답게 좀 살라 잔소리를 했지만 유난을 떤다고 나무라지는 않았다. 정국을 얼마나 좋아했고 지금도 그러한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친구들이었다. 그들은 말없이 회복을 기다려주었다. 새벽의 빛에 그어진 벽지의 경계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주책없이 가슴이 지끈거렸다. 해가 지면 이게 문제다. 없는 감성을 어디서 꿔서라도 끌고 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그럴 때는 이불을 턱 아래까지 끌어올려 꼼꼼히 여몄다. 겨울바람이 드나드는 매일이 공허했다. 올 겨울은 그렇게 지나갈 것이었다.
정국에게서 다시 연락이 온 것은 1월이 끝나가는 시점이었다. 한 달 만에 날아온 다정한 안부 인사에 입으로는 좆까 씨발! 외치면서 손가락은 ‘응. 너는?’이라 적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그러고선 정국의 메시지에게 심한 말을 한 것이 미안해 벽에 머리를 꿍꿍 박았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정국이 물꼬를 틀어 이틀에 한 번씩은 메시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얘는 너무 물러서 도둑뽀뽀를 한 파렴치한 선배도 포용해주는 가 보다.
2월 둘째 주에 접어들어서는 전화가 왔다. 아직 목소리를 들을 준비가 되지 않아 벨이 울릴 때마다 머뭇거렸다. 그렇다고 씹을 수는 없으니 어렵사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국은 늘 짧게 침묵하다 대뜸 어디냐 물었다. 나는 더듬더듬 본가에 내려와 있다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이다. 자취방에 있다하면 대번에 만나자 할 것 같은 흉흉한 목소리가 두려웠다.
“정국아. 너 이제, 좀 심심해? 우, 우우 우리는 개강하고 보면 되자너. 너 친구들이랑 놀고….”
속으로 백번은 넘게 연습한 말이 매끄럽지 않게 튀어나갔다. 전화를 받았을 때처럼 잠시 묵묵부답이던 정국은 긴 숨을 내쉬며 알았어요. 말하고 끊었다. 왜 지가 더 아쉬운 목소리를 내는지 모르겠다. 정국이는 다시 전처럼 지내고 싶은 걸까? 나는 그게 잘 안 되는데.
―김발렌 우리 술 마실 건데 너도 올래?
―ㅇㅇ언제 어디서
―이따 너네집
―꺼져
밸런타인데이 전 날에는 친구들이 초콜릿과 소주를 한보따리 들고 들이닥쳤다. 그들의 말로는 탈발렌 실패 위로데이라고 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경으로 바닥에 주저앉자 알아서 자리를 만들었다. 정신이 혼미한 틈을 타 술판이 벌어졌다. 윤화가 기분전환을 하자며 소주를 따라주었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높은 유리컵이 넉 잔째 비워졌을 땐 눈앞이 핑핑 돌았다.
“야아, 그래도 이번에 오작교로 밟히지 않은 게 어디냐?”
“맞아맞아. 용케 또 뽀뽀까지 했어요.”
“씨바알….”
서러움이 몰아쳐 눈물을 찔끔 흘렸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두 사람이 바닥을 기다시피 다가와 양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윤화는 등을 토닥이고 의진이 입에 초콜릿을 한 알씩 넣어주었다.
“다음에 또 그러면 그땐 형이 사겨줄게.”
“허어엉. 그안너어 이킹오아.(그만 넣어 미친놈아.)”
“아씨 김태형 왜 울고 지랄이야!”
“뭔데 너는 왜 우는데?!”
내 어깨에 머리를 박고 눈물을 터뜨리는 윤화와, 그녀에게 빽 소리치는 의진을 마지막으로 필름이 끊겼다. 잠에서 막 깨어나 몸을 일으켜 앉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알코올성 치매가 의심되었다. 병원에 가 봐야 하나, 끄응 앓으며 머리를 감싸는데 얼굴 앞으로 물 컵이 불쑥 튀어나왔다. 달달한 냄새가 풍기는 꿀물이었다. 미지근한 컵을 받아 땡큐, 인사하고 물을 마시며 고개를 들었다.
“푸우웁!”
“…….”
“무, 뭐야. 너 뭐야?”
“전정국이요.”
“아니, 아니. 왜 여기 있어?”
