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omeone’s wedding day
회색
정국은 현관의 벽면에 비치되어 있는 거울 속 본인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냥 봐도 잘생겼고 흰자가 훤히 드러날 정도로 째려봐도 잘생겼다. 겉멋이란 겉멋은 있는 대로 다 부렸으니 이제는 어떻게든 흠을 찾아내어 수정을 거칠 시간이었다. 어제 밤잠을 설친 것 치곤 피부 상태가 나쁘지 않았고 오랜만에 힘을 준 쉼표 모양의 헤어 스타일링도 과하지 않게 잘 어울렸다. 편안한 복장을 추구하는 편이기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입을 일이 없는 정장을 걸쳐 수트빨까지 더해진 완벽한 자신의 얼굴을 정국은 한참동안 구석구석 뜯어보았다. 그러다가 신경질적으로 깃을 팍팍 당겨 다시 정돈했다. 역시 불그스름한 눈가가 어쩔 수 없이 눈에 띄어 거슬렸다. 워낙 눈이 동그랗고 커서 붓는다 해도 와잠만 조금 두꺼워질 뿐 그 외엔 티가 잘 나지 않지만, 연약한 피부는 눈에서 수분을 뽑아내면 쉽게 자극을 받았다. 정국은 손끝으로 아직도 뜨끈거리는 눈두덩이를 눌러 느리게 문질렀다. 새벽이 다 가도록 이불을 뒤집어쓰고 쭐쭐 울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야, 뭐하느라 이렇게 늦어. 내가 5분 만에 내려오랬지.”
아, 눈부셔, 라고 스스로 중얼거릴 정도로 때 빼고 광을 낸 구두를 신고 주차장으로 내려와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정국의 친누나인 정연의 투덜거림이 쏟아졌다. 정국은 옆에서 뭐라던 간에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정연의 잔소리를 한 귀로 흘렸다. 에어컨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리고 시트에 깊숙이 몸을 기대 눈을 감았다.
머릿속을 정리해야 했다. 어제부터 지금까지 생각정리를 시도했던 횟수만 벌써 천이백삼십 번을 넘어갔다. 하필이면 또 숫자가 그랬다. 1230. 갑자기 주책맞게 코끝이 시큰거렸다. 속으로 마인드컨트롤을 외쳤을 뿐인데 어제 내내 정국을 괴롭혔던 그 얼굴이 다시금 두둥실 떠올랐다. 미쳐버린 눈물샘이 어느새 또 눈물을 쏟아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정국은 눈을 번쩍 뜨고 허리를 홱 숙여 황급히 에어컨 바람에 축축해진 눈동자를 말렸다. 막 시동을 건 차를 출발시키면서 핸들을 꺾던 정연이 그런 자신의 친동생을 바라보며 뭐하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의외다? 너 사람 많은 곳 잘 안 가잖아.”
“식장을 사람 만나러 가? 축하해주러 가는 거지.”
“근데 너 청첩장도 못 받았지 않아?”
무심한 정연의 대꾸는 비수가 되어 정국의 단단한 가슴을 가뿐히 뚫고 들어와 심장을 쑤셨다. 정국은 불시에 난도질당한 열여덟 순정의 잔재를 또다시 확인했다. 속이 쓰렸다. 그리고 황당했다. 걸리적거렸던 잔가지를 다 꺾어내고 단단했던 밑동마저 잘라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깊은 곳에 박힌 뿌리는 그대로라니. 뭐 얼마나 대단한 첫사랑이었다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지나 싶은 거다.
그런데 말이다, 그게 좀 대단한 첫사랑이긴 했다. 일단 상대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죄다 예뻤다. 거짓말 한 줌 보태지 않고 그렇게 예쁘고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봤었다. 게다가 한 시도 떨어지기가 싫었다. 지켜보고 싶고 지켜주고 싶었다. 열여덟에 처음으로 느껴본 사랑이란 감정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교를 입학하고 군대를 갈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버려졌다는 비참함과 떠나버렸다는 허탈함만 남긴 그를 잊자고 마음을 먹는 것조차도 신체의 일부를 도려내는 것처럼 잔인하고 고통스러웠는데, 남아있는 미련은 바닥에 달라붙은 끈끈이처럼 아무리 긁어내도 떨어지지가 않았다. 그래, 전정국은 몇 년 동안 구질구질함의 끝판왕을 달렸다. 털어놓기 참 창피하지만, 군 제대 직후 때를 맞추어 입국한 부모님께 전역을 신고할 적엔 그 앞에서 아기라도 된 것처럼 눈물을 빠앙 터뜨려버렸다. 생소한 사람들과 살을 부대끼고 살아야했던 낯선 훈련소 생활도 괜찮았고 오랜만에 나눈 부모님과의 안부전화도 무덤덤하게 응했던 정국이었다. 하지만 그는 전역신고조차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군복 소매로 눈을 가리고서 펑펑 섧게도 울었다. 제대가 그렇게 감격적인 것도 아니었고 드디어 민간인이 되어 기뻤던 것도 아니었다. 군인이었던 2년 동안 자대에 얼굴 한 번 비춰주기는커녕 단 한 통의 전화와 단 한 줄의 편지조차 않았던 그를 향한 응어리진 원망이 한순간에 팡 터져버린 거다. 보란 듯이 잊어주겠다고 마음먹으면서 또 줄줄 울었다. 아, 진짜 한심.
어쨌든 그 뒤로 3년이나 더 지났다. 정국은 자신의 모든 정신을 대학 생활에 집중하며 바쁘게 살았다. 바쁜 척하며 살았다. 그 사이에 그를 아주 떠올리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옛날처럼 애틋하고 절절해서 미칠 것 같지 않았다. 정국은 환호했다. 야호, 드디어 잊는다! 끓었던 마음의 온도는 식어갔고 온 우주를 뒤져도 이 사람만큼 특별한 존재는 없을 거라던 소중함도 이젠 느껴지지 않았다. 아마 너무 많이 꺼내봐서 무뎌진 거라고 생각했다. 좋았다. 더는 날카로운 모서리에 찔려서 아플 일도 없을뿐더러, 떡하니 가득 차지하고 있던 감정이 끝에서부터 닳아간다는 것은 다른 사람으로 채워질 공간이 생긴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를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과거의 첫사랑쯤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아니, 남겨 둘 수 있었다.
그런데 본인 이름 앞으로 발송되지도 않은 청첩장 속 이름 석 자에 심연의 바닥에 깔려있던 불순물들이 표면으로 떠올랐다. 조용히 부유하다가 바람처럼 지나갈 줄 알았는데. 세상에. 완전히 뒤집고 흔들고 깨고 부시고 난리가 나버렸다. 그는 지금이라도 얼굴값을 하리라 다짐하며 다른 이들과의 난잡한 연애를 꿈꾸고 있던 정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정국의 마음 구석구석을 휩쓸었다. 예측이 불가능했던 상황이라 준비를 못했고 그러니 마땅한 대응을 못 했을 뿐더러 대처도 할 수 없었다. 졸지에 복구가 불가능한 피해만 잔뜩 입었다.
신랑 김태형. 눈이 따가울 정도로 힘껏 비비고 나서 들여다봐도 김태형이었다. 내가 헛것을 보나. 헛웃음을 터뜨리고 다시 노려봐도 김태형이었다. 내가 정말 미쳐버린 건가? 두툼한 가슴팍이 터질 정도로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필요도 없는 안경을 가지러 방까지 들어갔다가 다시 나왔다. 이미 태풍이 한 차례 휘젓고 간 마음을 가라앉히고 억지를 가장한 느긋함으로 글자의 한 획 한 획을 꼼꼼히 따라 읽어봤지만. 그래도 김태형이었다. 정말 김태형이다. 김태형. 결혼을 한단다. 김태형이 결혼을….
“와, 여기 비싼 식장이라던데. 엄청 좋은데서 하네.”
“…….”
“일단 내려서 들어가 있어. 주차하고 올 테니까.”
태형의 청첩장과 맞닥뜨렸던 순간을 되짚느라 멍해있던 정국은 맥없이 고개만 대충 끄덕이고 차에서 내렸다. 바닥만 애꿎게 노려보다가 한 걸음이라도 내딛기 위해 얼굴을 들었다. 그러나 정국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이런 기분이 될 줄 알긴 했지만, 좀 서글펐다. 축 쳐진 어깨와 가라앉은 얼굴을 한 정국은 인파로 북적거리는 입구의 경계선을 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어쩐지 저 틈으로 섞일 수가 없었다.
날씨가 좋았다. 새파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아주 맑았고 단독으로 지어진 웨딩홀은 유럽의 대성당을 방불케 할 정도로 화려하고 웅장했다.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클래식 음악은 식장 분위기를 한층 더 고급스럽게 만들었다. 상류층 연회파티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시선이 닿는 곳마다 비싼 냄새가 났다. 모든 게 완벽했다. 완벽한 날씨, 완벽한 웨딩식장, 완벽한 하객들, 그리고 완벽할 신랑까지.
순식간에 떨떠름해진 정국은 화면이 꺼진 휴대폰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았다. 하객이 아니라 조문객으로 왔다고 해도 손색없을 정도로 시커먼 먹구름만이 잔뜩 드리워진 얼굴이었다. 정국은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않는 자신의 입술을 억지로 끌어올려보았다. 미동 없이 굳어있던 입술이 쩍쩍 갈라지는 것처럼 기괴하게 비틀렸다. 마음에 없는 행동은 죽어도 안 되는 자신의 성정이 몇 초 만에 바뀔 리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정국은 계속 연습했다. 축하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정연에게 태형의 결혼식에 동행하겠다고 대뜸 말을 던진 것은 당연히 홧김이었다. 정말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너무 화가 났다. 어떻게 결혼을 해? 나한테 말도 없이? 물론 태형이 저에게 결혼에 대한 소식을 하나하나 전달할 의무는 없었다. 7년 만의 생존신고로 청첩장을 보냈더라면 아마 더 화가 났을 것이다. 이랬든 저랬든 화가 났을, 어쨌든 간에 지금 화가 난 자신을 알아차리니 극심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평생가약을 맺는다고? 누가 누구랑? 말도 안 된다. 정국이 아는 태형은 이 세상에서 결혼이라는 구속적인 사회적 시스템과 제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청첩장을 받았어도 그 뻔뻔함에 열이 받고 배신감으로 부들거렸을 테지만, 청첩장을 못 받은 이 상황도 그 나름대로 정국을 슬프게 만들었다. 어쩐지 저쪽은 진즉에 다 잊은 것 같잖아. 허무하게.
