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헤어진 연인과의 재회가 반가운 사람이 있을까? 이별의 방식이 좋았던 나빴던 이미 끊긴 인연을 다시 마주하는 건 어쩔 수 없이 어색하기 마련이다. 전정국과 김태형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전정국에게는 최악으로 남아있는 그들의 마지막을 떠올려 본다면 더욱.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하루였다. 아주 작은 사건을 제외하면 말이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는 것. 은행의 보안 실수로 신상정보가 여기저기로 팔려나간 후 쉴 새 없이 오는 스팸 전화에 이골이 나있던 차였다. 02, 070은 물론 010으로 시작하는 번호도 칼 같은 수신 차단의 대상이었다. 차라리 무의식중에 받았다면 기분이 좀 나았을까? 전정국은 핸드폰에 떠 있는 열 한자리의 번호를 2초 만에 기억해내고 곧바로 받았다. 뇌가 이래라 저래라 지시를 내릴 틈도 없이 본능이 벌인 짓이었다.
“여보세요.”
‘…전정국씨 핸드폰 맞나요?’
“맞는데요.”
그런 주제에 먼저 아는 척을 하기는 싫었다. 핸드폰을 쥔 손이 벌벌 떨리고 목소리에 물기가 잔뜩 묻어나면서도 그랬다. 목구멍을 타고 울컥 넘어오는 감정들을 꾸역꾸역 삼켜내며 상대방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씹어대던 입술에는 어느새 피가 맺혀 있었다.
‘정국아 나 태형이야. 기억 나?’
나고말고요. 내가 어떻게 그 이름을 그 목소리를 잊을 수 있겠어요? 정국은 핸드폰을 터뜨릴 듯 세게 쥐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이별 후의 공백은 생각보다도 길어서 숨 막히는 어색함이 찾아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시간은 흘렀고 상황은 변했다. 마른 침을 넘긴 정국이 버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기억나면요?”
‘…….’
“할 말 없으면 끊을 게요.”
‘좀 만날 수 있을까?’
오 마이 베이비
짜증난다. 뭐가 짜증 나냐면 벨도 없이 3초 만에 전화를 받은 것도 모자라 덜컥 만남을 수락하고 김태형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나왔다는 게. 조용한 카페가 정국이 부산스럽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로 가득 찼다. 그나저나 웃기는군. 전정국씨라고? 기억이 나냐고? 김태형은 일부러 내 속을 박박 긁어놓으려고 저렇게 말했을 게 분명했다. 신경질적인 얼굴로 태형과의 전화를 곱씹던 정국은 제 앞으로 사람이 다가오는 줄도 몰랐다. 의자 끄는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린 정국이 테이블을 두드리고 긁어대던 손을 아무렇지 않은 척 주머니에 꽂아 넣었다. 꼴에 가오를 잡아보겠답시고 그런 거였다.
6년 만에 재회한 염병둥이… 아니 옛 연인은 생각보다 덤덤한 얼굴이었다. 핸드폰을 통해 넘어오던 목소리가 망설이는 것처럼 들렸던 건 역시 착각이었나 보다. 천하의 김태형이 그럴 리가 없지. 정국은 티 나지 않게 흘긋대며 태형을 살폈다. 착해 보이는 얼굴 속 어쩐지 새침한 인상과 마른 체형은 그대로였다. 키는 좀 큰 것 같기도 하고… 거기까지 생각하다 고개를 돌렸다. 김태형이 그대로면 뭐 어쩔 건데? 속이 치밀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화려하게 물들였던 머리가 차분한 갈색으로 덮어져 있었고 얼굴이 좀 상한 것도 같고, 그리고…
“오랜만이야.”
“…….”
“전화 받을 줄 몰랐어. 나올 줄은 더 몰랐고."”
“용건이나 빨리 말해요.”
확실히 김태형은 달라져 있었다. 달라진 건 그의 외향이나 풍기는 분위기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곁에는 다른 사람이 함께 있었다. 정국은 일부러 놀라지 않은 척 하려 태형의 말을 잘라먹었다. 태형의 품에 철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있던 '그 사람'이 정국을 향해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
“아바으바밥. 뱌뱌.”
눈앞이 흐려지는 듯한 기분에 정국이 눈을 질끈 감았다. 김태형은… 웬 아기를 안고 나타났다. 김태형과의 재회를 여러 방면으로 떠올려보기는 했지만 수많은 상상 속 이런 장면은 없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이 생겼다고 했다면 좀 나았을 것이다. 그래 물론 얘도 다른 사람이기는 한데. 정국의 감은 눈이 움찔대며 그의 기분을 대변했다. 정국이 고뇌하는 동안에도 아기는 계속해서 옹알거리고 있었다. 순간 울컥하며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 틈새로 눈물이 비칠 뻔 했으나 초인적인 참을성을 발휘한 정국은 꾹 참아냈다. 일단 얘기를 들어보자. 김태형의 애가 아닐 수도 있잖아? 피치 못할 사정은 김태형에게도 충분히 찾아올 수 있는 거니까. 행복회로를 가동하던 정국이 겨우 눈을 뜨고 태형을 바라봤다. 시선은 자연스레 태형의 품속에 안긴 아기에게로 향했다.
아기와 눈이 마주치자마 욕지기가 튀어 나올뻔한 걸 또 겨우 참아냈다. 입술을 씹으며 억지로 입 꼬리를 올린 정국은 생각했다. 쟤는 김태형의 애가 확실하다. 아기가 저렇게까지 이목구비가 뚜렷할 수는 없다. 저렇게 속눈썹이 길고 눈이 탁 트여있으며 코도 높고 웃을 때 네모입이 되는 건 김태형의 유전자가 큰 힘을 발휘했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KTX를 타고 봐도 김태형의 애가 맞았다. 정국을 놀리기라도 하듯 아기의 코끝에는 귀여운 점이 찍혀있기 까지 했다. 지금 복잡한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김태형과 같은 위치에 점이 있다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확인 사살을 해줄 필요는 없었는데 당해버렸다. 김태형은 어쩌자고 지 자식을 데리고 내 눈 앞에 나타난 걸까? 약 올리려고 그런 거라면 이미 완벽하게 성공했는데.
“네가 무슨 말을 할 줄 알아.”
“무슨 말을 할 것 같은데요?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태형이 어렵게 입술을 열고 먼저 말을 걸어왔지만 돌아오는 건 신경질적인 대답뿐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김태형은 아주 어린 시절의 저를 실컷 희롱하다 먹고 버린 천하의 파렴치였다. 하필이면 그런 태형이 첫사랑이어서 더 그랬다. 누가 남자의 첫사랑은 무덤까지 간다는 개소리를 하던데… 정국의 상황은 좀 더 심했다. 백 번을 죽고 다시 백 번을 환생해도 다시 김태형을 찾을 만큼 사랑했다. 말인즉슨 정국의 사랑은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다. 정국의 사랑은 태형이 없는 동안 다양한 형태로 변해가며 이어져 왔다. 어쩔 때는 사랑이 크기도 했고 어쩔 때는 증오가 크기도 했다. 그래도 결국 답은 김태형이었다. 근데 그런 김태형이. 저를 쏙 닮은 아기를 안고 나타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애는 내 애가 맞아.”
“말 안 해줘도 그런 줄 알겠거든요?”
“사정이 좀 있었어. 아니… 어차피 너한테는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다 생략하고 본론부터 말할게. 나 좀 도와줘.”
“와.”