집 안에는 간밤의 기억 대신 정국이 있었다. 정국은 꿀물이 튄 티셔츠의 자국을 빤히 내려 보았다. 다급히 손을 내밀어 문질렀지만 닦일 리 만무했고 단단한 복근의 감촉만 손바닥에 생생하다. 놀란 가슴이 아직도 쿵쾅 뛰었다. 슬쩍 눈치를 보니 정국이 심기 불편한 얼굴로 가만 쳐다보고 있다.
“…사, 살면서 이런 경험 많이 있다…….”
“…….”
“사는 게 원래 그래.”
“허.”
기가 차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리는 정국을 못 본 체하고 침대를 벗어났다. 그의 앞에서 술에 취해 잠들긴 했어도 막 깨어나 팅팅 부은 얼굴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사람 몰골로라도 보이기 위해 욕실로 향했다. 어제 친구들과 술을 퍼부었던 자리는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윤화와 의진은 온데간데없고 유령처럼 정국이 나타났으니 여간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찬물을 끼얹고 나니 슬슬 정신이 돌아왔다. 그러자 잠들어있던 억울함이 밀려왔다.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걸 내버려두고 세면대에 두 손을 짚고 섰다. 쟤는 어떻게 내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왔지? 분명 나는 본가에 있다고 했는데 왜 여기로 왔지? …서럽고 아팠던 사람은 나인데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거냐고. 그냥 넘어가려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사과를 받고 싶은 모양이었다. 감정에 휩쓸려 몹쓸 짓을 했으니 내가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맞았다. 그날 밤처럼 갈비뼈 사이가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수건에 대충 물기를 닦고 나왔다. 정국은 식탁 의자에 앉아 깍지 낀 손을 입가에 대고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푹 수그렸다. 허벅지 위에 올린 손을 한참 매만졌다. 침묵을 깨고 정국이 묻는다.
“형 나한테 할 말 없어요?”
“…그 때 그건, 진짜 미안해.”
“이것도 살면서 많이 겪는 일이에요? 며칠 밤새고 정신없는 사람한테 키스당하는 거?”
“그게 키스는 아닌데……. 키스는 있잖아 막 이렇게, 이렇게.”
“됐고! 진짜 나한테 할 말 없어요?”
탁! 정국은 느닷없이 테이블 구석에 세워져 있던 탁상달력을 내 앞에 두었다. 손을 마주잡고 마구 비비다 달력을 쳐다봤다. 2월의 절반에 이른 오늘의 날짜가 눈에 들어왔다. 2월 14일. 과자세트 증정품답게 칸 안에 조그맣게 ‘밸런타인데이’라 적혀있다. 개미만한 글자가 눈에 들어오니 정국이 다그치듯 구는 상황이 전부 피곤해졌다. 손을 힘없이 다리 위에 떨어뜨렸다. 주먹을 쥐자 관리를 못한 손톱이 손바닥에 아프게 박혔다.
“미안해. 진심이야.”
“그거 말고요!”
“…너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거야? 진짜 나한테 왜 그래? 그렇게 싫었으면 걍 때리고 가. 나는 네가 그날 일 잊고 나랑 잘 지내려고 다시 연락한 줄 알았어. …근데 이제 난 너랑 친구 못해. 나 너 좋아해. 이런 말해서 미안해. 당연히, 당연히 네 입장에서 듣기 싫은 말이겠지만 나 너 진짜 많이 좋아해. 너무 좋아해서 존나 아팠단 말야. 씨발….”
“…….”
“……방금 너한테 욕한 거 아니, 너 울어?!”
달력에 꽂고 있던 눈을 들었더니 촉촉하고 반짝거리는 눈망울과 마주쳤다. 덕분에 흐르기 직전이었던 눈물이 쏙 들어갔다. 정국은 하씨, 중얼거리고 손등으로 눈가를 슥 훔쳤다. 버벅거리는 나를 쏘아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 가까이에 뭉쳐있던 검은색 패딩 점퍼를 뒤적였다. 품에 안고 돌아와 테이블 위에 쾅 내려놓은 것은 핑크색 하트모양의 박스였다.
“이게…….”
“크흥. 열어요.”
“어? 어. 웅.”
뚜껑을 여는 손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에서 삐용삐용 사이렌이 울린다. 김태형 과잉흥분상태. 졸도 직전. 뭐 대충 그런 방송이 웽웽 퍼졌다. 슬슬 걷어지는 뚜껑 아래로 아기자기한 모양의 고동색 물체가 보였다. 초콜릿! 어제 의진이 내 입에 잔뜩 쑤셔 넣던, 허나 그것과는 모양도 의미도 천지차이임이 분명한 초콜릿이었다.