그래서 결심했다. 툭 건드려도 얼굴이 새빨개져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순진한 열여덟 풋내기 소년은 이제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어엿한 어른이라고 스스로도 떵떵거리며 자부할 수 있을 만큼 멋지게 폭풍성장한 스물다섯의 전정국을 태형의 눈앞에 데려다놓기로 말이다. 내가 이렇게 잘 컸는데 제 아무리 김태형이라도 조금은 흔들리겠지. 내가 알던 전정국이 저렇게 잡아먹기 좋게 잘 컸단 말이야? 하고 마음이 동할 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초대받지 않은 자신의 등장에 일말의 당황이라도 해줬으면. 진심으로 반가워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고.
정연의 앞으로 보내진 청첩장과의 만남 이후 어제 하루 동안 정국의 기분은 브레이크가 박살난 롤러코스터를 타듯 멈추지 않고 쉴 새 없이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첫 시작은 억울함이었다. 어떻게 나를 잊고 결혼을 해요? 그 한 마디라도 면전에다 내뱉어야 할 것 같았다. 이대로라면 화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가슴만 주먹으로 퍽퍽 치며 이 삶을 마감할지도 몰랐다. 그건 정말 가엾은 인생이잖아. 물론 정국은 몇 분 만에 진정했다. 왜냐면 지금의 전정국은 성인이니까. 난 어른이니까. 그래서 다른 방안을 찾았다. 옛날에 갖고 놀았던 미성년자가 이렇게 더 잘생겨지고 몸도 좋아지고 거기도 엄청 커지고 굵어졌다는 것을 보여줘서 아, 쟤를 신부로 삼을 걸, 하고 후회하게 만들자. 당연히 허공에 발사하기도 민망한 헛소리라고 몇 초 만에 자각했다. 정국은 곧 유부남이 될 사람에게 얼굴과 몸을 앞세운 섹슈얼적인 어필만을 방안이라고 떠올린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끼며 이마를 두 손으로 싸맸다. 이제 더는 다른 핑계거리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보고 싶었다고, 그래서 왔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도저히 발이 안 떨어졌다. 인파 사이를 파고들어 식장 안으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는 온갖 시뮬레이션을 돌려 삼류급 드라마와 영화를 백 편 정도 찍고 재탕에 삼탕까지 우려먹었지만 현실의 정국은 불청객을 자처할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스무 살이었던 태형만을 기억하는 전정국은 스물일곱이 된 김태형을 볼 자신이 없었다. 씁쓸했다. 설령 그가 청첩장을 보내지 않았더라도(정국은 못 받았지만) 앞으로 영원히 그를 만날 기회는 없었음을 머리로는 너무 잘 알았다. 하지만 오늘 결혼하는 김태형이 미워죽겠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더럽게 일찍 결혼하네. 요즘 세상에 누가 스물일곱에 결혼 하냐고. 늙어 죽을 때까지 세상 혼자 살 것처럼 굴었으면서.
눈이 뻑뻑해지고 입 안이 바짝 타들어갔다. 심장이 기분 나쁘게 두근두근 뛰었다. 니코틴에 한 번 길들여진 뇌가 흡연을 부추기고 있었다. 이미 타당한 변명거리도 있겠다, 계획적으로 착착 실천해왔던 금연이란 올해의 목표가 눈앞에서 휘청거렸다. 삼개월간 나름대로 굳건히 지켜왔던 금연은 이렇게 또 실패로 돌아가나 보다. 마른 침을 삼키며 잠시 동안 망설이던 정국은 발을 돌려 웨딩홀 맞은편의 높은 건물 사이 골목으로 뛰어 들어갔다. 주변에 주의를 기울일 만큼 제정신은 아니라서 골목길로 들어서자마자 안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너무 오랜만이라 라이터를 쥐는 손이 자꾸 미끄러졌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불을 붙이고 끄트머리를 입에 물었다. 이것만 딱 태우고 여길 벗어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니 필터를 빨아 당기는 입술이 쓰렸다. 담뱃재 털어낸다고 모든 걸 다 털어낼 수 있을 리가 없다는 걸 알아서 그랬다.
“콜록콜록. 콜록! 콜록콜록!”
옆에 사람이 있었나보다. 볼이 깊숙이 파일 정도로 흡연에 몰입하고 있던 정국이 움찔거리며 퍼뜩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담뱃불을 구둣발로 비벼 껐다. 제발 담배 좀 끄라는 식으로 쥐어짜내는 듯 억지가 그득그득 묻은 기침 소리라 눈치를 안 볼 수가 없었다. 정국은 죄송하다는 사과라도 해야겠다 싶어 기침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반쯤 돌렸다. 최소한의 성의를 보이기 위해 목례를 까딱한 뒤 얼굴을 들었을 때,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하게 들어찬 콩알만 한 얼굴 하나가 떡하니 정국의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생김새고 자시고 퍼스널 스페이스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듯 갑자기 들이 밀어진 타인의 얼굴에 깜짝 놀란 정국이 뒷걸음질을 하며 몸을 뒤로 물리는데, 적정거리를 두고 선명해진 얼굴이 너무 낯익었다. 하긴, 대뜸 콧등이 부딪힐 정도로 허리까지 숙여가며 얼굴을 갖다 댈 사람이 이 지구에 딱 한 명 있긴 했다. 이렇게 다시 볼 줄 몰랐을 뿐이지.
“야, 너 담배도 펴? 아기는 담배 피우는 거 아니야~”
“…….”
“결혼식 왔나봐? 엄청 꾸몄네.”
누가 봐도 엄청 꾸며서 제일 화려한 사람이 마치 어제 만난 사이처럼 능청스레 말했다. 정국의 입술이 멍청히 벌어졌다. 커다란 두 눈을 아기송아지처럼 느리게 꿈벅거렸다. 1초가 1분처럼 지나갔다. 수백 번 준비하며 어떻게 첫인사를 시작해야할지 대본까지 짜놨지만 그것도 벌써 몇 년 전이라 이미 기억에서 잊힌 지가 오래였다. 하지만 정국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 예나 지금이나 머리는 엄청 좋아가지고. 저렇게 선수를 치는 것도 여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아주 멍청한 미련투성이 바보 전정국’ 단계에서 그제야 한 칸 올라올 수 있었다.
태형은 7년의 시간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먼저 행동했다. 그래서 이쪽도 마찬가지로 똑같이 긴 시간을 묵과하고 덤덤하게 반응해야만 옳고 후에 쪽팔리지 않을 것 같다는 다소 방어적인 판단이 들게 만들었다. 단 두 줄의 문장으로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까지도 자신에게 감정이 남아있다고 상대방이 착각할지도 모른다는 염려와 불편함까지 덤으로 떠안겼고.
그러니 정국은 몹시 쿨~하게 대응하기로 마음먹었다. 놀라서 잠시 멈췄다가 벌떡 뛰는 심장을 입 밖으로 꺼내놓으라면 그럴 수도 있었지만 정국은 평정을 유지했다. 오버해선 안 됐다. 아주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태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인중만 집중적으로 봤다. 인중을 중심으로 정국의 시야에 들어온 태형은 성숙해졌고, 많이 어른스러워져 있었다. 그것만 제외하면 변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여전히 얼굴이 작고, 까무잡잡한 피부는 반질반질하다 못해 광채가 흘러 눈이 부셨다. 촉촉한 입술과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자기과시가 심한 높은 코에서 정국은 일단 시선을 멈췄다. 태형의 눈동자까지는 막상 쳐다볼 용기가 안 났다. 그냥, 또 정신없이 빠져 들어서 바보같이 굴까봐 무서웠다.
이번에는 그의 옷차림을 뜯어보았다. 동네 마실 나가듯 후줄근한 사복과 교복을 입었던 모습 밖에 남아있지 않은 기억메모리함에 연한 하늘색 정장 차림의 태형이 추가되었다. 정국은 불만으로 코끝을 찡그렸다. 재수 없다. 고급미가 줄줄 흘러넘치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 없게 차분히 웃기만 하고.
스무 살일 적에는 스무 살처럼 예뻤던 태형은 스물일곱인 지금은 그 나이의 어른답게 빛이 나고 아름다웠다. 스무 살의 태형이 스물일곱이 되면서, 그 시간을 거치며 달라진 점과 그럼에도 달라지지 않은 점이 동시에 큰 이끌림으로 작용하며 정국을 무겁게 덮쳤다. 덕분에 지독한 그리움과 늘 태형에게서 느꼈던 낯선 새로움이 정국을 마구 들쑤셨다. 뭘 어쩌자고 또 이러는가 모르겠다. 저 인간은 오늘 결혼하는데. 결혼. 하나의 단어가 이렇게 사람을 우울하고 비참하게 만들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태형은 아무 말이 없었다. 홱 고개를 돌려버린 정국을 보며 어깨를 으쓱하다가 정국의 발에 짓밟혀진 담배꽁초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눈은 다른데다 뒀지만 넓은 시야로 태형을 훔쳐보고 있던 정국이 꽁초를 주울 것처럼 몸을 숙이는 태형을 뭐하냐며 재빨리 저지했다. 여기다 버리면 안 되잖아~ 태형은 또 웃었다. 정말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태형에게 화가 나고 서운해진 정국은 거의 산산조각이 난 꽁초를 투박하게 주워들었다.
많이 컸다는 말도 해주지 않는다. 더 잘생겨졌다는 말도 안 한다. 오랜 만이라든지, 이제는 길에서 만나면 모르겠다든지, 뻔하고 흔한 말이라도 해줘야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그 말미조차 주지 않아 원망스러웠다. 조금도 놀라지 않고, 손톱만큼도 당황하지 않는다. 그래, 그저 행복하시겠지. 정국은 눈을 세모나게 뜨며 휴대폰 화면으로 세팅한 머리를 정돈하는 태형을 몰래 째려보다가 이내 바닥으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뒤늦게 쪽팔렸다. 내가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진한 현타가 머리를 때렸다. 아주 잠깐 눈앞의 태형을 꼬드겨 오늘 그의 결혼식을 파토라도 내야겠다고 생각했던 본인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초에 꼬드긴다고 넘어올 인간이었던가. 머리가 미쳐버렸나. 어떻게 이렇게 못된 생각을 했지.
정국은 기운 없는 웃음을 비식 흘렸다. 다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짜 이게 끝이다. 두 눈을 부릅뜨고 주먹까지 꽉 쥐었다. 하지만 마음은 자꾸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그 여자 사랑해요? 왜 사랑해요? 정말 결혼 할 거예요? 공격적인 질문이 속에서 날아다녔다. 밖으로 꺼내지지 못한 뾰족한 화살은 결국 정국의 마음에 상처를 냈다. 하지만 워낙 아픔에 단련돼있어서 그 정도의 고통은 가뿐히 무시할 수 있었다. 다만 지금이 7년의 공백 끝인 오늘에서야 이뤄진 태형과의 마지막 장면이라면 이번엔 좀 멋있게 퇴장하고 싶었다. 정국은 소리를 죽여 목을 가다듬었다. 눈가가 축축해지고 있었지만 앞으로 5분 정도는 울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혼 축하해요.”
“…어?”