정국은 기절하기 직전이었다. 수십 수백 번씩 돌린 시뮬레이션에는 당연히 이런 장면도 없었다. 6년 만에 갑자기 애를 데리고 눈앞에 나타나더니 이제는 자기를 좀 도와달라고? 입가가 뻣뻣하게 굳었다. 싸가지 없는 말투나 뻔뻔한 표정 하며 김태형이 맞기는 한데. 혹시 기억이라도 잃었나? 지금 누구한테 도와달라는 건 줄은 알고 있는 건가? 볼 안쪽 살을 질겅질겅 씹어대던 정국이 태형을 쏘아 봤다. 형. 혹시 염치가 뭔 줄 알아? 잔뜩 비꼬는 말투에도 태형의 얼굴은 변함없었다. 이게 진심 같아 보여서 더 어이가 없었다. 나를 그렇게 떠나가놓고. 삼일 밤낮이 뭐야, 그렇게 떠난 후 삼 년 내내 미친 사람처럼 자기를 찾을 땐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지금 와서 이럴 수가 있나? 그 와중에도 화난 표정을 보이기 싫어 고개를 돌린 정국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속도 모르고 쪽쪽이를 빨고 있는 말간 아기의 얼굴에 화병이 도질 것 같았다.
“할 말은 그게 다예요?”
“잠깐 지낼 곳이 필요해. 나는 괜찮아. 지아가 지낼만한 곳이면 돼.”
“할 말은 그게 다냐고.”
“싫으면 지금 거절해. 나도 괜히 시간 낭비하기 싫어.”
“…….”
주머니 속에 구겨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와중에도 지아가 애 엄마의 이름인지 쪽쪽이를 물고 있는 아기의 이름인지 가려내려는 제 머릿속에 어이가 없었다. 분노인지 허탈감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감정에 속이 들끓었다. 6년 만에 찾아와 저딴 식으로 말하는 것 보다 나에게 할 말이 그저 도와달라는 것뿐이라는 게 좀 더 서러웠다. 그거 말고, 아직도 나를…
입도 대지 않은 커피 잔의 옆면에 물방울이 흐르는 걸 보며 겨우 생각을 멈췄다.
“앞으로 연락하지 마세요.”
“…그럴 거야.”
“내 번호 어떻게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워요.”
그러면서도 내심 자신의 번호를 기억했으면 했다. 태형이 당연히 그러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사람 마음이 괜히 그랬다. 아마 오늘 이후로 김태형이 전정국에게 먼저 연락할 일은 없을 것이다. 그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러고도 남았다. 김태형을 다시 만난다면 내가 받은 상처만큼 돌려주겠다는 다짐을 했었는데. 그걸 다 돌려주지는 못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무리가 된다고 생각하니 좀 불편했다. 지겹게 이어온 사랑이라는 이름의 미련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테이블 위에 던져뒀던 키를 잡아채고 몸을 일으킨 정국이 태형을 내려 봤다. 분명히 김태형이 맞기는 한데 내가 알던 김태형은 아닌 모양이다. 아무 대답도 않은 채 그대로 몸을 돌려 카페를 빠져 나왔다. 알 수 없이 솟구치는 열에 괜히 타이어를 걷어찼다. 경보음이 요란스럽게 울려대고 여기저기서 정국을 흘겨봤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카페 유리창 안에서 태형이 아기를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모습에 속이 치밀었다. 씨발. 씨발. 씨발. 이런 정국을 본다면 태형은 아마 놀랄지도 모른다. 애기가 욕을 다 하네? 어쩌면 비웃을지도. 속도 없다, 전정국. 이 상황에서도 김태형을 떠올리고 싶냐. 자조적인 웃음을 뱉어낸 정국이 차를 몰고 자리를 떴다. 오늘의 일은 또 한참 동안이나 정국을 괴롭힐 게 분명했다.
꿈에 태형이 나왔다. 정국의 눈앞에 두 인영이 있었다. 앳된 얼굴의 어린 정국이 쌩 양아치처럼 분홍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태형의 손을 잡고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8년 전, 정국과 태형이 처음 만났던 순간이었다. 당장 그 손을 놓고 도망쳐! 그들을 바라보던 25세 전정국이 잡은 손을 끊어버릴 기세로 달려가 외쳤지만 그들에게 정국은 보이지 않는 듯 했다. 17세 전정국 군은 19세 김태형에게 완전히 빠져 하트를 뿜어대고 있었다. 곧 25세 전정국 청년도 하트 뿜어내기에 합류했다. 아마 시간을 돌려 다시 김태형을 만난다고 하더라도, 둘의 끝이 어떤지를 알게 되더라도 김태형을 사랑하지 않는 건 불가능이었다. 이제는 기억이 흐릿해질 법도 한데 꿈속의 태형은 너무나 선명했고 사랑하기에 충분히 아름다웠다. 꿈의 배경은 순식간에 바뀌었고 곧 지울래야 지울 수 없는 익숙한 장면으로 전환되었다. 17세 전정국 군은 19세 전정국이 되었고 19세 김태형은 21세 김태형이 되어 있었다. 그들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나는 형을 사랑했는데요? 형이 떠나면 저는 어떡해요?’
‘잘 생각해 봐. 사랑했다고 하지만 사랑이 아닐 수도 있어. 네가 착각했던 거야.’
‘아니요. 사랑이 맞아요. 형 제발 가지 마세요.’
‘사랑이 맞아도 어쩔 수 없어. 정국이 너 연애소설 많이 봤지? 거기에는 이렇게 힘든 사랑도 있었잖아. 너 지금 그거 하고 있는 거야.’
‘형!’
‘그리고 나한테는 사랑이 아니었어. 잘 있어. 안녕~!’
태형은 그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홀라당 날라버렸다. 떠나는 그 때에 선글라스를 낀 바람에 사랑해 마지않던 눈을 보여주지도 않았다. 그게 좀 억울했다.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눈에서 김태형의 진심을 읽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김태형을 만난 2년 간 정주고 맘 주고 몸도 줘버린 전정국은 그렇게 먹고 버려졌다. 태형과 함께 했던 2년 동안 그에게 쏟아 부운 사랑의 크기가 생각보다 컸던 모양이다. 정국은 그 이후로는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가끔씩 떠오르는 김태형 때문에 허공에 열을 내다 함께 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사랑을 되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는 김태형의 등을 바라보며 붙잡지도 못하고 엉엉 우는 19세 전정국군을 보며 꿈이 마무리 되었다. 지난 6년 간 수도 없이 꿔온 꿈인데 유난히 후유증이 길었다. 마음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그 이후로는 김태형을 잊고 살았다. 그렇게 살려고 했다. 6년 중 3년은 그의 흔적을 찾으며 구질하게 굴었지만 태형은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어디서도 태형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부터는 그냥저냥 지냈다. 김태형이 떠오르면 입으로는 토하듯 저주를 뱉어내면서도 속으로는 이게 다 미련 때문이란 걸 알았다. 김태형이 자신을 먹고 버린 지 몇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사랑해서 미칠 것 같았다. 김태형과 관련된 주변인들을 모두 끊어내고 그와 연관된 모든 것들과 멀어졌는데도 불구하고 잘 잊히지도 않았다. 진짜 지긋지긋해. 치를 떨다가도 생각은 곧 지긋지긋하게 보고 싶다는 방향으로 튀었다. 김태형이 떠난 후 전정국의 삶이 그랬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정국에게도 통한 모양이었다. 언젠가부터 정국의 사정을 아는 친구들이 이제는 좀 괜찮냐고 물어오면 태연하게 괜찮은 척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 뭐, 그딴 새끼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지금은 그런 사람이 있었나? 할 정도지 뭐.’
‘……’
‘술 좀 더 시킬까.’