“이게, 이게, 이게….”
“나보고 기다리라면서요? 이렇게 삽질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뭐, 뭘? 기다리랬어? 내가?!”
“형이!”
내가 언제?!
그렇게 따져 묻기엔 정국의 앞에서 제 정신이 아닌 적이 너무도 많다. 어째 블랙아웃을 자주 겪는다 싶었는데 의식의 감시를 피해 무의식이 열심히 난동을 부린 모양이었다. 창피해서 미칠 것 같은데 그 감정들을 넘어서는 환희가 가슴에 짜르르 퍼졌다. 행복이 MAX를 찍은 탓에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놈의 탈발렌이 뭐라고….”
“그럼 이건. 이게. 긍까.”
당황하여 어물거리는 것을 어찌 이해했는지 정국이 뚜껑을 앗아갔다. 모든 행동을 멈춘 채 눈알만 데굴데굴 굴려 그의 동작을 쫓았다. 정국은 뚜껑을 테이블 위에 내려두고 허공에 붕 떠있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손바닥을 마주대고 사이사이에 뜨거운 손가락을 얽어 움켜쥐었다. 두 팔을 쭉 뻗은 자세로 굳은 채 둥글게 휘어지는 눈을 멍하니 쳐다봤다.
“내가 형 좋아한다고요.”
마침내 김발렌의 오명을 벗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下
나는 타인에게 관심이 많지도, 그렇다고 아예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딱 흥미나 이익의 범주 안에서 오지랖을 부릴 때도 있었다. 지금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학기 초에 길에서 딱 한 번 스쳐본 적이 있는, 이름도 모르는 저 남자가 아니었다면 오늘은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그의 얼굴이 잘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한 달 만에 보는 남자는 여전히 훌륭한 외모였으나 전과는 달리 심상찮은 표정이었다. 그의 시선은 맞은편의 두 사람에게 머무르다 앞에 놓인 머그컵으로 향했다. 몸통을 가로지른 테이블의 경계선 아래로 남자의 두 손이 끊임없이 서로를 쥐어뜯고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남겨진 남자는 입술을 깨물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테이블에 쿵 엎어졌다. 부딪치는 소리가 꽤 커서 흠칫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한동안 미동이 없는 머리꼭지를 가만 지켜봤다. 곧 웅크린 등이 연신 들썩거렸다. 대리석 바닥에 눈물이 한두 방울씩 뚝뚝 떨어졌다. 카페에서 틀어놓은 잔잔한 음악에 훌쩍이는 소리가 섞였다.
남자는 몇 곡이나 흘러간 후에야 고개를 들고 목을 뒤로 젖혔다. 반쯤 내려뜬 젖은 눈이 애처롭다. 예쁘다, 보다는 묘하다. 한 마디로 ‘잘 생겼다’고 길게 말하자면 ‘짙고 곧은 모양의 눈썹과 허공의 어느 지점을 응시하는 촉촉한 눈매, 유려하게 휘어져 높게 뻗은 콧대 아래 질끈 깨물어 말려들어간 입술의 모양이 기가 막힌 얼굴’이다. 그가 천장을 향해 한숨을 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틀비틀 걸어 카페에서 벗어난다. 그가 입에 대지도 않은 커피 잔만 테이블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남자의 처연한 얼굴과 흔들리는 등이, 억누른 울음소리가 며칠 째 머리채를 꼭 붙들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보다 임팩트가 컸는지 시도 때도 없이 그를 떠올렸다. 헛것처럼 아른거리는 남자가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끈질기게 가슴을 콕콕 찔러대는 통에 잠을 설치기도 했다. 밤마다 뒤척이다 결국 그가 홍보하던 동아리를 찾았다. 5월에 가까운 날짜임에도 동아리에서는 흔쾌히 나를 받아주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남자는 잠정 휴식중인 상태였다. 그가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몰라 시간이 날 때마다 동방을 찾았다. 덕분에 동아리 선배들에겐 예쁨을, 학과 선배들에게는 눈총을 받았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를 다시 볼 수 있는 가능성이 1%라도 있다면 졸업까지 동방에서 존나게 버틸 수 있었다. 그 남자를 다시 보고 싶다.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는지 이유를 묻고 싶었다. 막상 만나게 되면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할 질문이었으나.