태형의 얼굴이 미세하게 바뀌었다. 정국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에 재미를 붙인 건지, 뚫릴 정도로 정국의 이마 끝에서부터 짧고 단단한 턱 끝까지를 빤하게 들여다보던 태형이 시원하게 트인 커다란 눈을 두 번 정도 빠르게 깜빡거리다가 한 박자 늦게 대꾸했다. 정국의 잘생긴 이목구비가 금세 시무룩해졌다. 김태형 지금 축하한단 말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저러는 거지. 정국은 입술을 불퉁하게 내민 채 칼로 수 백 번은 더 쑤셔진 속내를 애써 감추고 최대한 덤덤하게 한 번 더 그의 결혼을 축하해주었다.
“오늘 결혼이요. 축하한다고요.”
“…….”
“고맙다고 말도 안 해줘요?”
“…어어, 고마워.”
“저 이제 가요. 초대도 안 했는데 불쑥 나타나서 미안하고요. 근데 안 미안하고요.”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정국은 기운 없이 몸을 비틀거리며 골목길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실 조금 불쌍해 보이려고 연기한 것도 있었다. 조금이라도 신경 쓰이라고 일부러 그런 거다. 그 와중에도 머리가 그런 쪽으로 팽팽 돌아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취한 척 할 걸. 필름 핑계를 대며 시치미를 떼기로 진즉 작정했다면 한 번쯤은 안겨볼 수도 있었을 텐데….
“정국아.”
몸이 저절로 우뚝 멈추었다. 내내 꽉 막혀있던 목구멍이 울컥거리고 콧김이 세게 빠져나왔다. 안 된다. 오랜만에 이름 한 번 다정히 불러줬다고 우는 건 너무 추했다. 안구에 습기가 찬다는 표현이 지금 정국의 상태와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정국은 얼굴을 위로 치켜들고 동그란 동공을 미친 듯이 상하좌우로 굴리며 건조하게 만들기 위한 노력을 펼쳤다. 정국의 등 뒤로 구두의 굽과 바닥이 닿는 가벼운 마찰음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 발소리에 맞춰 정국의 심장도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가 다시 점프를 해서 제자리로 원상복귀를 하는 격렬한 운동을 반복했다. 그 격한 움직임에 가슴이 뻐근해지고 뭉쳐있던 아픔이 넓게 번져갔다. 들고 있던 꽁초가 정국의 손안에서 완전히 으스러졌다.
“너 말이야.”
태형은 손을 뻗어 정국의 팔을 잡고 당겼다. 애초에 붙잡히기 위해 힘을 쭉 빼뒀던 몸은 태형의 손에 이끌려 쉽게 돌려세워졌다. 이윽고 태형과 눈이 제대로 마주쳤다. 만화캐릭터와 비교해도 큰 차이점을 못 느낄 만큼 얼굴의 반을 차지하는 그 커다란 눈동자와 말이다. 길게 드리워진 속눈썹 사이로 햇빛을 담은 태형의 눈이 반짝거렸다. 입술만큼이나 촉촉한 눈동자. 정말 짜증날 정도로 잘생겼다. 이 와중에도 이렇게 예쁠 일인가. 신부가 부러워서 속이 다 꼬였다. 추억팔이라고 욕할 지도 모르겠지만, 뭣 모르던 고2 시절엔 이쪽도 헌신적이라면 헌신짝이 될 정도로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단 1초라도 태형과 같은 공간의 공기를 나누지 않으면 곧바로 죽을 사람처럼 옆에 붙어있기를 자처했던 때도 있었단 말이다. 대체 얼마나 어떻게 공을 들였기에 바람 같은 저 인간과 결혼에 골인했냐고. 너무 부럽고 질투가 났다.
“너 오늘 여기 왜 왔냐?”
“말했잖아요, 축하해주러 왔다고.”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고? 이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
얼굴만큼이나 아름답고 몸만큼이나 유려한 선을 가진 손을 뻗어 태형이 정국의 뺨을 쓸어내렸다. 그 사소한 닿음에도 정국은 크게 움찔하며 고개를 돌렸다. 꼭 사람과 피부를 맞대는 경험을 처음 겪어보는 것처럼 7년이란 시간을 휴지통에 갖다버린 심장이 펄떡펄떡 뛰었다.
“…내 얼굴은 원래도 예뻤거든요.”
투덜거릴 의도는 추호도 없었는데 꼭 투정부리는 아이 같은 목소리가 나왔다. 태형은 퍽 만족했는지 살랑살랑 눈을 접으며 입술을 부드럽게 끌어올려 웃었다. 허공에 잠시 멈춰있던 손을 움직여 이번에는 손바닥 전체로 정국의 뺨을 감쌌다. 다 알고 있다는 미소. 다 알아차렸다고 말하는 손짓. 이게 아닌데. 정국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내려다보는 까만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태형은 기를 쓰고 애를 쓰는 정국을 보며 다시 사르르 웃었다. 확실히 젖살이 다 빠지고도 남을 나이지, 너도. 예전만치 손에 가득 잡히지 않는 볼이 아쉬웠다. 가만히 있으면 사선으로 파이는 선이 생기는 하얀 뺨을 어루만지던 태형의 손길이 점차 입술로 향하자 정국이 깊게 인상을 찌푸렸다. 손 떼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태형은 모른 척 할 터였다. 그리고 여기서 정국을 울컥하게 만들 것이다. 그건 생각처럼 참 쉽다.
“정국아.”
“…….”
“나 갑자기 너 보니까 결혼하기 싫다.”
“정말 미쳤어요?”
정국이 목소리를 높이며 고개를 퍼뜩 들어 태형을 노려보았다. 1mm의 오차도 없이 예상과 딱 들어맞는 정국의 반응에 태형은 뺨을 만지던 손을 정국의 어깨로 내리고 허리까지 숙여가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움직임을 따라 그의 귓불과 이어진 기다란 드롭 이어링이 흔들리며 빛을 뿜었다. 정말 별 거 아닌 행동인데도 너무 예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바탕 웃음을 터뜨리느라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을 손끝으로 닦아내던 태형이 몸을 바로 세웠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장난을 칠 수가 있는 건지. 정국은 화를 내는 것 대신 자포자기를 선택했다. 마음대로 하라는 듯 몸에 힘을 풀고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주제에 자신의 어깨를 쥐고 있는 태형의 손은 엄청나게 의식하고 있었다. 감각 세포가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려 할수록 오히려 더 어색했고 그러한 정국의 내적 분투를 태형은 단번에 바로 알아차렸다. 의미심장하게 좁혀졌던 태형의 눈길이 깊어졌다.
“그러게 왜 왔어. 뭐하러 왔어.”
“…이제 갈 거예요.”
“무슨 말이 하고 싶었는데? 또 무슨 말이 듣고 싶었는데?”
“…….”
“이렇게 잘 커서 더 잘생겨지고 섹시하기까지 한 너를 나한테 왜 보여주고 싶었어?”
이건 태형의 방식이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 태형은 항상 정국에게서 직접 그 대답을 듣고 싶어 했다. 쏟아내는 질문이 답안과 점점 가까워질수록 도리어 더 초조하고 애가 타는 건 정국이었다. 어깨에 걸치듯 얹어져있던 손이 안쪽을 파고들며 정국의 다부진 목덜미의 생살을 건드렸다. 정국의 단단한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렸다. 힘없이 바닥만 향하고 있는 두 손의 끝도 저릿하게 떨렸다. 무슨 말이 듣고 싶었냐고? 왜 보여주고 싶었냐고? 잘 알고 있잖아요. 세상 사람들 다 몰라도 형은 알아야지.
불안하게 흔들리던 정국의 눈빛이 어느 순간 곧아졌다. 그 직선과도 같은 눈이 태형을 관통했다. 순하고 선한 동그란 눈에서 약간의 독기와 분노, 배신감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일 때 태형은 그게 악취미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정국의 변화에 짜릿한 희열을 느꼈다. 거기서 처연함과 원망, 서러움까지 섞이면 그 맛은 더 황홀해졌다. 이런 식으로 확인하는 버릇을 제발 고치자고 마음먹은 게 벌써 몇 년째인데도 잘 안 됐다. 원래 개 버릇 남 못 준다잖아. 그러니 정국아, 조금만 더 괴로워해줘.
“형 흔들리라고.”
“…뭐?”
“흔들려서 결혼 같은 거 하지 말라고. 근데 그냥 잘 살아요. 어차피 이제 정말 다시 볼 일도 없을 텐데.”
“진심이야? 나 진짜 결혼해?”
“왜 나한테 물어요? 내가 결혼해요? 결국 자기 멋대로 할 거면서.”
“그러니까 나 정말 결혼하냐고. 너 그거 볼 수 있냐고.”
“…….”
대답은 ‘아니요’다. 그건 처음부터 정해져있었다. 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김태형이 결혼하는 건 못 보겠다. 하지만 못 보겠으면 혼자서 안 보면 되는 거였다. 정국은 같은 상황을 또 겪고 싶지 않았다. 김태형은 아무 말 없이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버린 전적이 있었다. 그게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는 구태여 설명하지 않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는 김태형을 믿지 않겠다는 교훈은 그 아픔과 맞바꾸고 얻은 소중한 경험이었다.
정국은 단전부터 스미는 통증에 앓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눈을 가렸다. 괴로워하는 정국과 마주한 태형은 열여덟 살이었던 그에게 종종 그랬던 것처럼 가늘고 하늘하늘하지만 숱이 많아 풍성한 정국의 머리카락 사이사이를 손가락으로 헤집었다. 손마디로 머리카락이 스치고, 손끝이 머리를 스쳤다. 아찔했다. 순간 까마득해진 정신이 그대로 먼지처럼 날아갈 것 같은 아득함을 느끼며 정국은 눈을 질끈 감았다. 조곤조곤한 낮은 목소리가 피부로 닿았다.
“나한테 협조해.”
정국은 어깨를 짓누르는 괴로움을 차단하기 위해 억지로 감았던 두 눈을 다시 떴다.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싶어서 두개골 전체가 띵하게 울렸다. 생뚱맞은 단어를 휙 던져놓고는 심각하고 진지하게 말을 이어가는 태형을 보며 어떻게 반응을 해줘야 할까 고민했다.
“이대로 여길 나가면 난 오늘 할 게 없잖아. 그럼 난 심심할 거고. 그러니까 니가 내일 아침까지 나랑 있어줘.”
“나 대답 안 했거든요?”
“걱정 마, 나 아직 싱글이야. 법적으로도 문제없어.”
“…발 뺄 거예요. 형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먹고 튈 거예요.”
“하하, 그런 표현도 쓸 줄 알아? 정말 먹고 버리길 잘했네.”
기특하다는 듯 태형이 정국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 먹고 튈 거라는 엄포에 자기한테서 배운 거냐며 대견해죽겠다고 턱을 간질이고 등을 얼러주는 사람이 또 있을까.