술자리를 가질 때마다 이 대화 이후의 기억이 없었다. 혼자 술을 퍼마시다 취해서 엎어져 울고불고 대리를 불러다 집으로 옮겨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술도 잘 마시지 않았다. 차라리 약이라도 있으면 좋았을 텐데. 김태형을 알았던 기억을 모두 지우고 싶을 정도였다. 실제로 병원을 찾았던 적도 있었지만 의사 선생님이라고 어떻게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로 제 속에서 김태형을 지운다면 돌이킬 수 없이 슬퍼질 거란 것도 알았다. 김태형이 돌아오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문제였다.
잠에서 깬 후부터 먹먹한 감정에 사로잡힌 정국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아무래도 정국은 태형을 거절하는 법 따위는 모르는 게 분명했다. 모든 빛이 사라진 새벽 세시 반, 핸드폰을 들어 지긋지긋하게 외우고 있던 번호 열 한자리를 눌렀다. 6년 만에 돌아온 주제에 핸드폰 번호를 그대로 쓰고 있다는 것도 짜증났다. 통화 연결음은 길게 가지 않았고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형도 잠들지 못하고 있었는지 잠긴 목소리에 피로가 뚝뚝 묻어났다.
“지금 어디에요?”
‘…….’
“도와 줄 게. 우리 집으로 와요.”
‘…진심이야?’
“형 아까 자존심 굽혀서 짜증났잖아요. 나도 지금 이러는 거 창피해서 죽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그냥 얌전히 내 말 좀 들어줘라.”
‘…….’
“오기 힘들면 내가 갈게요. 주소 문자로 보내요.”
대답이 들려오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여기서부터는 김태형의 선택이다. 정국은 문자가 오지 않으면 정말 모든 것은 끝맺으려고 했다. 많이 힘들겠지만 그러려고 했다. 마른세수를 하던 정국이 잘게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들었다. 주소 한 줄만 덜렁 적혀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자가 와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올라가려는 입 꼬리를 겨우 끌어 내렸다. 멀지 않은 곳에 태형이 있었다.
김태형이 밖에서 낳아온 애. 나랑은 아무 상관없는 애. 눈엣가시처럼 여겨질 줄 알았는데 그러기엔 애가 너무 예뻤다. 빌어먹게도 김태형의 얼굴이 고스란히 묻어있어 그랬다. 안정적인 폼으로 아기를 안고 있는 김태형과 그 품에서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뽀얀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들었다. 도무지 생각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앉아있는 태형을 룸미러로 바라보다 차를 몰았다. 정국의 차가 모텔 주차장을 부드럽게 빠져 나왔다. 김태형에게선 모텔의 싸구려 샴푸냄새가 훅 끼쳤다. 이런 게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태형을 비웃어 줘야 하는데 왜 이렇게 속이 상하는지 모르겠다.
“너 호구야?”
정적을 깬 건 김태형이었다. 정국이 미간을 구기고 룸미러로 눈을 올렸다. 태형이 다시 되물었다. 너 호구냐고.
“싸우자고?”
“며칠 지내다 무를 거면 여기서 관둬.”
“나보고 어쩌라고. 제발 내 도움을 받아 달라고 형한테 사정이라도 해야 되나? 내가?”
“난 확실히 하고 싶을 뿐이야.”
“이럴 땐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 아닌가.”
고개를 팽 돌리는 태형 때문에 울화통이 끓었다. 방금까지 그를 가여워하며 속이 상했던 걸 무르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태도로 나올 거면 왜 갑자기 나타나서 도와달라며 사람을 잠도 못 자게 만들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럼에도 태형에게 당장 내리라 말하지 못하는 건 전정국이 호구가 맞기 때문이겠지.
다행스럽게도 정국은 김태형과 그의 아주 작은 아기를 거둬들일 만한 경제력을 지니고 있었다. 25살에 부자가 된 정국. 태형을 잊기 위해 아득바득 살았더니 돈이 모였다. 어쨌든 정국은 좋은 방향으로 실연을 견뎌내고 있었다. 지금 지내고 있는 아파트가 신축인 것이 새삼 뿌듯했다. 번호키를 누를 때는 좀 울렁거리기도 했다. 이사 올 때까지만 해도 이곳에 태형을 들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당연히 그의 자식을 데려올 생각도 못했지만. 태형의 짐까지 모두 옮기고 나니 어스름하게 새벽 해가 뜨고 있었다. 주말이라 다행이었지 출근을 해야 했다면 일정이 왕창 꼬일 뻔 했다.
“방은 오른 쪽 꺼 쓰면 돼요. 이불 챙겨 줄 테니까 먼저 좀 씻어요. 아기는 내가 보고 있을게요.”
“아기가 아니고 지아야. 김지아.”
지아가 애 이름이 맞았구나. 괜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대충 고개를 끄덕인 정국이 지아를 받아 들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김태형 판박이었다. 그래서 예뻤다. 김태형 애 치고는 많이 하얀데 이건 엄마 영향인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금방 씻고 나온 태형은 피곤한 얼굴로 지아를 데려갔다. 이불을 깔아주고 침실로 돌아왔을 땐 여전히 꿈인 듯 했다. 옆방에 김태형과 그의 자식 김지아 양이 자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 그랬다.
그 날부터 육아가 시작됐다. 태형이 애를 데려온 것부터 일이 틀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 2년 동안 만났던 구남친과 함께 살게 되었는데 도무지 로맨스가 피어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덧 한 달이 흘렀고 김태형과 그의 딸 김지아 양은 전정국을 아주 야무지게 뜯어 먹었다. 집 제공에 배고프면 밥 해줘, 애 울면 달래줘. 지아가 새벽에 자다 깨면 일어나서 챙기는 것도 모두 정국의 몫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정국은 혼자 침실을 썼고 태형과 지아는 한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지아와 같은 방을 쓰면서도 저 우렁찬 울음소리에 깨지 않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지금까지 애를 어떻게 키워 온 거야? 정국이 출근할 동안 집안일을 해두기는 했지만 태형이 계속 뭐 없어진 거 있으면 난 줄 알라는 이상한 농담을 하는 통에 괜히 찝찝했다. 물론 태형과 지아를 지내게 한 것은 모두 정국이 자발적으로 벌인 일이었으므로 누굴 탓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건 그렇다 쳐도 김태형이 아주 망나니처럼 굴었다. 정국의 호의를 받아먹는 김태형의 태도가 아주 뻔뻔스러웠다는 말이다. 상전이 따로 없었다. 갑자기 고기가 먹고 싶다며 하루 종일 징징거리는 통에 한우를 사와다 구워 먹인 게 오늘 저녁의 일이었다. 물론 태형은 고기의 종류를 말하지 않았지만 굳이 특A등급 한우를 사온 건 모두 전정국 본인의 의지였다. 호구 전정국과 뻔뻔한 김태형의 조화가 아주 환상적으로 어우러졌다. 실컷 배를 불리고 바로 잠이 든 지아를 눕히고 돌아왔다. 태형이 나른한 얼굴로 티비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형 딸이라 그런가, 뭔 아기가 고기를 그렇게 잘 먹어요.”
“요즘 애들이 빨리 커서 그래.”
“고기 먹여도 되는 거 맞죠? 지아 몇 살이에요? 몇 개월이냐고 물어보는 게 맞나?”
“18개월 됐어. 간만 강하지 않으면 괜찮아.”