종종 술자리에서 남자의 이야기가 나왔다. 무소식인 그를 기다리는 동안 두루뭉술하게나마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다. 스물 두 살이고, 정문 근처에 살며, (무표정이)서늘한 외모에 비해 하는 짓이 곰살맞아 두루두루 예쁨을 받는다는 것. 덕분에 장기간의 잠수에도 동아리에서 퇴출되지 않는다고. 그를 알아갈수록 호기심이 커졌다. 어떤 사람일까? 너무 자주 떠올려 모서리가 살짝 닳은 얼굴이 꿈에 나오기까지 했다. 이제 룸메이트 몰래 속옷을 빠는 일에는 도가 텄다.
쾌감, 환희, 감격과 같은 감정은 지금껏 무엇이든 적당히 임해왔던 나로선 미미하게만 겪어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남자를 다시 마주한 순간에는 강렬한 흥분에 사로잡혔다. 저 얼굴 때문에 몽정을 몇 번이고 했으면서, 이유도 생각도 않고 맹목적이었던 기다림을 이제와 정의 내릴 수 있었다. 나는 저 남자에게 꽂혀버렸던 거다. 대책 없이 날뛰는 심박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형은 가만히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갭이 상당히 큰 편이었다. 조개처럼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만사가 무료한 천 년 묵은 호랑이 같았고 네모진 입매를 하고 히히 웃을 때는 기분 좋은 강아지 고양이 랫서팬더(등등 세상의 모든 귀여운 생명체) 같았다. 그리고 지금, 그간의 기다림을 보상하듯 얼결에 만들어진 술자리. 내 손바닥에 턱을 올리고 눈을 감은 채 방실방실 웃는 형은…….
“형 취했어요?”
“어어, 취했어요. 고맙다….”
기분 좋은 곰돌이인가? 손가락에 닿는 말랑말랑한 볼을 세게 꼬집고 싶었다. 형이 언제 눈을 뜰지 몰라 눈치를 보며 심호흡을 했다. 상상 이상의 주량을 예상했으나 실제로 그가 마신 양은 딱 보통 수준 정도였다. 더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연락처를 교환했으니 앞으로도 기회는 많다 자위했다.
“어디 사세요?”
“나……. 정국이 맘속?”
이 형 미쳤나봐. 아무래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어디 가서 뺨만 맞으면 다행일 멘트를 중얼거리며 얼굴을 비비적거린다.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이 모든 걸 용서했다. 아암. 이 얼굴을 누가 때려. 손을 내민 채로 어렵사리 형의 옆에 가 앉았다. 까닥거리는 머리를 한쪽 벽에 기대놓고 짐을 챙겼다. 형은 아무리 집을 물어도 대답은 않고 엉뚱한 소리만 줄줄 뱉었다.
기숙사까지 가는 길은 꽤나 고되었다. 지나치는 사람들마다 한 번씩은 나를 돌아보았다. 목에 가방 두 개를 걸고 만취한 남자를 둘러업은 모양새는 남이 보기에도 힘겨운 가 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기숙사 건물 앞까지 와서 벤치에 형을 내려놓았다. 앉혀둔 몸이 계속 옆으로 기울기에 옆에 앉아 어깨를 내주고 나도 형의 머리에 기댔다. 잠꼬대인지 술주정인지 또 무어라 중얼거린다.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말을 걸었다.
“형, 나 어때요?”
“…….”
“전정국 어때?”
“좋아….”
오 갓! 앞니로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지만 입 꼬리가 귀에 걸릴 것처럼 찢어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쿵쾅거리는 심장을 따라 어깨가 바들바들 떨렸다. 전정국이 좋단다! 자고로 술에 취했을 때 하는 말이 가장 진실한 속내인 것이랬다. 혹시 마음 잘 맞는 동생으로 좋단 걸까? 조금 더 캐내기 위해 목을 가다듬는 순간 어깨가 가벼워졌다. 형이 돌연 머리를 뒤로 쭉 빼고 몸을 세웠다. 억지로 부릅뜨느라 짙게 쌍꺼풀이 진 눈과 마주쳤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느냐 할까봐 눈앞이 아득했다. 이어진 말은 예상외의 것들이었다.
“걔 너무 예뻐. 막 애기같애. 근데 허벅지가. …봤냐? 몸이 막. 지가 켄타우로스야? 얼굴은 온실인데 몸이 야생이야. 정국이는……. 1톤짜리 탱탱볼. 동글동글 귀여운데 튈 때마다 나 깔려 죽을 거 같아. 통? 통?!”