분명 정상적인 사람과는 사고부터가 다른 인간이다. 절대 익숙해질 수 없는 특이점이 특별함이 되어 일반적인 사람들을 오히려 시시하고 지루하게 만들어버리는. 외면도 내면도 다른 사람으로 절대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라, 그가 가득히 차지했던 공간은 다른 누구로도 채워질 수 없었고 그래서 텅 비어버린 채로 한참을 내버려두어 그저 공허했다. 그 공백이 또다시 김태형으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마냥 좋아할 순 없었다. 이미 한 차례 겪었으니까. 너무 좋아서 열렬히 좋아만 하다가 결국에는 어떻게 됐더라.
“나랑 제일 하고 싶었던 게 뭐야?”
“…….”
“나 만나면 제일 하고 싶었던 거.”
“…….”
“뭐야, 진짜 없어?”
“…호텔로 가요, 일단.”
아름다운 재회? 필요 없다. 한 때는 꿈꿨지. 꼭 내 앞에 다시 나타날 거라고. 왜 갑자기 사라졌는지 돌아와서 설명해줄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 때로부터 벌써 시간은 이만큼 지나버렸고, 이곳에 발걸음 했을 때부터 그런 바람은 진즉 다 버렸다. 정국은 지금 이 순간, 신부의 얼굴을 알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미안하긴 했다. 덜 미안했을 뿐.
호텔로 가면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거다. 자겠지, 아무래도. 열여덟일 적에 단 한 번 자신에게 허락되었던 스물의 몸을 아주 오랜만에 바라보고 만질 수 있을 거다. 물론 그 때처럼 나체가 된 두 몸이 만들어내는 장면들이 마냥 아름다울 순 없을 터였다. 눈물이 난다면 순수하게 너무 감동적이고 가슴이 터질 듯 뭉클해서가 아니라, 순간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누군가에게는 피해를 끼치고 상처를 주면서까지 태형과 얽히고 싶어하는 자신에 대한 혐오 때문일 테니.
태형은 오늘 자신의 결혼을 깼다는 자각조차 없는 사람처럼 골목을 나오자마자 냉큼 택시를 잡았다. 정국은 그 뒤를 느리게 따라갔다. 빨리 오라는 듯 뒤를 돌아본 태형이 환하게 웃으며 정국을 향해 손짓을 했다. 왜 양심의 가책은 내 몫인 거죠. 어이가 없었다. 어떤 각도로 태형을 바라보아도 결혼식을 앞두고 도망가는 새신랑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잘생기고 어린 애와 이런 거 저런 거 하며 놀 생각에 신난 사람으로밖에 안 보였다. 어째 7년 전보다 더 감당이 안 되는 느낌이었다.
택시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태형이 지낸다는 호텔로 향하면서 정국의 기분은 더욱 침잠되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지. 이렇게 되려고 마음먹고 온 거지만 진짜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뒷일은 어떻게 책임지려고 이러는 거야, 이 인간? 아니다, 김태형한테 바람직한 기대를 해선 안 됐다. 차라리 미친 척하며 문을 열고 뛰어내리는 게 훨씬 현명하다.
태형보다 비교적 도덕적인 뇌를 가진 정국은 현재 극심한 갈등상태였다. 다시 태형을 결혼식장으로 돌려보내고 일단 오늘의 결혼식은 무사히 치르라 하고 싶었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정국 역시 태형과 자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나랑 자도 되잖아?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진짜 돌았냐, 전정국? 정국은 완벽하게 세팅했던 머리를 두 손으로 꽉 움켜잡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스스로를 마구 힐난했다. 너무 쉽게 도덕성을 잃어버린 자신을 비난하고 혼을 냈다. 들뜬 마음에 양 어깨를 들썩거리며 훙훙 콧노래를 부르던 태형이 뭐하냐는 듯 히죽 웃으면서 상체를 숙여 정국과 몸을 밀착했다. 그에게서 훅 끼쳐오는 좋은 향에 정국의 머릿속이 리셋 되었다. 허벅지를 짚은 은근한 손길에 깨끗해지고 말끔해진 정국의 머릿속으로 다른 생각들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너 더 단단해졌네.”
“손 치워요.”
“…왜 화났어?”
“뒷일 생각 안 하는 형이 싫어서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지 그래요?”
“있잖아, 나는 이런 기회가 또 올 거라고 생각 안 해.”
태형은 진지한 빛이 도는 눈을 깜빡이며 하나하나 짚는 것처럼 말을 이었다. 바라보기만 해도 빠져드는 얼굴을 하면서 손은 점점 더 허벅지 안쪽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정국은 마른 침을 삼키며 태형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응수하듯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 이상 멍청하게 굴지 않기가 유일한 희망사항이었다.
“그 때 끝까지 했어야 됐는데, 하고 후회한 적 없어?”
“…….”
“아기 같던 열여덟 전정국을 진짜 제대로 먹고 갔어야 했는데, 하고 난 정말 후회 많이 했다?”
“할 얘기가 그거밖에 없어요? 나한테 설명할 게 그게 다에요?”
“…너 화내는 지금 얼굴 진짜 내 취향이다.”
기대도 안 했지만 대화가 전혀 이어지지 않았다. 한 명은 구구절절한 설명과 이번에는 다를 거란 확신을 원하고 있었고, 한 명은 글쎄. 아무리 봐도 제 정신이 아니라서 뭘 원하는 건지 감이 안 잡혔다. 정말 단순히 한 번 하려고 결혼식도 내팽개치고 호텔로 가고 있는 거라고? 맥이 풀린 정국은 허탈한 숨을 뱉으며 태형을 밀어내고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속력을 높인 택시로 인해 덜덜 떨리는 창문의 진동이 이마께로 느껴졌지만 도저히 몸을 일으킬 여력이 안 됐다. 정국은 잠자코 입술을 꾹 다물고 창문 너머로 스쳐지나가는 거리만을 주시했다.
단순한 생각회로가 마구잡이로 꼬이고 엉켰다. 오늘 하루의 마지막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한 치도 예상이 안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의 원인이 태형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정국은 오늘 정연의 차에 몸을 싣고 결혼식장에 도착할 때까지 진심으로 이 결혼식을 파토내고 싶었다. 일단 태형의 눈에 띄면 어느 정도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저의 잘못이었다. 태형이 저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딱 한 번만 눈이 마주친다면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태형과 함께 호텔로 향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을 원했기 때문에 기어코 식장에 발길을 찍었던 전정국의 잘못. 걸리는 게 있다면, 여전히 모르겠는 김태형의 속내다. 어느 정도 단단히 마음을 먹긴 했지만 누군가의 결혼식을 박살냈다는 자책감의 무게도 상당했다.
태형은 이쪽을 돌아볼 생각도 않는 정국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시트에 등을 붙이고 앉았다. 그러면서도 정국에게 들러붙는 눈길을 떼어내지 않았다. 기분이 좋았다. 자꾸만 발가락이 멋대로 까딱이려고 했다. 입술 끝이 말을 듣지 않고 씰룩거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잠시 택시 안을 둘러보았던 태형은 눈동자만 옆으로 슬쩍 굴려 다시 정국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방금 전 정국이 스스로 쥐어뜯은 탓에 엉망이 된 머리스타일을 정돈해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가 답답함과 분노로 펄펄 끓고 있을 정국의 속을 더 들쑤실 것만 같아 냉큼 다시 거뒀다. 정국은 숨을 급하게 몰아내시며 두툼한 가슴팍을 한참 시근덕거렸다. 그걸 보니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너무 못되게 굴은 것 같아서. 그래도 좋았다. 동그란 뒤통수를 살살 긁고 끝이 살짝 갈라진 턱 끝을 깔짝이며 통통한 귓불을 장난감 가지고 놀 듯 질릴 때까지 실컷 주무르고 싶었다. 7년 치를 싹 몰아서.
솔직히 말하면 오늘 이렇게 정국을 만나게 될 줄 태형조차도 몰랐다. 어쩌면, 혹시, 같은 단어가 머릿속을 지배하긴 했지. 그게 퍼즐처럼 딱 맞아떨어져서 기뻤고. 정국을 여기까지 오게 한 건 그의 마음속에서 길길이 날뛰는 미움 때문일 것이다. 식히고 다독이다가 죽였다고 생각한 그 미움이 마른 밭에 붙은 불씨처럼 화르륵 퍼져나가 온통 정국을 삼켰을 테고. 미운 건 김태형 하난데, 그 미움 때문에 많은 사람에게 불편과 피해를 줬다고 생각하니 그게 또 못 견디게 고통스러운 거다. 너무 사랑스럽고 착하고 귀엽지 않나. 열여덟의 전정국이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아이였다면 그렇게까지 좋진 않았을 거다. 전정국이 적당히 평범하게 착한 아이였다면 그렇게까지 잔인하진 않았을 거고. 태형은 풋 터지려는 웃음을 입 안으로 삼켰지만 휘어지는 눈가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조절이 잘 안될 수밖에. 무려 7년 만에 마주하는 전정국의 얼굴이었다.
대기업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규모를 가진 중소기업 집안의 막내아들은 미국으로 출산원정을 떠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나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유년기를 보내다가 미국의 고등학교로 입학을 했다. 한국에 뿌리를 내렸던 가족구성원이 부모의 합의이혼으로 찢는 것처럼 갈라지게 되면서 태형은 공부 핑계를 대고 완전히 미국에 눌러 붙었다. 그 때부터 삐딱선을 타기 시작했다. 일부러 날티나는 친구들을 골라 사귀었고 또 어울려 다녔다. 회사를 이어받을 사람이야 위로 형제가 둘이나 있었기에 친부는 태형의 일탈을 방치했고, 새로운 사람과의 만남을 시작하고 있던 친모는 그저 태형이 잘 살고 있겠거니 짐작하며 자신의 삶에 집중했다. 성실했던 학교생활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유혹에 약한 성격은 아니었다. 다만 손에 쥔 것은 많은데 자꾸만 무언가를 잃는 것처럼 공허하던 태형의 앞에 방황과 반항을 상징으로 삼았던 그들의 등장은 구원과도 같았다. 뭐, 어렸을 때니까 그럴 수도 있지.
딱히 큰 사고를 치지는 않았다. 빈번히 학교를 빠졌으니 당연히 출석일수가 모자랐고, 공부의 필요성을 못 느끼니 열의가 없을 뿐더러 시험 성적도 좋지 않을 수밖에. 그러니 다음 학년으로 진급도 못 했고. 거기서 그쳤다면 좋았을 텐데 뭣 모르고 파티에서 약에 손을 댔다가 그만 딱 걸려버렸다. 약 자체는 합법이었는데 미성년자였다는 게 위법이었다. 술과 파티로 오랜 시간 자체 자숙을 하고 있던 태형을 결국 보다 못한 친부가 불러들였고 불법행위를 저질러야 관심 한 조각이라도 받는 구나 생각하며 태형은 순순히 한국행 비행기에 올라탔다.