“그렇구나.”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한 지붕 아래 산다고는 해도 그렇게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다. 정국의 문제라고 하면 그간 꼭꼭 싸매왔던 태형을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치밀어 올라 길게 대화를 이어 갈 수 없었고, 태형의 문제라고 한다면 필요한 걸 요구하는 것 외에는 별로 얘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것 같아 그랬다. 그러다보니 정국은 좀 헷갈렸다. 지금 저와 태형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애초에 태형은 도움을 구했을 뿐인데 덜컥 집으로 들이고 그에게 모든 걸 퍼주는 자신이 후회할 짓을 하고 있는 것뿐인지, 아니면 태형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어서 정국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함께 지내는 것인지. 그저 저 좋을 대로 생각하기엔 지난 이별에서 받은 상처가 너무 컸고 또 세상 일이 맘같이 흐르지 않는 다는 걸 알게 되어 용기를 내는 게 어려웠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태형과 함께 살며 계속 얼굴을 보다보니 그가 더 좋아졌다. 가끔 싹퉁바가지 없게 말하거나 재수 없게 굴기는 했지만 가볍게 눈감아 줄 수 있을 정도였다. 김태형은 늘 그랬으니까. 태형을 처음 만났던 8년 전에도 똑같이 성격에 재수없는 인간이었으니까 그의 하자있는 성격은 문제 될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립기까지 했던 싸가지였다. 물론 태형에게 애가 생겼고 정국은 뼈저린 실연을 겪은 후였기 때문에 그때처럼 사랑의 불도저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괜히 마음을 표현했다 태형이 부담을 느끼고 집을 나가버린다면 그걸 또 붙잡을 자신이 없었다. 태형의 속을 모르기에 그랬다. 전정국이 그걸 대놓고 물어볼 성격이 못되어서 더 그랬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는 거실의 적막을 깬 건 또다시 김태형이었다. 티비를 끄고 리모컨을 치우는 손을 보고 있으니 괜히 불안해졌다. 이런 침묵 뒤에 김태형은 꼭 사람의 속을 긁어놨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안 물어보네.”
“들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아서요.”
“말해줄게.”
“어차피 저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면서요.”
“이제는 상관있어 졌잖아.”
듣기 싫다는 말을 돌려 한 거란 걸 알면서도 한마디도 안 진다. 따박따박 대꾸해오는 김태형에 질린 표정을 지은 정국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소파에 늘어졌다. 그래봤자 지아 엄마와 관련된 얘기일 게 뻔해서 귀담아 듣지 않으려고 했다. 상상으로만 떠올리던 것과 당사자의 입으로 직접 듣는 건 아무래도 타격감이 다를 것 같아서.
지아 엄마와의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할 줄 알았는데 태형이 꺼낸 이야기는 정국의 예상과는 많이 달랐다. 이야기의 시작은 정국과 헤어진 그 때였다. 태형이 매정하게 정국을 두고 미국으로 떠나버렸을 때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태형에게 먹버 당한 후 6년을 구질하게 살았는데(비록 정국 본인의 선택으로 태형을 떨쳐내지 못했던 거지만)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그 때의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괜히 심사가 뒤틀렸다.
“너는 나를 많이 원망했겠지.”
“원망만 했을까봐요.”
“정국이가 싸가지가 많이 없어졌네.”
“덕분에.”
“말하기 싫어졌어. 집 나갈래.”
정국을 째리며 일어서려는 태형을 겨우 붙들어 앉혔다. 그의 입에 얼음 띄운 콜라를 물린 후에야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 있었다. 며칠 만에 육아 달인이 되었는지 정국은 태형을 부둥부둥 하면서도 지아가 잠든 방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런 정국이 꽤 맘에 들었는지, 아니면 웃겨 보였는지 입가에 미소를 띤 태형이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국 간 건 내 의지가 아니었어. 부모님이 이혼하셨거든. 누나랑 같이 아빠 따라 갈 수밖에 없었어.”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줬으면 됐잖아요.”
“너한테 그런 구질구질한 가정사 말하기 싫었어. 미국은 도피처였어. 한국에 있을 상황이 못 돼서 멀리로 도망친 거였다고. 가서 행복하지 않을 게 뻔한데 너한테 괜찮은 척 하기 싫었어. 그렇다고 힘든 거 내색하는 건 더 싫었고. 만약 사실대로 말했으면 넌 날 기다리겠다고 붙잡았을 거잖아. 난 그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 그 때의 현실 말고 다른 부담까지 안고 싶지 않았단 말이야.”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내용들이 많이 무거웠다. 아마 태형이 아무렇지 않아 보일 수 있게 된 것도 시간이 많이 흘러서일 테다. 태형의 말을 끊지 않고 끝까지 들어주는 게 예의라는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정국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그럼 나를 사랑하기는 했어요? 사랑이 아니었다는 말은 거짓말이죠? 태형에게 묻지도, 대답을 듣지도 않았지만 6년 간 혼자 쌓아온 미련이 조금씩 녹아가고 있었다. 정국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태형이 중얼거렸다. 솔직히 너를 많이 사랑했어. 근데 그 사랑 하나만으로 혼자 한국에 남아있기엔 내가 견디고 버텨야 할 게 너무 많았잖아. 어쩌면 이 모든 말이 변명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정국은 안심이 됐다. 그럼 됐어요. 저는 이제 괜찮아요.
태형의 미국생활은 정말로 힘들었다고 했다. 말이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숱한 인종차별을 당하며 정착하기까지 죽고 싶단 생각도 수차례 들었다고 했다. 정국은 이 대목에서 눈물이 나려는 걸 겨우 참았다. 입 안의 혀를 씹고 허벅지를 꼬집어가며 눈물을 참는 정국을 발견한 태형이 소리 내어 웃었다. 좀 창피했지만 태형이 웃어서 좋았다. 턱 밑을 간지르는 손길과 아직도 이렇게 눈물이 많냐며 묻는 목소리에는 결국 눈물을 한두 방울 떨궈내었다. 김태형이 조금씩 던져주는 다정함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었다.
“지아는 누나 애야.”
“네????”
큰 소리를 내며 벌떡 일어난 정국이 충격적인 사실에 몸을 바르르 떨었다. 곧 작은 소란에 잠이 깼는지 지아가 칭얼거리며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을 떡 벌리고 지아가 잠든 방과 태형을 번갈아 보던 정국이 잠깐 멈춰요. 스탑!! 하고는 방으로 뛰쳐들어갔다. 지아를 안고 분유를 먹이며 달래면서도 충격이 가시지 않았다. 저 사람은 뭐 저런 걸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난리야. 지금껏 태형이 모든 말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는 걸 그새 까먹은 정국이 심난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분유 한통을 말끔하게 비운 지아가 다시 도롱도롱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야 진이 다 빠진 채로 나와 철퍼덕 앉았다. 예나가 선정이 딸이란 걸 알았을 때보다 더 충격이었다. 태형이 던진 대포탄에 정신이 욱신거렸다. 넋이 나가 있으니 태형이 낄낄 웃었다.
“애 잘 키운다, 너.”
“…….”
“김지아 말고 전지아 해야겠다.”
“잠깐만요… 아까 하던 얘기는 마저 해야죠. 그럼 지아 형 딸이 아니에요?”
“내 딸은 맞아. 호적상으로는 그래. 누나가 낳았는데 누나가 죽어서 내 밑으로 뒀어.”
아… 짧은 탄식과 함께 정적이 흘렀다. 김태형은 뭐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소식만 잔뜩 안고 돌아온 건지 모르겠다. 할 말을 잃고 입술을 달싹이던 정국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태형이 말을 이어갔다. 사고가 났어. 태형이 숨을 골랐다. 그런 그의 등을 쓰다듬으며 말하지 않아도 된다 다독였다. 고개를 저은 태형이 덤덤한 목소리로 그의 사정을 전했다. 미국에서 내가 가진 건 가족 하나밖에 없었는데 지아 빼고 전부 잃었어.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집을 팔고 한국으로 온 거야. 근데 한국에 와도 변하는 건 없더라. 엄마를 먼저 찾았는데 새 가족이랑 같이 있어서 거기 낄 수가 없었어. 엄마한테는 나 말고 다른 아들이 있었고, 딸이 있었고, 내가 모르는 남편이 있었어. 생각해 봐. 난 엄마를 혼자 남겨두고 아빠를 선택했던 거잖아. 이제 와서 행복해진 엄마한테 어떻게 내가… 정국은 그를 다독이는 것 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사실이 슬펐다.