“……형?”
“암튼. 암튼. 이거 비밀이다. 걔 내가 꼬실 거야. 그니까 기다려.”
…이런 엉큼한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거하게 희롱을 당하고 아찔한 정신을 수습했다. 만약 내일 아침에 형이 모든 걸 기억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를 대신하여 창피함에 온 몸을 비틀었다. 통통 소리와 함께 형이 정수리로 두 번 갖다 박은 가슴팍이 아팠다. 알아서 줄줄 내뱉는 것이 감사하면서도 초면에 들을 말들은 아닌 것 같아 입 안이 썼다. 속마음을 알고 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
형은 정신이 든 건지 이 또한 술주정에 불과한 것인지 다다다 말을 쏟아내고서 벌떡 일어났다. 노래를 부르고 난리를 피우기에 정신 차렸으면 형 가방이나 메고 가시라고 목에 걸어주었다. 금방 얌전해진 형이 무거워, 힘들어, 잉잉거렸다. 비죽 튀어나온 입술이 사랑스럽다. 이름을 알기도 전에 쓰였던 콩깍지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형은 다행히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 후로도 자주 술을 마셨다. 다만 형의 주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을 때가 대부분이라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 했다. 형은 늘 아쉬운 듯 입맛을 쩝 다시면서도 순순히 자리를 정리했다. 어쩌다 그의 의중을 알고 싶을 때는 마음껏 마시게 두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형이 주로 읊어대는 말들은 매우 뜨겁고 열렬했다.
“정구기 좋아.”
“전정국 내꺼.”
“…정국이 몸매가……. 어쩌고저쩌고.”
그 외에도 간혹 지나간 사랑들에 대해 구구절절 고백하기도 했다. 형은 기분이 좋을 땐 검지를 편 양 손으로 허공을 찌르며 엉덩이를 흔들었다. 기분이 나쁠 땐 맨 정신인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전자는 전정국 핫바디 나이스바디를 외칠 때였고 후자는 김발렌이라는 사람을 욕할 때였다. 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얼굴도 모르는 이를 헐뜯다 너무 이입한 나머지,
김발렌 씨발새끼! 개 같은 놈이!
외치기도 했다. 어차피 형은 기억하지 못할 거라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었다. 그 때마다 형은 너무 이상한(이라고밖에 표현이 안 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후 형과 캠퍼스를 걷다 우연히 마주친 형의 친구들에 의해 김발렌이 형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미 쌍욕을 네댓 번쯤은 쏘아댄 후였다. 그에게는 모르는 체했다. 문득 죄책감이 몰려올 때도 있었으나 이게 다 형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참사랑에서 비롯된 것이라며 애써 무시했다. 꼬부라진 발음으로 김발렌의 역사에 대해 줄줄이 들은 것은 며칠 뒤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밸런타인데이에 정국이한테 고백할거야.”
“우리 그냥 지금 사귀면 안 돼요? 꼭 그 때 고백해야 해요?”
“응. 그래야 탈발렌이야.”
“…아휴.”
결연한 의지로 번뜩이는 눈을 보며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미 형한테 홀딱 넘어갔다고요. 불만을 꿀꺽 삼켰다. 형이 원한다니 참아주기로 한다. 솔직히 앞으로 그가 벌일 것들이 기대가 되기도 했다.
동아리의 왕고쯤으로 여겨지는 K누나에게 들킨 것은 막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을 무렵이었다. 내가 티를 낸 건지 누나가 눈치가 빨랐던 건지, 동방에 둘만 남았을 때 그녀가 대뜸 ‘너 김태형이랑 뭐 있지?’ 물었다. 휴대폰을 들여다보며 심드렁하게 묻기에 밥 먹었냐 정도의 말인 줄 알았다. 시집을 들여다보고 있다가 무의식중에 넴, 대답하고 삼초쯤 뒤 의자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 어, 어, 어떻게 알았어요?!”
“너네 완전 티나. 사귀는 거야?”
“아뇨? 형은 몰라요.”
“뭐 있다며? 김태형도 너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건 저도 알아요.”