일단 잘못한 게 있으니 고등학교는 한국에서 졸업하겠다고 먼저 선언을 했다. 더 이상 말썽을 피우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카드를 돌려받긴 했으나 거의 타지와 다름없는 한국에서 그것도 우울하기 짝이 없는 대한민국 고3의 길을 걸어야했던 태형은 사람의 온기가 절실했다. 섹스프렌드였던 금발의 양놈이 잘 지내냐 안부를 물을 때마다 태형의 답장은 늘상 같았다. I miss your dick.
비록 교복에 얽매여있긴 했으나 태형은 당시 스무 살, 성인이었다. 차마 성인된 입장에서 고등학생을 건드리는 건 도리가 아닌 듯하여 클럽을 전전하며 괜찮을 만한 인물을 탐색했다. 1n년 간 크고 푸른 눈과 높다란 콧대를 가진 외국인의 이목구비에 익숙해진 눈에 차는 사람이 단숨에 나타날 리가. 몇 번의 시도를 거듭한 끝에 어느 바에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누가 봐도 돈 좀 있어 보이는 분위기와 미국물을 왕창 먹어 엄청나게 개방적인 오픈마인드 성격은 부수적인 옵션일 뿐이고, 일단 얼굴이 김태형이니 어려울 게 없었다. 이렇게 생긴 애가 빤하게 쳐다보며 웃어주는데 누가 안 꼴려? 하지만 태형은 시시껄렁한 연애놀음에는 흥미가 없었다. 주된 목적은 몸이었다.
서양인과 동양인은 신체구조부터가 다르니 넓디넓은 아량과 이해심을 갖자고 다짐한 뒤 남자의 그것과 마주했음에도 그는 실망 그 자체였다. 손가락 아니야, 손가락? 깜짝 놀랄 정도로 볼품이 없어서 성욕과 입맛까지도 말끔하게 사라졌다. 어쩐지 소중히 하고 지켜주고 싶다는 같잖은 개소리를 하며 질질 끌더라니. 아무리 급해도 먹으면 안 될 것까지 주워 먹고 싶진 않았던 태형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미련 없이 휙 그 자리를 떠났다. 오는 연락을 죄다 무시했지만 남자는 어떻게 알았는지 학교 앞까지 찾아와서 태형을 붙들고 늘어졌다. 그는 태형의 팔을 잡고 어깨를 끌어안는 등 혼자서 쇼를 펼쳤다. 타인에게서 느껴지는 스토커 기질에 소름이 오소소 돋았지만 태형은 다시금 떠오른 그의 작은 크기에 불쌍과 연민을 느꼈다. 에휴, 못난 사람, 하며 떨떠름하게 그의 포옹을 받아주고 있었다.
그런 태형을 마침 교문을 지나가던 정연이 발견했다. 가는 길을 가고 있던 정연은 뭐라도 씹은 얼굴로 남자의 품에 떠밀리듯 안겨있는 태형을 쳐다보았다. 태형은 무덤덤하게 아, 같은 반 애네, 정도만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관심 없다는 듯 스쳐지나가던 정연이 태형에게서 서른 발자국 정도 멀어졌을 때, 그녀는 돌연 걸음을 멈추었다. 귀찮은 장면을 봤다는 듯 터벅터벅 걸어온 정연은 ‘원조교제 중?’ 하고 대뜸 남자에게 물었다. 갑작스러운 제 3자의 등장에 남자가 태형을 밀어내고 어버버거리는 사이, 거침없이 숫자 세 자리를 누르는 정연을 보며 태형은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정연은 112가 입력된 화면을 남자의 코앞까지 들이밀었다. 태형은 그녀가 아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반이기는 했으나 접점이 없었던 둘은 그 일을 계기로 아주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었다.
해외 곳곳을 전전하는 유명한 사진작가인 아버지와 그의 영원한 동반자일 어머니를 둔 전씨 남매는 정국이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상경하여 알아서 전셋집을 척척 구한 뒤 이 년째 같이 살고 있는 중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부터 태형은 정연의 집으로 놀러가고 싶다고 계속 졸랐다. ‘아, 싫어. 너 내 동생 꼬실 거 같애.’ 정연은 말을 담아두지 않고 솔직하게 툭툭 내뱉는 성격이었다. ‘나 눈 되게 높아 너 닮은 남자애면 절대 안 꼬셔.’ 어쩐지 기분이 나빠진 정연이 얼굴을 마구 구겼다. 태형은 사르르 웃으며 책상에 걸터앉아 붕 뜬 발을 공중에 휘저었다.
정연은 모르겠지만 태형은 이미 정국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숨겨지지 않는 어린 열기를 몸을 움직이는 것으로 발산하는 한 남자아이를 창문으로 내려다보는 일만이 학교에서 유일한 태형의 낙이었다. ‘야, 전정국!’ 멀리서 들리는 이름소리에 그 아이가 정국임을 알았다. 부모님과 함께 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언제라도 놀러갈 수 있겠다 싶어 정연에게 졸랐던 게 아니라, 정국이 정연의 동생임을 알게 된 뒤부터 정국과 친해지고 싶어 정연에게 들러붙은 거였다. 태형의 속내를 알 리 없는 정연은 타인의 방문을 꺼리는 깔끔한 남동생의 반응이 걱정되었지만 어쩐지 태형의 웃는 얼굴 하나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보충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정국은 현관에 하나 더 늘어있는 신발 한 쌍을 보고 멈칫했다. 안녕~ 처음 들어보는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에 운동화를 벗기 위해 숙였던 허리를 천천히 들었다. 속수무책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정국은 정연을 쪼기 시작했다. ‘그 형 또 언제 와? 자주 오시라고 해. 아예 하루 아니 일주일 정도 묵으셔도 된다고 좀 전해.’ 낯가리는 천성을 버리지 못해서 세상 예쁨 다 끌어 모아 웃으며 인사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면박 주듯 쌩하니 방에 들어갈 땐 언제고, 정국은 자꾸만 정연의 옆으로 와서 귀찮게 질척거렸다. 허구헌날 방에서 게임이나 즐겨하던 동생 녀석이 자꾸만 옆에 앉아서 그 형, 그 태형이 형, 거리는데 아주 눈꼴셨다. 그러면 정연은 다음 날 학교에서 아니꼬움이 팍팍 묻어나는 얼굴로 태형을 툭툭 건드리고 동생의 말을 대신 전해주었다. ‘내 동생이 너 좋은가봐 너보고 자주 오래.’ 엎드려서 자는 척을 하고 있던 태형이 고개를 휙 들어 두 뺨을 감싸고 신나게 발을 까딱거렸다. ‘나 오늘도 너네 집 갈래. 근데 절대 네 동생 보러 가는 건 아냐. 그냥 니네 집이 좋아서.’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열여덟 전정국은 정말 예쁘고 귀여웠다. 서툰 구석까지 전부 사랑스러웠다. 제대로 된 대화를 하기 전부터 태형은 정국이 저를 의식하는 것을 느꼈고 그래서 더 눈치 없는 척 정국에게 엉겨 붙었다. 냉장고 문을 열고 통통한 바나나 우유를 집어드는 정국의 옆에 괜히 붙어 서서 주위를 얼씬거리며 눈을 맞추고 몸을 갖다 대고 팔을 만지작거렸다. ‘정국이는 바나나 우유를 좋아하는 구나. 나는 콜라 좋아하는데.’ 입을 놀리며 추근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국은 귀와 목이 새빨개져선 떠듬떠듬 눈알을 굴릴 정도로 당황했음에도 혼자만의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지금 콜라 사올까요. 형이 마시고 싶다면 사올게요.’ 하고 풋내나는 직진 멘트를 서슴없이 날렸다.
전정국의 일과가 송두리째 바뀌었다. 쉬는 시간마다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던 몸은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그러면 앞문이나 뒷문을 열고 태형이 간식거리를 한가득 안고 나타났다. 정국은 얼른 태형에게 자리를 내주고 그 옆에 쪼그려 앉아 실실 웃으며 태형을 올려보았다. ‘오늘 새로 들어온 과자가 있다길래 맛이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려고 갖고 왔어.’ ‘와, 나 가지고 실험하는 거예요? 너무하네요.’ ‘빨리 당장 입에 넣어봐.’ 정국이 냉큼 두 입술을 벌리면 태형은 그 사이로 쏘옥 과자를 넣어주었다. ‘형 너무 맛이 없어요.’ 맛이 없을 수가 없는 과자를 우물거리며 정국이 대꾸하면 ‘그래? 그럼 너 다 먹어라.’ 하고 자리를 뜨는 태형이었다. 그러면 정국과 같은 반인 아이들은 태형이 정국을 괴롭히는 건지 챙겨주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것이었다.
전정국이 혼자 다니는 등하굣길이 심심하다는 태형의 말 한 마디에 평소보다 20분이나 일찍 눈을 뜨고 태형이 사는 오피스텔에 도착해 태형을 기다릴 정도로 로맨틱 추구 인간이라면, 태형은 됐다는 대도 자꾸만 한사코 가방을 들어주려는 정국이 행여나 김태형 가방셔틀로 낙인찍힐까 염려되어 그 다음 날부터 가방을 아예 안 들고 다녀버리는 극단적 결론 추구 인간이었다.
전정국의 헌신적이고 순종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이 얼마나 재밌고 즐거웠는지 일일이 설명하자면 하루를 꼬박 새도 모자랐다. 사랑에 푹 절여진 열여덟 전정국의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뭐라도 된 것처럼 우쭐한 기분이 되었다. 옛다 받아라 유혹하듯 윙크를 하며 입술을 모아 허공에 쪽 뽀뽀를 하면 정국은 눈꼬리를 예쁘게 접고 코끝을 찡그리며 웃었다. 내가 그렇게 좋아? 뻔뻔하게 물으면 너무 좋아서 죽겠다는 대답이 1초도 망설이지 않고 돌아왔다. 흐응, 태형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한 손에 들려있던 달콤함을 주었으니 이제는 다른 손에 쥐여진 쓴 맛을 맛보일 차례였다. 나 막 다른 남자 만나고 키스도 하고 자고 다니는데도 좋아? 그러면 사랑스럽게 웃고 있던 전정국의 얼굴에 금이 가고 속상함과 슬픔이 차츰차츰 번져갔다. 아아, 정말이지 그 순간은 너무 짜릿했다. 너무 좋아요 죽을 만큼 좋아요. 애원하듯 울먹이는 목소리에서 사랑을 느꼈다. 행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전정국은 김태형을 평생 좋아하고 싶다고 말했다. 김태형도 전정국이 김태형을 평생 좋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사진작가인 거 누나한테 들었다고 했죠.’
‘응.’
‘이거 봐요. 이게 다 부모님이 여행하시면서 저한테 보내준 사진이거든요.’