입술을 씹고 손톱 거스러미를 뜯어내며 할 말을 고르던 정국의 귓가에 헛헛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면 김태형이 바짝 날을 세우고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제 내 처지를 좀 알겠어? 나는 유통기한이 언제까지인지도 모르는 네 동정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거든. 정국의 속이 또 한 번 울컥하고 치밀었다.
“미안한데 형. 저는 동정이 아니라 사랑을 하고 있는 거거든요.”
“……”
“형이 불쌍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에요. 형이 너무 안쓰러워요. 근데 안쓰럽다고 6년 전에 붙잡을 기회도 안 주고 떠나버린 사람을 그 자식이랑 같이 집에 들이지는 않거든요? 사랑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되는 걸 왜 형만 몰라요? 아무튼 전 형이 뭐라던 이제 신경 안 써요. 내 멋대로 할 거예요. 또 사랑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저한테는 사랑이 맞아요. 형도 멋대로 해요. 계속 우리 집에서 지내면서, 그렇게 해서 안정이 되면 그렇게 하라고요. 저는 형 사랑하니까 그래도 괜찮아요.”
“너 진짜… 웃긴다…”
그렇게 말하는 태형의 얼굴은 전혀 웃겨 보이지 않았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던 시선이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숙인 고개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내 동정의 유통기한이 언제까지냐고? 영원히라고 하면 싫어할 것 같으니까 지아가 다 클 때까지로 해둘게요. 그럼 그 때까지는 제 옆에 있어 줄 거예요?”
“…….”
“전에도 제가 말했죠. 형만 자존심 굽힌 거 아니에요. 형 보내고 6년을 구질하게 지냈어요. 저를 그렇게 만든 형을 붙잡겠다고 지금 내가 가진 모든 패를 형 앞에 내보이고 있는 거라고요.”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태형이 눈을 들어 정국을 바라봤다. 태형의 우는 얼굴을 보는 건 처음이라 낯선 기분이 들었다. 이야기를 하는 내내 먹먹하게 가라앉아 있던 태형의 눈에 슬픔이 걷힌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 눈을 똑바로 마주하던 정국이 입술을 달싹였다. 키스하고 싶다. 키스해도 될까? 고민은 짧았다. 태형이 먼저 입을 맞춰주었기 때문에.
이게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조금은 거칠어진 입술이 닿았을 땐 정국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고 말았다. 태형을 끌어와 양 뺨을 감쌌다. 질척하게 혀가 얽히며 누구의 것인지 모를 호흡이 오갔다. 김태형은 대체 무슨 힘을 가지고 있길래. 정국의 25년 중 태형을 만났던 건 고작 2년뿐이었는데도 정국의 인생 전반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정국의 세계가 또 한 번 뒤집어졌다.
태형이 오고 처음으로 같은 침대에 누워 밤을 보냈다. 잠을 잔 건 아니었고 섹스를 했다. 태형이 소리를 낼 때마다 지아가 깰까 싶어 키스를 하면서 입을 막은 건 좀 재미있는 일이었다. 섹스 후 팔베개를 베고 누워 정국을 꼭 안고 있는 태형의 습관이 여전한 걸 알아차렸을 땐 기분이 뒤숭숭했다. 정국의 목과 턱 끝에 쪽쪽 입을 맞추던 태형이 별안간 짜증을 부렸다.
“근데 짜증나네. 너 고추도 커지고 섹스도 좀 는 것 같아.”
“그래요?”
“짜증나… 너 그동안 다른 애도 만났어? 섹스 존나 많이 하고 다녔지?”
“아니거든요.”
지난 6년 간 성 불구자 취급을 받으며 그 누구에게도 고추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스스로 말하기는 창피했다. 섹스가 늘었다면 좋은 것 아닌가? 그냥 좋아만하면 어디가 덧나기라도 하는 건지 태형은 끊임없이 정국을 추궁했다. 결국 이번 턴에도 패배자는 전정국이다. 진짜 다 걸고 아무도 안 만났어요. 저는 혀, 형이 처음이고 마지막이었거든요… 정국의 대답에 태형이 입이 찢어져라 웃었다. 싱글벙글한 광대가 얄미워 아프지 않게 깨문 정국이 입을 불퉁 내밀었다.
“그럼 저도 좀 물어봅시다. 형은요? 형은 미국에서 딴 놈들 많이 만났죠?”
“야~ 우리 분위기 좋은데 왜 그런 말 해?”
“형 저 어릴 때도 자지가 커서 좋다고 그랬잖아요. 미국사람들 크니까 좋아했을 거 아니에요. 맞지?”
“지금 내가 너랑 같이 있다는 게 중요하지 뭐가 중요하겠니. 그리고 미국이라고 다 큰 것도 아니더라. 내가 본 자지 중에 모양과 색깔과 향까지 전체적으로 맘에 든 건 너 하나뿐이야.”
얼굴 색 하나 안변하고 저런 말을 하는데 도대체 정국이 어떻게 김태형을 이길 수 있단 말인가. 정국은 물어본 제가 멍청이라며 혀를 찼다. 태형은 큰 손을 펼쳐 정국의 맨가슴을 문지르다 정국의 위로 올라타 그에게 매달리듯 안겼다. 덕분에 태형의 폭신한 엉덩이가 문질러져 정국의 고추가 다시 파이팅 넘치게 크기를 키워 나갔다.
섹스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둘은 원래도 속궁합이 잘 맞았고 나이가 들면서 농익은 탓에 만족도는 최상을 찍었다. 착한 딸 지아는 한 번도 깨지 않고 얌전히 잠들어 있었다. 씻고 나오니 어느덧 새벽이었다. 정국은 태형과 지아가 쓰는 방에 함께 누웠다. 굳이 침대방 두고 비좁게 왜 이러냐며 태형에게 타박을 들었지만 어차피 침대는 싸질러놓은 정액과 땀으로 더러워졌고 그냥 계속 떨어지기 싫었다.
“한국은 6년 만에 처음 온 거죠?”
“응.”
“하고 싶은 거 없어요?”
“하고 싶은 거… 좀 많은데.”
기다렸다는 듯 튀어나오는 대답에 정국이 허허 웃었다. 태형이 1을 요구하면 10을 줘버리는 정국의 특성 상 아무래도 태형이 하고 싶은 걸 다 이뤄주다 보면 25살에 부자가 됐다 거지가 되어버린 전정국이 되어버리는 건 순식간일 것 같았다. 정국이 카드 값을 떠올리며 아득해진 사이 지아의 뺨을 조심스럽게 쓸던 태형이 입을 열었다.
“지아 돌잔치.”
“엥?”
“경황이 없어서 백일도 못 챙기고 돌잔치는 당연히 못 해줬어. 사진도 많이 못 찍었고…”
“흠. 날짜는 언제가 좋아요?”