휴대폰에서 눈을 뗀 누나가 인상을 쓰고 쳐다봤다. 안경알 안쪽에서 날카로운 눈이 빛나는 듯한 기분이다. 그게, 실은요……. 누나가 물은 것도 아닌데 순순히 지금까지의 일을 실토했다. 장난스러울 때도 있지만 매사에 신중을 기하는 그녀의 성품을 믿었다. 내 말의 틈마다 깔깔 웃거나 손뼉을 쳐대던 누나가 이야기 끝에 한 마디 하지만 않았다면 그녀를 100% 신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 근데 아쉽다. 태형이 내가 잡아먹으려고 했는데.”
“네?!!”
테이블을 두 손으로 내려치며 기겁을 했다. 손바닥에서 전기가 찌릿 타고 올랐다. 누나는 입을 크게 벌리고 배를 부여잡았다. 웃는 얼굴이긴 한데 음소거 버튼을 누른 듯이 소리가 나지 않았다.
“누, 누나, 누나 정말 음험한 사람이네요?!”
“아악! 아학학!”
그제야 비명을 지르는 건지 웃는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소리가 그녀에게서 튀어나왔다. 나는 빠르게 가방을 챙기고 테이블에 박을 듯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히 계세요! 외치고 동방을 뛰쳐나왔다. 어떻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어! 나는 형이 거시기를 만지는 꿈을 꾸고서 죄책감에 눈물을 짜면서 빨래를 했는데! 이미 한 손으로는 꼽을 수 없는 설움의 새벽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발을 팍팍 굴러 계단을 오르는데 아래서 누나의 뭉툭한 목소리가 들렸다. 막 여섯 번째 계단을 밟았을 때였다. 정국아! 누나가 도와줄 거 있으면 말 해! 일곱 번째 계단에 발을 올리려다 말고 몸을 돌려 뛰어내려왔다. 동방의 철문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뭘 도와줄 건데요?”
“뭐든 간에.”
“그래도 태형이형은 내가 먹을 거예요.”
“아아악! 아하학!”
형은 아주 효과적으로 나를 공략했다. 날이 갈수록 더 예뻐지는 얼굴로 쉴 새 없이 심장을 폭행했다. 만날 때마다 나 어때? 물으며 실룩거리는 입이 깜찍했다. 예뻐요. 멋있어요. 등등 시시하게 대답하고 나면 더 다양하고 솔직하게 느끼는 바를 표현하지 못하는 어휘력이 한스러웠다. 형이 잘난 만큼 나도 멋진 남자가 되고 싶어 아침마다 운동을 했다. 형이 좋아하는 허벅지를 ‘예쁘고 섹시하고 튼튼하게’ 유지하는 게 중요했다. 형은 술에 취하면 늘 두어 번은 내 가슴에 머리를 들이받았기 때문에 그의 머리통이 보다 탄력 있게 튕겨나도록 푸쉬업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K누나에게 추천받은 마스크 팩을 책상 서랍에 가득 채우고 이삼일에 한 번씩 붙였다. 형이 좋아하는 요소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다 이 말이다.
그런데, 대관절 우리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형과 만나기로 한 크리스마스 당일. 만반의 준비를 위해 K누나를 불렀다. 형은 이미 나를 좋아하는데 굳이 도움을 받을까 싶기도 했으나 그녀의 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내가 전한 것을 토대로 형의 취향을 짐작한 누나가 ‘퓨어 앤 와일드다 이거냐’ 중얼거렸다. 형도 그렇고 누나도 그렇고 이 동아리 사람들은 철이 한참 지난 것 같은 대사를 치는 게 유행인가 싶었다. 어쨌거나 누나와 함께 점심부터 곳곳을 돌아다니며 쇼핑을 했다. 계산을 하는 족족 내 옷차림도 변했다. 데이트 준비는 순탄하게 이루어졌다.
카페에서 마지막 당부를 듣고 나오니 해가 져 있었다. 낮보다 더 매서워진 추위에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누나는 밖에 나서자마자 달달 떨면서 ‘정국아 근데 그 옷엔 목도리를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중얼거렸다. 이 누나 목도리 뺏으려는 거구나, 생각하다 춥다는 핑계로 형한테 달라붙을까 싶은 마음에 돌아선 누나를 불러 세웠다. 내가 입고 나왔던 옷들을 양 손에 들고 있기에 대신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누나를 보내고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옆에 있다는 말에 고개를 돌리니 짙은 금발로 염색한 형이 서 있었다.
신인가?