‘우와, 엄청 예쁘네.’
평소에도 반짝반짝 빛나는 정국의 눈동자는 부모님이 찍어 저에게 보내주었던 세계 여러 곳의 사진들을 태형에게 소개하고 설명할 때 더욱 눈부시게 빛이 났다. 여기는 아프리카래요. 사막에서 별보면 되게 예쁠 것 같지 않아요? 별똥별도 우수수 떨어진대요. 오로라도 볼 수 있댔어요. 나중에 가면 우리 같이 소원 빌어요. 여기는 스위스 설원. 산꼭대기는 만년설로 뒤덮여있고 그 아래로는 온통 나무로 초록빛이래요. 초록 바다 같다고 그랬어요. 그리고 이 흰 꽃은 전 세계에서 얼마 없는 희귀종인데 이 지역에서만 자란다고 했나. 그리고 여기는…. 꼭 저와 닮은 사진을 꺼내놓고 아기 새가 지저귀는 듯 쉴 새 없이 종알거리는 정국을 바라보는 건 꽤 가슴이 벅찬 일이었다. 설렘이 가득한 얼굴로 설명을 늘어놓는 정국을 보고, 또 그의 말을 경청하게 되면서 태형 역시 자연스럽게 사진 속의 장소에 관심이 생겼다. 경제적 여유야 태어날 때부터 있었고, 졸업하면 시간적 여유도 엄청날 테니 정국이 볼 세상을 미리 봐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애의 눈에 담길 모든 것을 먼저 확인하고 싶었다.
‘형이랑 여기 다 같이 가면 좋겠다.’
‘야, 난 호텔 아니면 잘 못 자. 넌 고생을 즐기는 타입이라 나랑 안 맞아.’
‘내가 침대 해줄게요. 내 몸 위에서 자면 되잖아요.’
‘너 몸이 이렇게 딱딱한데 어떻게 자냐? 이게 다 살이냐? 근육이지?’
열여덟 살 남자애의 신체 일부라고 하기에는 너무 단단한 허벅지를 쿡쿡 찌르며 태형이 따지듯 묻자 정국이 까르르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태형의 손이 이번에는 정국의 겨드랑이를 파고들어 간지럽히자 항복, 항복! 하며 정국이 자지러졌다. 아이의 손에 들려있던 사진첩이 아래로 떨어졌다. 바닥에는 정국이 태형과 공유했던 수많은 아름다운 풍경 사진들이 깔려있었다. 이젠 너무 익숙한 정국의 침대에 발라당 누운 태형이 가만히 사진들을 다시 내려다보고 있는 사이, 간지러움에 발버둥 치느라 올라간 티셔츠를 다시 끌어내리며 정돈하던 정국은 태형의 드러난 목과 어깨에 눈을 고정했다. 모기라도 물린 것처럼 군데군데가 붉었다. 정국의 눈에서 못마땅하다는 따가운 스파크가 튀었다. 열여덟이라도 알 건 다 안다. 정국은 이런 것에 망설임과 부끄러움이 없었다. 태형의 옆에 모로 몸을 뉘이고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다른 손으로는 태형의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빗었다. 감촉이 좋았다.
‘근데요 형. 남친 좀 그만 만들면 안 돼요? 잠자려고 만드는 남친 말이에요.’
‘니가 뭔데 남의 섹스 생활에 간섭해. 동정 주제에.’
‘형이 좋아하는 건 나잖아요.’
‘엥. 누가 그래? 나는 그런 말 한 적이 없는데~’
‘내가 형을 좋아하는데 형이 날 좋아하는 걸 모를까.’
당연하다는 듯 단언하면서 한편으로는 불안해하는 애처로운 모습이 좋았다. 태형은 분명 어디서도 정국 같이 예쁜 아이를 못 만날 걸 알았다. 전정국은 이 우주에서 지금 눈앞에 있는 전정국 딱 하나뿐이니까. 다만 태형은 정국의 절실한 순애를 티끌 하나 묻히지 않고 그 상태로 영구히 보존하고 싶었다. 젊음도 아름다움도 영원한 건 없다는데, 좋아한다는 마음은 오죽할까. 그렇다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편이 낫겠다.
정연과 처음으로 다퉜다. 물론 정연이 화낼 거라고 태형은 당연히 예상하고 있었다. 순진한 애 꼬셔서 옆에 없으면 못 살 정도로 안달복달하게 만들어놨는데 대뜸 졸업하자마자 다시 미국으로 가버릴 거라니 화가 날 수밖에. 나 졸업하면 다시 미국 가. 날아갈 듯 가볍게 뱉어지는 태형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정국의 첫마디는 ‘당장 아르바이트 구해야겠다.’였다. 방학이 되면 미국으로 형 찾아갈 거라고, 그러니 만나만 달라는 목소리는 낮고 덤덤했다. 하지만 고작 열여덟인 전정국은 적당히 사랑하는 것에 서툰 아이라서 곧바로 다 들켜버렸다. 덜 여물은 턱이 떨리고 있었고 눈가는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반질반질한 눈동자에 물기가 스미고 새카만 속눈썹이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태형은 그게 슬펐고 또 기뻤다. 말했잖나, 극단적인 인간이라고. 극과 극을 달리는 감정을 연결하는 건 오직 전정국 뿐이었다. 더 상처주고 싶다. 영영 나을 수 없는 상처를 안겨서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너 김민우 선생님 알아?’
‘네. 화학 과목 담당하시는 선생님이시잖아요. 왜요?’
까만 동공이 흔들린다. 태형의 다음 말을 이미 예상한 머리가 정국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정국의 허벅지를 베고 누운 태형은 슬며시 미소 지으며 정국의 뺨을 쓰다듬고 문질렀다. ‘내가 꼬셨어.’ 정국은 저도 모르게 짧게 신음했다. 아래에서 태형이 저를 올려다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표정 관리가 안 됐다. 정국은 아예 손으로 얼굴을 가려버렸다. 태형은 정국의 단단한 배에 얼굴을 묻고 잘록한 허리를 두 팔로 감싸 가득 끌어안았다.
그는 전정국의 말마따나 잠자려고 만든 남자였다. 전정국처럼 머릿결이 가늘고 보드랍진 않았지만 검은 머리칼을 가졌고 전정국만큼 보송하진 않지만 흰 피부를 가진 남자였다. 전정국은 열여덟인데 그 남자는 서른 중반 대였다. 잘생기고 예쁘고 사랑스러운 전정국은 온 몸으로 상처를 입어가며 사랑을 외쳤는데 남자는 간단하게 잠자리와 메시지로만 사랑을 말했다. 전정국이 주는 사랑은 사랑을 받은 나 자신 그 자체만으로도 사랑의 증표가 되지만 그 남자로 인해 정국의 사랑은 태형에게서 더 완벽해졌다.
학교 홈페이지 자유 게시판에 새로운 글이 게시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사제지간의 옳지 못한 행실을 폭로하는 글과 비디오 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관리자에 의해 글은 몇 시간 만에 바로 삭제되었지만 원글과 영상은 복사되어 삽시간에 전교생에게 뿌려졌다. 소문까지도 필요 없었다. 태형은 근신 처분을 받았고, 남자는 전근을 신청했다.
늦은 밤, 태형은 얼굴 곳곳이 터져서 피가 맺힌 꼴로 정국을 찾아왔다. 다리를 절뚝이며 걸어오는 태형을 보자마자 대문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정국은 기다렸다는 듯 쏜살같이 달려가 태형의 앞에 등을 내밀었다. ‘봤어?’ 정국의 등에 업히며 태형이 물었다. 정국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딛기 시작했다. ‘봤냐니까?’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다. ‘봤네.’ 태형은 정국의 등에 이마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좋은 냄새가 스몄다. 편안했다.
‘아빠한테 엄청 맞았어. 온 몸이 아파. 발목을 맞아서 걷기가 힘들어. 집에 어떻게 들어 가. 또 맞을 지도 몰라.’
‘그럼 우리 집에서 살아요.’
‘안 돼. 전정연이 나 죽이려고 할 걸.’
‘그럼 내 방에서 숨어 살면 되겠다.’
‘그거 엄청 솔깃한 제안인데.’
‘침대는 형 줄게요. 난 아무데서나 잘 자니까 바닥에서 자도 돼요.’
‘내가 너 끌어안고 잘 거라는 거 알고 괜히 그러는 거지?’
태형은 큭큭거리며 쏘아붙이자 정국도 따라 웃었다. 들켰네요. 읊조리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태형은 정국의 등에 붙이고 있던 가슴팍을 떼어내고 정국의 동그란 뒤통수를 헤집었다. 결이 좋은 까만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정국은 얌전히 태형의 손길을 받으며 계속 걸었다.
오늘 하루 내내 태형이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걱정됐다. 본인의 상처에는 무감한 정국은 반 아이들이 흥밋거리로 본문의 글을 줄줄 읽을 때도, 학교 컴퓨터로 그 영상을 보란 듯이 틀었을 때도 오직 태형만을 염려했다. 마음의 상처를 다루는 것에는 서툴다. 제 감정조차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데. 태형에게로 향하는 모든 나쁜 말을 막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운동을 열심히 해서 몸을 좀 더 키우면 될까. 태형이 저를 조금이라도 저와 같은 마음으로 바라보게 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보다 잘생겨지면 가능할까. 하지만 그게 안 되더라도, 모든 게 불가능하더라도 정국은 태형의 옆에 있고 싶었다. 아니, 있을 수 있었다. 모두가 떠나가도 전정국은 김태형의 옆에 남아있을 자신이 있었다. 정국은 태형을 자신의 침대에 앉히고 난 뒤에 그가 싫어하더라도 지금 업고 있는 이 마른 몸을 꽉 껴안아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위로는 아니었다. 나는 여기 있다고, 형을 지금 안아주고 있는 사람은 나뿐이라고, 다만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정국아 내가 여전히 좋아?’
정국의 침대 끝에 걸터앉아 바닥에 한 쪽 무릎을 꿇고 앉은 아이를 내려다보며 태형이 물었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들어왔던 질문이라 정국은 또 망설임 없이 너무 좋아요, 하고 대답했다. 부어오르는 태형의 발목을 차갑게 찜질해주기 위해 얼음물과 수건을 준비한 정국은 조심스럽게 태형의 발목을 끌어와 찬 수건으로 감쌌다. 맨 손에 닿은 차가운 얼음물 때문에 정국의 손마디와 끝이 붉게 달아올랐다. 태형은 그게 퍽 야하다고 생각했다. 두 손으로 침대 시트를 짚은 채 상체를 뒤로 젖히고 있던 태형은 허리를 숙여 정국에게 바짝 다가갔다.
‘발목 부러진 거면 어떡해.’
‘그럼 너무 아파서 말도 못 해요. 괜찮을 거예요.’
‘나 터진 입술도 아프고 여기 찢어진 눈가도 아프고 다 아파.’