날짜부터 묻는 정국에 태형의 눈이 크게 뜨였다. 오늘 특A 한우도 드신 분이 새삼스럽게 놀라는 얼굴이 재미있었다. 그런 것쯤이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다이아몬드나 집을 새로 구해달라는 말을 할 줄 알고 사실 좀 얼었던 게 사실이지만 상대는 27살의 김태형이었다. 아마 21살의 태형이었다면 다이아몬드에 집에 현금까지 얹어 달라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어느 규모의 돌잔치를 얘기하는 줄 알고 그렇게 선뜻? 돌아오는 답에 식은땀이 흘렀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허세도 좀 부렸다. 뭐든 내가 못 해줄까 봐요.
주말 중 돌잔치를 할 만한 때를 살펴보다 나란히 잠에 들었다. 새벽부터 높은 데시벨로 우는 지아 덕분에 눈을 뜰 수밖에 없었지만. 평소 정국이 작은 소리로 투덜거리기만 해도 귀신같이 알아채는 태형이 어떻게 저 울음소리를 직빵으로 들으면서 깨지 않는 건지 의문이 들었으나 어쨌든 달래기는 정국의 몫이었다. 눈도 다 뜨지 못하고 지아를 안고 보듬다 시선을 돌리면 잠든 태형이 있었다. 이 모든 게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잠자는 모습만큼은 천사 같은 태형을 보고 있으니 뭉클하는 마음이 들었다. 태형의 지난 6년은 들려준 이야기보다도 더 힘들었을 것이다. 그걸 생각하다보니 눈물이 날 것 같아 괜히 천장만 보고 있으니까 지아가 정국의 코를 잡아 당겼다. 지아는 김씨 가문의 자제분답게 낯도 가리지 않고 애교가 많았다.
태형의 누나가 낳은 딸이라고 하니 태형과 이렇게까지 닮은 이유가 설명이 되었다. 태형의 누나를 직접 본 적은 없으나 말로는 쌍둥이 수준으로 닮았다고 했다. 세상에 태어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힘든 일을 겪은 어린 아이가 가여웠다. 그래도 너한테 김태형이 있어서 다행이다. 김태형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순하게 안겨 있다 정국을 보고 까르륵 웃는 지아를 보고 있으면 덩달아 웃음이 났다. 어느새 지아의 돌잔치는 태형뿐만이 아닌 정국도 원하는 일이 되어 있었다.
“저 왔어요. 이거 무슨 냄새에요?”
“족발 시켜 먹었어~ 생각 있으면 데워 줄 게.”
이제는 퇴근 후 자신을 맞이하는 태형과의 대화가 일상이 되었다. 출근한 사이 잘 챙겨먹으라고 기껏 반찬을 준비해놓고 가도 틈만 나면 배달 음식을 시키는 태형 때문에 스팀이 오르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는 말이다. 잔소리를 할라치면 미국에 있는 동안 그리웠던 한국음식을 먹는 것뿐이라며 원천차단을 하는 덕분에 이제는 할 말도 없었다. 이 모든 게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지아의 돌잔치도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간 뷔페도 예약하고 사진도 찍으며 이것저것 준비하면서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 태형이 한국을 비웠던 시간이 꽤 길었고 여러 사정들이 겹쳐 돌잔치는 최소한의 인원만 데리고 소소하게 진행하기로 했다. 말이 소소하게지 정국은 그 규모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들을 해주고 싶었다. 어련히 업체가 알아서 준비해줄만 한 것들도 틈만 나면 간섭하고 참견하며 전정국 기획 전정국 주관의 김지아 양 돌잔치를 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지아 사진을 자주 못 찍은 게 아쉽다는 태형을 위해 돌잔치용 사진을 찍을 때 가족사진도 함께 찍었다. 낯선 스튜디오에서 경직된 지아를 달래기 위해 앞에서 재롱을 부린 정국 덕에 촬영은 수월하게 진행 되었다. 앞구르기까지 마지않는 정국의 정성에 감동했는지 태형이 정국을 불러 지아와 함께 셋이 사진을 찍기도 했다. 가정을 꾸린다면 이런 기분일까? 지아를 안고 태형의 옆에 선 정국은 촬영 내내 심장이 터지지 않도록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만 했다. 지난 6년을 돌이켜 본다면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정국은 거의 알콩달콩 해피 신혼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식탁에 마주보고 앉아 태형이 데워온 족발을 뜯어먹으며 대화한다는 건 정말이지 꿈에서도 불가능 했던 일이었다. 대화주제는 자연스럽게 지아의 돌잔치로 흘러갔다.
“돌잡이 용품들은 그냥 업체에서 준비해주는 대로 할까요?”
“뭐 있는데?”
“뻔하죠. 실이나 연필 같은 것도 있고. 요즘은 현대식이라고 마이크나 공 같은 걸 종류별로 두기도 한대요. 야구공 이런 거.”
“이왕 하는 거 여러 가지 많이 놓자.”
오전동안 온 집안을 헤집으며 놀았다는 지아는 먼저 꿈나라로 가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갱신되는 그녀의 활동량에 정국과 태형 모두 놀라고 있었다. 그래도 둘 다 20대인데 어떻게 갓난애기 체력에 못 따라가냐며 한탄하기도 했다. 그러다 지아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운동을 하면 무슨 스포츠든 잘 할 거라는 태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정국이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난 지아가 마이크 잡았으면 좋겠는데.”
“마이크가 뭔데. 연예인?”
“가수 했으면 좋겠어요. 우는 거 들어보니까 애가 목청도 크고 또랑또랑한 게 가수로 대성할 듯.”
“난 마패도 괜찮은 거 같아. 날 닮았으면 아마 정치인으로 크게 이름을 날릴 거야.”
“형 같은 정치인은 좀…”
“더 말하면 집 나간다.”
“아무튼 난 정치인은 별로. 그런 더러운 판 근처에도 안 갔으면 좋겠어요.”
“야. 연예계는 뭐 깨끗한 곳인 줄 아냐?”
어느새 태형이 가져온 노트북으로 돌잔치 소품을 구경하다 실없는 언쟁이 이어졌다. 결국 있는 소품 다 가져오자는 걸로 결론을 내린 후에는 초대리스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다. 태형의 친구들과 정국의 지인들을 부르면 얼추 구색이 맞춰질 것 같았다. 태형은 모르겠지만 정국의 회사에서는 지아가 전정국의 숨겨둔 딸이 아니냐는 말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그런 소문을 정국 또한 알고 있었지만 바로잡기에는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도 몰랐고 듣기에 썩 나쁘지 않은 소문이라 그냥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정국에게서 돌잔치 초대장까지 받는다면 아마 회사가 뒤집어 지겠지. 이제는 또 소문이 어떻게 진화할지 떠올리며 웃는 사이 태형은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평소 늘 뻔뻔한 텐션을 유지하던 태형에게서 슬픔이 읽히자 당황한 건 정국 쪽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쉰 태형은 곧 눈물을 뚝뚝 흘려냈다. 그 눈물에 충격 받은 정국이 벌떡 일어나 로봇처럼 삐걱대며 태형의 옆으로 가 앉았다. 등을 쓸어주고 어깨를 감싸 안아 손을 잡아주기도 했지만 태형은 계속해서 말없이 울기만 할 뿐이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말을 해야 알지.”
“정국아…”
“저 여기 있으니까 말해요.”
“나 엄마 보고 싶어…”
정국이 눈앞이 까맣게 흐려졌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가장 먼저 초대하고 싶은 사람이었을 텐데. 스스로 자책하며 한숨을 삼켜낸 정국이 태형을 꼭 끌어안고 도닥였다. 내가 보게 해줄게요. 울지 마요… 투박하지만 다정함이 뚝뚝 묻어나는 말에 태형이 살풋 웃었다. 어쩌면 태형을 위로하기 위해 그냥 한 말로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정국은 뱉은 말을 정말 지킬 생각이었다.