형의 등 뒤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표정이 절로 헤벌쭉 풀어졌다. 추운 것도 잊고 손을 번쩍 들어 흔들었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있어 금색 머리칼이 더 튀었다. 한쪽 귀에 길게 걸린 귀걸이는 전에 한 번 내 손이 닿았던 것이다. 도저히 일반인이라고 볼 수 없는 자태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흘끔거리는 것도 같았다. 빨랫감을 비틀어 물을 짜내는 듯이 가슴이 조였다. 형이 귀엽고 예쁘고 섹시하고 멋있는 짓을 하면 늘 이렇게 아팠다. 심쿵사가 이런 식으로 맞이하는 죽음인가? 속으로 생각하며 그에게 훌쩍 다가갔다.
그러나 만난 지 10분 만에 형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처음엔 형 못지않게 신경을 쓴 나를 보고 넋을 놓은 줄 알고 뿌듯함에 취해 있었다. 상영 중인 영화가 아닌 앞좌석 시트 어딘가를 한참 응시하거나, 인중에 한 번 들이받은 다음에야 입으로 들어가는 숟가락을 보고서야 형이 지금 제 정신이 아닌 거구나 깨달았다. 내 말을 여러 번 놓치기에 그가 먼저 말을 걸어오길 기다렸다. 한 시간이 넘도록 조용히 광장 주변을 빙빙 돌고 있으니 그제야 시선이 닿았다.
형은 엉뚱한 질문들을 쏟아냈다. 온기를 품은 목도리가 내게 둘러졌을 때,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이라 생각했다. 아마도 형은 오늘 고백하겠다 마음을 먹은 것 같다고. 쌍방인 것은 나만 알고 있으니 긴장이 되어 정신을 놓고 있었을 법 했다. 술에 취한 형은 늘 밸런타인데이를 고집했지만……. 형이 말하기 어려우면 내가 해야지, 마음을 굳게 먹고 그의 눈을 직시했다.
용기 내어 꺼낸 말이 함성에 댕강 썰렸다. 그 다음에는 형에 의해서. 어둠 속에서 급하게 닿아오는 입술이 바싹 말라있다. 그 때까지도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다. 요즘 사람들 진도 먼저 빼고 교제 시작하는 건 빠른 것도 아니라던 엄마의 말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그러다 오랜 갈증이 퍽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옷깃을 쥔 손을 덮었다. 동시에 형이 쏙 빠져나갔다. 벌써요? 이른 후진에 놀라 멍청히 있으니 주변이 밝아졌다. 눈앞의 얼굴을 확인하고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형은 울고 있었다. 붉은 눈을 소매에 묻고 닦아내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무 감동스러웠나?
그러나 금방 형이 돌아서기 전 두고 간 말들이 지금까지의 상황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았다. 왜 울지? 왜 사과하지? 나도 형이 좋은데. 어딜 가는 거지? 정신을 차리니 금색 머리통이 인파를 헤치고 멀어지고 있었다. 다급하게 뒤를 쫓았지만 기어코 형은 나를 두고 갔다. 이 길바닥에, 한파 주의보가 내려진 서울 한복판에!
길거리에 홀로 남겨진 순간부터 ‘왜, 무엇이, 어째서?’ 따위의 질문들이 곁을 떠나지 않았다. 형과 함께 걸었던 길을 새벽까지 뱅뱅 도는 동안에도 정답을 찾을 수 없었다. 발가락에 감각이 없어졌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는 형의 냄새가 나는 목도리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엉엉은 아니고 아주 조금, 서운하고 서러워서.
―…… 제정신이 아니었나봐 ……
형이 보낸 문자가 아홉 갈래로 가슴을 할퀴었다. 문자를 읽은 순간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그렇게 세게 던지지도 않았는데 잘못 부딪혔는지 액정이 박살났다. 까맣게 죽은 휴대폰을 끌어안고 침대에 몸을 던져 팡팡 발을 굴렀다.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다던데 나는 사형수 쯤 되려나. 그러다 차라리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분으로 휴대폰이 멀쩡하다면 전화든 문자든 형에게 구질구질한 연락을 계속 시도했을 것이었다.
휴대폰을 새로 장만하기 위해 단기 아르바이트를 지원했다. 하루라도 쉬는 날이 있으면 형 생각에 밥도 들어가지 않아 주 6일을 일했다. 한 달도 안 되어 통장에 찍힌 100만원을 확인하고 당장 휴대폰 대리점으로 달려갔다. 새로 개통한 것을 들고 와 가장 먼저 한 것은 국그릇에 물을 받아 창가에 두고 무릎을 꿇는 일이었다. 맞은편 아파트가 달을 가린 것이 아쉬웠지만 대충 기도를 하는 흉내는 냈다. 경건한 마음으로 진작 외워둔 형의 번호를 누르다 엄두가 나지 않아 메시지를 보냈다.