‘어디 봐봐요.’
태형은 보란 듯이 고개를 다양한 각도로 돌려가며 형편없는 얼굴을 정국에게 보여주었다. 정국은 아픔을 대신 느끼기라도 하듯 괴롭게 얼굴을 찡그리며 태형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상처는 병원을 가서 꿰매야 할 정도까지는 아닌 듯 했다. 상처 부위 대신 태형의 눈과 코, 입술을 빤하게 바라봤던 정국은 민망해져서 얼른 눈을 거뒀다. 상처 보는 것을 핑계로 제 얼굴 곳곳을 들여다보던 정국의 시선을 따라 훑고 있던 태형의 눈길도 아쉽다는 듯 멀어졌다.
‘이따가 약 발라줄게요. 찜질 다 하고.’
‘차갑다.’
‘좀만 참아요.’
‘싫어.’
‘싫어도 참아요.’
‘싫은데.’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요. 내 말 좀 듣…!’
태형은 다짜고짜 정국의 멱살을 잡고 끌어와 부딪히듯 입을 맞췄다. 너무 갑작스럽게 태형의 손에 이끌려가느라 정국이 무릎으로 쳐버린 양동이가 뒤집어지면서 얼음물이 와르르 쏟아지고 정국의 손에 들려있던 젖은 수건도 철퍽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놀라서 감는 것도 잊어버린 시야 안에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눈을 감고 저에게 입을 맞추고 있는 태형이 가득 들어차있었다. 이대로 죽어버린 대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얼마나 바랬는지. 얼마나 꿈꿨는지. 정국은 저릿저릿거리며 덜덜 떨리는 손을 끌어와 아주 느리게 태형의 두 뺨을 감쌌다. 차가운 정국의 손끝에 흠칫거리던 태형은 이내 고개까지 꺾어가며 더 깊숙하게 정국의 입안을 헤집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피부가 얼음장 같은 정국의 손을 덥혔다. 정국은 세상 누구보다 가장 가까이 태형과 닿아있는데도 불안함과 초조함을 느꼈다. 심장이 꽉 조이는 것처럼 아파서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확인하는 것처럼 태형을 불렀다. 태형은 아무 대답도 해주지 않고 정국의 입을 막아버리듯 입술만 갖다 댈 뿐이었다.
태형의 손이 정국의 티셔츠 안으로 들어 와 그 안의 몸을 어루만졌다. 피가 빠르게 돌고 어느새 손끝까지 완전히 뜨거워졌을 때, 태형을 생각할 때마다 자연스럽게 왔던 신체 반응이 당연하게 정국을 찾아왔다. 오랫동안 붙어있던 입술을 떼어내고 차오른 숨을 몰아쉬며 태형은 정국을, 정국은 태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정국은 태형에게서 대답을 바라고 있었다. 무슨 뜻이에요? 형도 제가 좋아요? 형도 저를…, 많이 좋아해요? 분명 정국은 태형에게서 신체적인 욕정이 아닌 다른 것을 원했다. 저에게 태형이 줄 수 있는 무궁무진한 것들 중에서 가장 원하고 바라던 게 있었다. 하지만 태형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처음 보는 얼굴로 정국을 쓰다듬고 어루만지기만 했다. 정국은 절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을 태형임을 알았다. 이 형은 아마 죽을 때까지 이럴 거야…. 마음은 정말 담담했는데. 이상하게 자꾸 눈물이 났다. 톡, 톡 가볍게 한두 방울 떨어지던 게 돌연 툭, 툭 굵게 흘러내리더니 이내 주룩주룩 쏟아졌다. 태형은 정국에게 왜 우는 지, 왜 슬픈 지 구태여 물어보지 않았다. 다만 급하지 않게 차분한 손길로 입고 있는 셔츠의 단추를 하나하나 스스로 풀어내렸다. 반으로 갈라진 셔츠를 뒤로 젖혀 아무렇게나 바닥에 떨어뜨리고 정국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윽, 정국이 꾹 참는 소리를 냈다. 그건 새어나온 신음소리 같기도, 끝까지 눌러 참지 못한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정국이 처음 보고 만지는 태형의 맨몸에 입을 맞추고 손으로 그의 몸을 느낄 때마다 태형은 자꾸만 피부 위로 떨어지는 눈물 때문에 속이 타들어가는 것처럼 쓰렸다. 가엾게도 정국은 자꾸만 울었다. 정국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지면 눈물이 그득 묻어나왔다. 제가 태형을 만질 때도, 태형이 저를 만져줄 때도 정국은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뜨리는 모습이 너무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축축하게 젖은 속눈썹을 손끝으로 닦아내주면 정국은 죄송해요, 죄송해요…, 하고 중얼거리다가 가까이 다가와 입을 맞췄다. 저 재미없죠, 자꾸 울기만 해서…. 죄송해요…. 이미 몇 차례나 입술이 닿았던 몸에 다시 입술을 문지르고 안쪽의 여린 살을 달래는 것처럼 어루만졌다. 분에 넘칠 정도로 다정한 정국의 입맞춤과 손길을 받으면서 그 땐 하마터면 태형도 눈물을 왈칵 쏟아낼 뻔 했다.
태형의 손이 스치고 지나간 소년의 몸은 미성숙했지만 단단하고 다부졌다. 태형이 저를 만져줄 때마다 정국은 태형의 눈을 놓치지 않고 따라다니며 태형의 목과 뺨에 키스를 했다. 매일 베개 용도로 썼기에 뒤통수로만 느꼈던 허벅지를 손바닥으로 쓸어주자 정국은 마른 침을 삼키며 태형과 손을 겹쳐 잡고 뚫을 기세로 태형의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또 주르륵 눈물 줄기를 얼굴에 그렸다. 그러면 태형의 마음도 저릿하게 아팠다. 그렇게 한 번도 본 적 없던 서로의 몸을 가득 끌어안고 만지고 느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눈을 떴을 때 태형은 없었다. 벌떡 일어나 다급하게 옷을 주워 입으려는 정국의 눈앞으로 ‘학교 잘 다녀올 것’이라 적힌 종이가 팔랑팔랑 떨어졌다. 정국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침대에 다시 스르르 몸을 뉘였다. 등교 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니 조금이라도 더 태형이 있었고, 그의 체온이 남아있는 공간에 머물고 싶었다. 태형이 없는 학교였지만 그래도 평범한 하루였다.
늘 그랬듯 지각하지 않았고 수학 시간은 지루했고 점심은 맛있게 먹었다. 5교시는 졸렸고 6교시부터 하교할 생각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7교시엔 태형에게 만들어줄 저녁 반찬 메뉴를 떠올렸고 마지막 수업부터는 시계만 빤히 들여다봤다. 초가 그렇게 느리게 흘러가는지 처음 알았다. 그 매순간마다 태형을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해도 될까 싶을 정도로 그를 떠올렸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는 단 1초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태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화장실을 갈 때도 휴대폰을 놓지 않고 언제 올지 모르는 연락을 단숨에 받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장을 봐온 식재료로 인터넷을 뒤져가며 없는 실력으로 식탁까지 가득 채웠다. 음식이 식어갈 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다시 데워먹으면 되니까. 주방 뒷정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들여다볼 때도 괜찮았다. 형이 조금 늦네 정도로만 생각했다. 자정이 넘어갈 적에는 조금 서운했다. 지금 다른 사람과 있구나. 괜찮아, 그럼 내일 보면 되지. 그 때 전화가 왔다. 태형이길 바라며 냉큼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는데 정연이었다. 아무 의심 없이 전화를 받았다.
멍청하게도 그렇게 하루가 지나서야 김태형이 떠났음을 알았다.
그 김태형이 지금 호텔 방 욕실에서 샤워를 하고 있다. 정국은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를 들으며 아직도 정리되지 않는 머리를 움켜잡았다. 본 결혼식은 1시 시작 예정이었고 현재 시간은 2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정국은 다리를 달달 떨며 긴 숨을 뱉었다. 어차피 자신은 어떠한 손해도, 피해도 입을 일이 없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지만 몇 초도 가지 않아 곧바로 다짐이 무너졌다. 김태형의 저 조막만한 머리를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고. 대체 무슨 생각인지 예나 지금이나 알 수가 없었다. 소파 받침대에 팔을 얹고 이마를 짚고 있던 정국은 갑자기 부르르 떨리는 휴대폰 진동에 아악 소리를 지르며 튕겨나듯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정연이었다. 이미 그녀에게서 수차례 부재중 수신이 와있었지만 태형과 함께 있느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결혼식 일로 전화한 게 분명했다. 산산조각이 난 결혼식의 주된 원인 중 하나가 자신의 동생일 거라고는 꿈에도 예상 못 할 테고…. 정국은 한참을 끙끙 앓으며 망설이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야, 너 어디야?
“누나, 그게….”
때마침 욕실 문이 열리며 김이 폴폴 올라오는 매끈한 몸 위에 샤워 가운 한 장만 달랑 걸친 태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운의 허리끈을 느슨하게 묶고서 젖은 머리카락을 탈탈 털며 태형이 이쪽으로 저벅저벅 걸어왔다. 정국은 그 와중에도 척척하게 젖은 태형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태형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말꼬리를 흐렸다. 계속 전화나 하라는 듯 눈썹을 까딱이던 태형은 정국이 앉은 소파의 반대편 끝 쪽에 엉덩이를 대고 앉았다. 정국은 정연과의 통화와 야하게 웃으며 다리를 꼬고 앉아 이쪽을 주시하는 태형을 동시에 신경 쓰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너 뷔페 먹고 싶어서 온다고 한 거 아니었어? 어디냐니까.
“어?”
-결혼식 다 끝날 때까지 뭐했어? 아니, 일단 어디야. 밖이야? 나 먼저 집에 들어가?
“결혼식… 다 끝났다고?”
정국은 이게 또 무슨 소린가 싶어 토끼눈이 된 얼굴로 태형을 바라보았다. 태형은 촉촉하고 땡글한 광대를 말아 올리며 싱긋 웃고 있을 뿐이었다. 어쩐지 등 뒤로 식은땀이 나고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안이 축축해지고 있었다.
-그래! 뷔페 음식 먹으려고 알지도 못하는 내 친구 보희 결혼식 온다고 한 거 아니야?
“…그니까 누나 너 오늘 신부측 지인으로….”
-어. …설마. 너 신랑되는 사람 이름보고 따라왔다가 그냥 간 거? 야, 김태형이랑은 나도 연락 끊긴지가 언젠데! 아직도 걔 못 잊었냐? 진짜 덜떨어져가지고…, 아, 끊어!