“안녕하세요. 전정국이라고 합니다.”
‘아..! 안녕하세요.’
그렇다면 태형의 어머니에게 물어보면 될 일 아닌가. 그 생각 하나로 무턱대고 전화를 걸기는 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을 소개하자마자 어쩐지 살갑게 돌아오는 인사에 오히려 정국이 당황해버렸다. 아는 사람 중에 동명이인이 있어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곧 그게 아니란 걸 알게 됐다.
“저… 말씀드리기 조심스럽지만 태형이 형 관련해서 연락 드렸어요.”
‘그럴 것 같았어요.’
“어떻게…?”
‘예전에 태형이가 정국씨 얘기 많이 했어요. 결혼하고 싶다고 노래 노래를 불렀는데… 아, 혹시 이런 말을 하면 안 되는 분위기인가?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라 반가워서… 주책을 부린 거면 미안해요.’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제 앞에선 세상 새침하게 굴며 속 앓이를 하게 했으면서 집에선 그런 말을 했단 말이지? 전화를 건 목적도 잊고 실실 웃다 전화를 끊을뻔한 정국이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다행스럽게도 태형의 이름이 나와도 그녀는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먼저 예전 이야기를 꺼내며 반가워하는 목소리에 안심이 되었다. 그럼에도 태형의 이름을 말 할 때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려왔다. 핸드폰 너머로 전해오는 한마디 한마디에서 그리움이 뚝뚝 묻어났다. 그녀와 태형이 서로를 생각하는 마음이 다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 지 선뜻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전화를 거는 건 쉬웠어도 제가 함부로 말하기에는 무거운 주제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아직까지도 제가 주제넘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하지만 태형이 우는 모습을 봐버린 이상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돌잔치의 날이 밝았다. 손님들을 맞이하다 뒤쪽에 마련된 방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6년 전 갑자기 사라져 오랫동안 잠수를 탔다고 해도 태형을 그리워하던 친구들이 많았던 터라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다들 흔쾌히 시간을 내 주었다고 했다. 태형과 끌어안고 반가워하다 눈물까지 보이는 친구들을 보며 정국이 입을 삐죽였다. 친구 많네. 그러다 결혼도 아니고 대뜸 돌잔치 초대를 하냐며 해명하라고 멱살을 흔드는 회사 지인들에게 붙들려 기가 다 빠져버렸다.
퀭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넘기던 정국이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가장 중요한 걸 전해준다는 게 타이밍을 놓쳤다. 돌빔을 예쁘게 차려입은 지아에게 뽀뽀를 퍼붓던 태형을 불러 세웠다.
“형, 그리고 할 말 있는데.”
“뭔데?”
“들어도 화내거나 욕하지 말기. 이거부터 약속해요.”
비장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말에 태형이 의심쩍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꿍꿍이냐며 가슴을 꼬집으려 들길래 잽싸게 뒤로 피했다. 막무가내로 일을 벌려놓기는 했지만 태형의 반응이 걱정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네가 뭔데 이러느냐고 화를 내도 할 말이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왕 벌려놓은 일, 마무리는 지어야 하지 않겠냐는 마음이 더 강했다.
“어머니가 오셨거든요. 형 어머니요.”
“…….”
“사고 좀 쳤어요.”
태형에게선 아무 말도 없었다. 놀란듯하면서도 굳게 다물린 입술은 생각이 많아 보였다. 경직된 태형의 팔을 쓸며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어머니는 좀 늦게 오신대요. 시간에 맞춰 오고 싶어 하셨는데 많이 바쁘신가 봐요. 오실 때 연락 주시기로 하셨거든요. 두 분이서 얘기도 좀 많이 나누시고 지아한테 할머니도 보여주고… 한참 말을 하다가도 태형의 눈치를 살폈다. 그냥 처음부터 태형에게 밝힐 걸 그랬나. 태형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태형에게서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아 불안하게 손을 쥐었다 폈다 하던 정국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형… 제가 잘못 했어요? 그제야 옅게 웃는 얼굴을 보여준다.
“너무 상상도 못한 사고를 쳐서 좀 놀랐어.”
“잘했으면 칭찬해주고 못했으면 지금 빨리 말해줘요. 도망가게.”
“잘했어. 이리 와 봐.”
지아를 안고 있는 태형에게 엉거주춤 다가가자 보드라운 입술이 맞닿았다. 가만히 입술만 붙이고 있다 태형이 울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의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떨어졌다. 손가락으로 눈물이 맺힌 눈가를 살살 쓸어주니 얌전히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길어 그곳에 방울진 눈물이 꼭 꽃잎에 맺힌 이슬 같기도 했다. 이런 생각들을 곧이곧대로 말했다간 징그럽다고 등짝을 얻어맞을지도 모르겠다. 숨을 고른 태형이 정국과 눈을 맞춰왔다.
“엄마가 많이 놀라지 않을까?”
“아, 그게…”
“날 원망하면 어떡하지? 엄마한테 아무 말도 못했어.”
“제발 진정 좀 해요. 두 분이서 얘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더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어머님도 대충 상황은 알고 계세요. 저도 전화 통화 한 번 한 게 다지만… 그런 걱정 하지 않아도 돼요. 이건 저를 믿어 봐요.”
태형을 달래다 보니 어느새 입장할 때가 되어 있었다.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겨우 마음을 추스fms 태형이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차오른 열을 식혔다. 지아를 건네받아 안은 정국이 입장하면서도 계속 뒤돌아보며 태형을 챙겼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입 꼬리를 올려 웃는 태형을 보니 더 마음이 쓰였다. 마음 같아서는 태형을 끌어안고 괜찮아 질 때까지 다독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아쉬웠다. 들어가기 직전 품에서 바르작거리는 지아를 보며 정국도 마음을 다잡았다. 일단은 지아의 돌잔치를 무사히 마치는 게 우선이었다.
돌잔치는 순조롭게 진행 되고 있었다. 사실 정국이 같이 입장하고 앞에 서 있을 이유는 없었지만 어쩌다보니 태형보다도 부모 노릇을 하고 있었다. 돌잔치 내내 지아를 안고 달래고 머리통에 뽀뽀를 해대는 정국을 보며 당최 이게 무슨 돌잔치인지도 모르고 참석한 정국의 지인들은 김태형과 어째 저째 만든 딸이 맞나보다 하며 막바지 이벤트를 즐기고 있었다. 경품 추천이 끝나갈 때 쯤 입구 주변에 낯선 사람이 보였다. 이 집의 유전자는 대체 어떻게 된 건지… 누가 봐도 태형의 어머니이자 지아의 할머니가 분명한 중년의 여인이 조심스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사회자와 벌써 친해진 태형은 경품 추천을 하는 동안 만담을 주고받느라 정신이 없었다. 태형의 어머니와 눈이 마주치고 정국은 꾸벅 인사를 건넸다. 여전히 정신이 팔린 태형을 툭툭 건들이며 어머니가 도착했음을 알리자 태형이 급하게 입구를 살폈다. 빠르게 뛰고 있는 태형의 심장소리가 정국에게까지 들리는 듯 했다.
왁자지껄 돌잔치가 끝난 후 집으로 돌아오니 피로가 돌덩이처럼 정국을 짓눌렀다. 지아가 정국의 바람대로 마이크를 잡았을 땐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나오기까지 했다. 강경 마패파였던 태형에게 네가 일부러 지아쪽으로 마이크를 둔 거 아니냐는 의심을 받아도 마냥 좋았다. 어머니가 도착한 후 부터는 급하게 돌잔치를 마무리했다. 손님들을 정리하는 건 정국의 몫이었다. 그냥 돌아가기 아쉬워하던 태형의 친구들에게는 다음번에 제가 회포를 풀 자리를 마련해드리겠다며 약속까지 했다.