―형 잘 지내요?
―응. 너는?
돌아오는 대답이 너무도 허무해서, 싱크대에 물을 부어 버렸다.
여전히 그날의 의문이 풀리지 않았으나 모질게 형과의 연락을 끊지 못했다. 크리스마스의 눈물을 매단 처연한 얼굴이 너무 예뻤기 때문은 절대 결코 맞았다. 안 본 지 한 달이 넘어 눈에 가시가 돋친 듯했다. 내 옆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형은 얼굴을 무기로 쉼 없이 나를 아프게 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절절한 감정을 앓았다. 참을 수 없을 땐 형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앞서 깨달았듯 나는 참을성이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하루걸러 하루 꼴로 전화나 메시지를 보냈다. ‘제 정신이 아니라서’ 입을 맞추고 도망가 버린 형은 꼬박꼬박 상냥한 답을 돌려주었다.
K누나는 좀만 더 기다려보라고 하지, 형은 헷갈리게 굴지. 속 터지는 날들이 이어졌다. 어느 날부터는 이 형이 밸런타인데이에 서프라이즈 고백을 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을 하기 시작했다. 맞아. 형이 밸런타인데이에 고백하려 했는데 내가 크리스마스에 운을 띄워서 승질이 났나봐. 이 쯤 되면 형이 약속을 잡으려 할 때가 됐는데, 안달이 나 계속 거취를 물었다. 하지만 형은 또다시 내 가슴에 스크래치를 남겼다. 심심하냐고? 나중에 보면 된다고?… 형 솔직히 나 갖고 논 거죠. 물음이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으나 꾹 참았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어 싱겁게 전화를 끊었다.
기다림에 지쳐 포기를 해야 하나, 아님 내가 시원하게 고백하고 까일까 고민하던 밤 형에게 전화가 왔다. 남자친구에게 초콜릿을 만들어준다고 법석을 떠는 여동생 덕에 온종일 그의 보조로 초콜릿 제조에 혼을 쏟은 날이기도 했다. 형에게 앙금이 남아있던 터라 퉁명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묵직하고 모난 곳 없이 둥근 목소리를 기대했으나 날카로운 여자의 음성이 넘어왔다.
―야이! 개자식아!
“…누구세요?”
―네가 어떻게, 어떻게 김태형을!
울먹거리는 음성 사이사이에 형과 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형을 ‘김발렌’이라 불렀던 이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여자의 목소리가 점차 잦아들고 멀찍이서 들리는 형의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파묻히다시피 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정구가, 정구가. 만취한 형 특유의 어투가 선명해졌다.
―정구가, 정국이야?
“왜 그래요? 너무 취한 거 아냐?”
―정국아.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너 진짜 그르믄 안 된다. 이거 오늘 말해야 하는데. 오늘….
“그러면 안 된다고 오늘 말해야 한다고?”
―아니이! 아아. 아니다. 짐승남 정국이는 연상을 좋아하지.
이번에야말로 오늘이다! 직감이 멱살을 쥐고 맹렬히 흔들며 오늘을 놓치면 안 된다 일렀다. 형은 연상이 아니냐고요. 전화로 할 말도 듣고 싶은 말도 아니다. 용수철 튕기듯 파다닥 침대에서 내려와 휴대폰을 어깨에 끼고 옷장을 열어 겉옷을 꺼냈다.
“형, 형. 내가 갈게요. 기다려요. 내가 갈게.”
―언넝 와. 오늘 올 거…,
―제 칭구들이 취했어요. 죄송함니다아.
곧 다른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잠시 넋을 놓고 서 있다가 시간을 확인했다. 12시 30분. 2월 14일을 막 맞이한 시간이었다. 외투에 팔을 꿰어 넣으며 현관으로 달려가다 다시 돌아와 식탁 위에 놓인 핑크색 상자를 챙겼다. 거의 모든 과정에 내 손이 닿았으니 내가 만든 초콜릿이나 마찬가지다. 바깥의 소란 때문에 방에서 나오는 동생을 마주치기 전에 집에서 뛰쳐나왔다. 야 오빠새끼야! 벼락같은 불호령이 등 뒤로 아슬아슬하게 떨어졌다.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늘, 기필코 김태형의 밸런타인 징크스를 깨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