잔소리만 된통 얻어들은 통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정국은 황당함과 쪽팔림을 골고루 맛보며 급격하게 건조해진 입술을 혀로 쓸었다. 할 말이 없어서 입맛만 한참을 다셨다. 뭐…지? 상황파악을 못한 뇌에 버퍼링이 걸리면서 모든 행동이 느리고 굼떠졌다. 그러니까… 그 청첩장이….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여즉 들고 있던 손을 천천히 소파에 내려놓고 허탈함과 어이없음에 헛웃음을 터뜨리면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이게 대체 뭐야? 무슨 상황이야? 김태형이 나 속인 거야? 아니 뭐 그딴 걸로 장난을 쳐? 그러면서도 오늘이 제 바로 옆에 앉은 이 김태형의 결혼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내심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또 어쩔 수 없었다. 쪽팔리긴 한데 기분이 좋게 쪽팔렸다. 이럴 수가 있나. 김태형은 항상 저에게 새로운 감정을 일깨우는 인간이었다.
“정국아.”
새어나오는 통화소리로 오랜만에 정연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태형이 젖은 머리카락 끝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전화가 끝나기를 기다리다가 마침내 정국을 불렀다. 왜 부르냐는 듯 서러움과 원망이 섞인 동그란 눈으로 정국이 저를 힐긋 바라보았다. 물기로 반질반질한 눈에 태형의 속도 울컥거렸다. 이번에도 울어주려나. 전정국은 여전했고, 그래서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7년 전, 이제는 누구도 기억하지 않고 간단하게 뇌에서 지워버렸을 학교 홈페이지에 올라왔던 글과 영상은 사실 태형의 자작극이었다. 게다가 단어만 거창하게 들릴 뿐이지, 사실 영상은 고작 포옹과 키스가 전부였다. 어디까지나 정국에게 자신의 불행을 공감시키고 오직 전정국만이 김태형의 옆에 영원히 남아있을 거라고 본인이 아닌 정국에게 확인사살을 시키기 위함이었다. 친부는 자신의 아들이 학교에서 그것도 교사와 스캔들로 얽혔다는 사실에 길길이 날뛰며 태형을 때렸고, 그 길로 비서를 시켜 비행기 티켓과 유학 신청서를 당장에 준비했다. 계획의 일부였다. 그 모습으로 정국을 찾아가는 것까지도. 아이에게 기대감이라는 달콤함을 준 뒤 홀연히 사라져버리는 것. 그게 태형이 생각한 방법이었다. 절대 잊을 수 없도록, 절대 잊히지 않도록.
그런데 말이다, 다시 돌아간 미국은 전처럼 즐겁지 않았다. 아무리 사람들을 자주 만나고 전처럼 즐겁게 살아보려고 해도 도통 몸과 마음이 말을 안 들었다. 처음에는 이유를 몰랐다. 모르고 싶었다. 전정국이 좀 빈번하게 생각나고 보고 싶긴 했지만 그 애가 좋았으니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하며 덤덤할 수 있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죽을 것 같았다. 가끔씩은 정말로 숨도 잘 안 쉬어졌다. 보이는 곳에 전정국이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가 너무 컸다. 전정국이 그리웠다. 정말 죽도록 그리웠다. 이건 태형의 계획에는 없던 징후였다. 이렇게 아프고 고통스러운 건 전정국의 몫이지 자신의 역할은 아니라고 단언하고 있었단 말이다.
태형은 본인의 정신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새로운 것을 보고 들으며 머리에 주입하면 전정국이 그 밖으로 밀려나갈지도 몰랐다. 그래서 돌연 여행길에 올랐다. 계획 한 줄 짜지 않고 가벼운 배낭가방 하나만 메고 떠났다. 그렇게 태형이 이 자리에 서있는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될 정도로 웅장하고 경이로운 풍경과 마주했을 때, 우습게도 바로 옆에 붙어 앉아 양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을 정도로 수줍어하면서도 종알종알 설명해주던 목소리가 생각났다. 꼭 같이 가자고 약속하며 해맑게 웃던 얼굴도 떠올랐다. 긴 시간을 들여 정국이 사진으로 보여주고 알려주었던 사진 속의 모든 곳에 발걸음을 하고 난 후에야 알았다.
사실은 전정국이 너무 좋다고. 잊히지 않으려고 머리를 굴리고 온갖 잔인한 수를 다 썼지만, 전정국 역시 김태형에게서 절대로 잊혀지지가 않는 거라고.
길었던 전정국 잊기 프로젝트의 마지막 도착지는 한국이었다. 정국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을 때는 없는 번호라는 기계음만 들렸다. 정연의 번호는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서 시도조차 해볼 수 없었다.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태형은 정국이 살던 곳으로 한걸음에 달려가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웬 생뚱맞은 여자가 튀어나왔다. 절대 아닐 걸 알면서도 혹시 정국의 연인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눈을 세모나게 뜨고 대뜸 전정국 어딨냐고 물었다. 여자는 똑같이 태형을 째려보며 그게 누구냐고 되물었다. 휴, 전정연의 새 친구인가 보군. 태형은 그제야 미소를 띠우며 웃는 낯으로 여자에게 공손히 자신이 전정연의 친구이며 그 동생을 찾고 있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태형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여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도대체 그 사람들이 누구냐고 물었다. 몇 개월 전에 비어있는 집에 이사를 왔고 전에 살던 사람들의 얼굴은 본 적도 없다고 덧붙였다.
하늘이 벌을 주나보다. 착한 애 꼬셔서 아프게 했다고 벌을 내리나보다! 서울 한 가운데에 갈 곳 없이 뚝 떨어진 태형은 고급 호텔 스위트룸에 장기 숙박을 예약하고 난 후 유심칩을 바꾼 새 휴대폰에 각종 SNS 어플리케이션을 다운 받았다. 전정국, 전정국, 전정국. 검색을 해도 나오는 게 없었다. 전정연, 전정연, 전정연. 역시나 나오는 게 없었다. 아, 이 노관종 남매 녀석들아! 태형은 머리를 싸매며 휴대폰을 던져버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대체 어디서 뭐하냐고 전정국! 큰 숨 덩어리를 토해내듯 한숨을 내쉬다가 다시 몸을 벌떡 일으켜 뽈뽈뽈 기어가 휴대폰을 주워왔다. 전씨 남매와 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의 계정을 뒤지느라 꼬박 삼일 밤을 새웠다. 허탕이었다.
그 다음 방법으로 태형은 최대한 정국과 정연의 고등학교 친구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정국이 자신에게 모든 시간을 할애하면서 자연히 그의 친구들과도 거리가 멀어졌던 게 생각났다. 걔한텐 나밖에 없었지. 어쩜 좋아. 전정국 날 정말 많이 좋아했잖아? 기뻐해야할지 미안해야할지 알 수 없는 기억을 더듬다가 태형은 이내 곧 슬퍼졌다. 정국의 행방을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태형은 고 3시절 정연과 함께 무리를 이루었던 친구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밥을 먹다가도 익숙한 이름이 생각나면 SNS 어플을 켜고 이름을 검색했다. 뇌를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이름을 눈알이 빠지도록 서치했지만 잡히는 게 없었다. 하지만 태형은 해냈다. 서치력이 부족했던 탓으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수많은 계정을 관음하느라 무려 일주일이나 더 소비했지만 불굴의 김태형은 찾아냈다. 곧 결혼을 하신다는 이보희 양! 때마침 신랑 분의 성함도 김태형이니 그녀의 등장이 괜히 더 반갑던 태형이었다.
이보희 양은 아무리 그래도 대뜸 정연의 번호와 주소를 알려줄 순 없다며 결혼식에 정연이 올 터이니 그 때 만나는 것은 어떻겠냐 제안했다. 마침 청첩장을 돌리기 위해 다른 지인들과의 모임을 갖고 있던 그녀는 결혼식 참석을 딱히 내켜하지 않는 그들에게 계정을 만들기 위해 부랴부랴 찍었던 태형의 셀카이자 프로필 사진을 보여주며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들은 당장이라도 가겠다며 오히려 이보희 양에게 밥을 사주었다고.
청첩장을 혹시라도 정국이 보게 된다면, 그래서 신랑 김태형을 나라고 생각한다면, 그래서 홧김에라도 와준다면, 그러면 우린 어쩌면 다시 만나지 않을까. 만나는 게 어려웠을 뿐, 어떻게든 만나기만 한다면 지금이라도 시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드라마 같은 상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머리가 아파서 북적거리고 복잡한 식장을 벗어나 잠깐 숨을 돌리기 위해 몸을 숨겼던 골목에서 정국을 만날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세상에 얘 왜 이렇게 잘 컸어. 오구오구, 담배도 펴? 전정국 이제 어른이야? 어른이 됐어요? 아기가 어른 됐다고 몸에 안 좋은 걸로 시위라도 하는 것 같네. 멀리서 봐도 얼굴이 너무 잘생겼고 몸은 보기만 해도 만족스러워 군침이 돌았다. 전정국이다, 정국이다, 정국아, 정국아! 정국을 찾기 위해 온갖 계정을 다 들쑤시고 다니느라 흰자의 실핏줄이 터지고 엄지손가락의 관절을 잃어야했던 그간의 고생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너무 기쁘고 반가워서 눈물이 흐르기 직전이었는데 결혼을 축하한다는 아이의 축하인사에 짓궂고 못된 마음이 고개를 뾰족 들고 일어나버렸다. 천성은 못 버리나보다. 극단적 인간 김태형은 극적인 엔딩 장면을 만들어내고 싶다는 욕심에 돌연 사로잡혀버렸다. 그래서 그만….
“정국아.”
태형은 다시 정국의 이름을 부르며 정국이 소파 위에 내려놓은 뭉툭한 손끝에 꼬물꼬물 기어간 자신의 가느다란 손가락을 톡 갖다 댔다. 정국은 혼란스럽고 황당해 죽겠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손을 떼어내지는 않았다. 정국의 기다림에 자신감을 얻은 태형은 이번에는 좀 더 깊게 정국의 손을 파고들었다. 피부색도, 모양도 다른 두 개의 손이 나무뿌리처럼 단단히 얽혔다. 태형은 상체를 숙이며 정국과의 간격을 슬금슬금 좁혀갔다. 입술이 정국에 귀에 거의 닿겠다 싶을 쯤이었다.
“우리, 할 얘기가 엄청 많은 것 같지 않아?”
밤이 새도록 모든 이야기를 해줄 참이었다. 내가 얼마나 나빴고 모졌으며 바보 같았는지, 그리고 네가 보고 싶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네게 다시 돌아오기까지 걸린 그 긴 시간 동안 내가 무얼 했는지. 그 모든 이야기를 듣고 나면 어쩐지 전정국은 저 예쁜 입술 사이로 대뜸 아직도 사랑한다는 고백을 꺼내놓을 것만 같다. 열여덟일 적과 다름없이 붉어지는 얼굴이 그렇게 말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면 나도 같은 대답을 들려줘야지. 이제는 그럴 수 있다.
Someone’s wedding day
어느 누군가의 행복한 결혼식 날. 그 날의 일이었다.