어머니와의 재회도 성공적으로 끝난 것 같았다. 뒤편 대기실에서 마주한 모자를 보고서는 어쩐지 정국이 먼저 울음을 터뜨렸다. 왜 네가 우냐며 태형에게 타박을 듣기도 했지만 찔찔 흐르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너무 감동적인 걸 어쩌라고요. 그리고 나서부터는 온전히 두 사람의 일이었다. 제 참견도 여기까지라며 한 발 물러선 정국은 두 사람이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예약한 식당으로 모셨다. 계속 혼자 살았던 집인데 고작 몇 달을 살았을 뿐인 두 사람이 없으니 허전한 기분까지 들었다. 데리러 오라는 연락을 받고서는 주인을 기다리는 강아지처럼 꼬리를 흔들며 뛰쳐나갔다. 태형을 데리고 오는 길에 어땠냐고 물으니 여운에 젖어 코를 훌쩍인 태형이 뭐 좋았어,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진짜 엄청나게 대박적으로다가 좋았다는 뜻이다. 지아는 이틀 간 할머니와 함께 지내기로 했다. 엄마가 지아를 많이 예뻐하더라고 말하는 태형의 얼굴이 좋아보였다.
“지아 돌잔치도 끝났으니까 저도 할 말 좀 해도 됩니까?”
“지금까지는 꼭 할 말 못한 것처럼 그러네.”
단 한 순간도 진지해지지 못하는 입술을 손바닥으로 덮어 더 이상 말을 못하게 했다. 정국은 한참이나 말을 골랐다. 태형의 큰 눈이 정국을 빤히 바라봤다. 한창 기분 좋을 때 괜히 자신의 말이 분위기를 흐리지 않았으면 했다. 하지만 분위기를 망치게 되더라도 꼭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태형에게 꼭 들어야 할 대답이 있기도 했다.
“저랑 지내는 거요. 이제는 확실하게 했으면 좋겠어요.”
“…….”
“형이 무슨 마음인지 알고 싶어요. 아직도 제가 단순히 동정 때문에 형이랑 같이 사는 것 같아요? 형은 무슨 생각으로 저를 찾았던 거예요? 지금은 저를 어떻게 보고 있어요?”
“질문 진짜 많다.”
“궁금한 게 한두 가지여야지.”
팔을 뒤로 짚고 천장을 바라보던 태형이 미묘한 표정으로 정국을 쳐다봤다. 여우처럼 가늘게 자신을 꿰뚫어보는 눈빛에 정국은 침을 꼴깍 삼켰다.
“이거 먼저 대답해주면 나도 네 질문 전부 답해줄게.”
“아 진짜.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싫음 말던가.”
“할게요, 할게요.”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건 알겠어. 근데 네가 지금까지 사랑해 온 건 6년 전의 나잖아. 하지만 그 때와 지금은 달라. 시간이 흘렀어. 네가 지금의 나도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 때에 대한 아쉬움을 해소하고 싶은 걸 수도 있는 거잖아. 뭐든 말은 쉬워. 지금이야 몇 달간 같이 지낸 게 전부지만 나랑 지내면서, 지아가 커가면서 네가 감당해야 할 것들이 점점 더 늘어날 거야.”
“형.”
“이제 난 도망치고 싶지 않아. 널 두고… 그러니까 대답해 줘.”
말끝이 흐려졌다. 울컥했는지 잠깐 숨을 고른 태형은 여전히 시선 속 날카로움을 유지한 채 정국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아직도 마음을 의심 받는 게 화가 났지만 진중한 태형을 보며 그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형이 가진 모든 걸 잃었던 게 바로 얼마 전의 일이다. 더 이상 곁의 사람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태형의 마음을 이해했다. 그의 깊은 슬픔까지 완전히 헤아릴 수는 없겠지만 단순히 정국을 의심해서 한 말이 아니란 건 안다. 확신을 가지고 싶은 건 태형 또한 마찬가지였다. 태형의 말처럼 시간은 흘렀다. 사랑만으로는 버틸 수 없어 도망쳤다던 태형이 이제는 정국을 두고 도망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태형이 내민 손을 잡고 놔주지 않을 차례였다.
지아의 돌잔치에서 만났던 태형의 수많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그 중에는 태형과 틈틈이 연락을 주고받던 사람도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태형에겐 많은 선택지가 있었다는 뜻이다. 그와 지아를 기꺼이 받아 줄 친구들이 있었음에도 자신에게 가장 먼저 찾아왔다는 건… 숨이 턱하고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지난 6년 간 이어왔던 사랑이 혼자만의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형도 계속 나를 떠올리고 있었어요? 나를 잊지 못해 슬퍼하는 시간들을 보냈어요? 계속해서 나를 사랑해 왔어요? 꾸역꾸역 차오른 울음을 참아내는 목울대가 울렁였다.
“형은 언제나 형이었어요.”
“…….”
“8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도, 형이 없는 6년 동안 형을 떠올리면서도,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형은 형이에요. 그 때의 형과 지금의 형이 다르지 않아요. 달라진 게 있다면 그 때보다 형을 더 사랑한다는 것뿐이에요.”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다행이야. 못 견디겠다고 했으면 없는 병이라도 걸려서 눌러 붙어 있을 생각이었거든.”
“진짜 하나도 안 변했어요. 안 해도 될 말을 굳이 하면서 분위기 깨는 것도 똑같아요.”
“그래서 날 사랑하잖아.”
“맞아요.”
태형의 눈이 사르르 접히며 예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보고 있는 것만으로 입 안이 달아졌다. 변하지 않았다는 건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 순간에 자신을 무장해제 시키는 미소에 정국은 꼭 17살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꿈속의 제가 19살의 태형을 보고 다시 사랑에 빠졌듯이 17살의 정국이 지금의 태형을 본대도 분명히 사랑하게 될 거였다.
말랑해진 분위기에 마음이 다 녹아버렸다. 잠시 잊고 있었던 언젠가의 전화 통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요.”
“진짜 성가셔, 전정국.”
“어머니한테 저랑 결혼하고 싶다고 했었다면서요?”
“……”
그게 무슨 생뚱맞은 말이냐며 아니라고 잡아 때려던 태형이 떠오르는 기억이 있는지 입술을 훔쳐 물었다. 정국은 씰룩이는 입 꼬리를 겨우 진정시키고 태형의 양 손목을 붙들었다. 부산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피하던 태형의 얼굴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그거 아직까지도 유효한 말입니까? 내가 생각하기에 나는 최고의 신랑감이고 신붓감인 것 같은데.”
“……”
“대답하기 쪽팔리면 선택해요. 유효하면 뽀뽀해주고 아니면 집 나가기.”
“야 뭐가 그렇게 극단적이야?”
툴툴거리던 태형은 다시 천장을 한 번 바라보고 혀로 마른 입술을 쓸기도 하면서 대답을 망설였다. 이게 그렇게까지 고민할 일이에요?! 정국이 삐죽이자 눈을 새치름하게 뜬 태형이 킬킬 웃었다. 주도권을 이제야 한 번 잡아보나 싶었는데 매번 같은 식으로 태형에게 낚이고 있었다.
“손 좀 놔 봐.”
“왜. 집 나가려고?”
“찐하게 키스 한 번 해주려는데 집주인분이 손목을 안 놔줘서 못하겠어요.”
그 말에 냉큼 손을 풀어냈다. 기다렸다는 듯 정국을 잡아당긴 태형이 깊게 입을 맞춰왔다. 이보다 더 완벽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